1660년, 영국의 왕정복고를 전후하여 런던 사람들은 묘한 사회적 약속을 하나 체결했다. 올리버 크롬웰이 집권하던 시절 저질렀던 각종 학살과 독재에 대해 더 이상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공식적인 선언이 아니었다.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고, 세대가 지나자 그 침묵은 공식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현상을 가리켜 '망각의 합의(Act of Oblivion)'라고 불렀는데, 흥미롭게도 그 합의가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진실이었다.
거짓과 진실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다. 이 글은 그 불편한 진실, 즉 집단적으로 합의된 거짓이 어떻게 진실의 지위를 획득하는지에 대한 탐구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합의의 결과물을 우리는 과연 거짓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진실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묻는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진실의 정의를 두고 싸워왔다. 가장 고전적인 입장은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이다. 진술이 세계의 실제 상태와 일치할 때 그것은 참이다. 눈이 하얗다고 말하고 눈이 실제로 하얗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런데 이 단순명쾌한 이론은 인간 사회에서 '진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상당수를 설명하지 못한다. 예컨대 돈은 왜 가치가 있는가?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은 물리적으로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그것이 1만 원의 가치를 지닌다는 명제는 세계의 어떤 물리적 사실과 대응하는가?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진실이다. 아니, 진실보다 더 확고한 무언가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은 1966년 그들의 저작 『실재의 사회적 구성』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객관적 사실의 세계와 사회적으로 합의된 현실의 세계는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하며, 우리의 일상적 삶은 대부분 후자의 세계에서 영위된다. 이것은 허무주의적 결론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실은 물리적 현실 못지않게 실재하며,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논리를 밀어붙이면 불편한 지점에 도달한다. 만약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오랫동안 어떤 거짓을 공유한다면, 그 거짓은 사회적 현실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사회적 현실이 된 무언가를 여전히 거짓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신화화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지만, 신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꾸준히 구축해나갔다. 당시 로마인들이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다수의 식자층은 이것이 정치적 수사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전에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얼굴이 새겨졌고, 신전이 건립되었으며, 의식이 거행되었다. 알고 있었지만 믿기로 선택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적 공간에서 표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의 신성(神性)은 로마 제국의 통치 원리 속에 실재하는 진실이 되었다. 그것이 허구임을 아는 사람들조차 그 허구가 만들어내는 현실 속에서 살았고, 그 현실에 복종했다.
이 패턴은 역사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중세 유럽에서 왕의 신성한 권위는 알고 있는 거짓이었다기보다는 구조적으로 의심하기 어려운 믿음이었지만, 계몽주의 이후 그 허구성이 폭로된 이후에도 왕권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사람들은 왕이 신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왕이라는 제도 자체는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 합의는 왕권을 계속해서 실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론이 등장한다. 이것은 거짓의 진실화가 아니라, 거짓을 기반으로 구축된 사회적 구조의 관성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거짓은 여전히 거짓이고, 다만 그 거짓이 만들어낸 제도와 구조가 실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반론은 얼핏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기준을 더욱 흐릿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반론 자체가 거짓이 실재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결과를 낳는 명제는, 설령 그 명제 자체가 물리적 사실과 대응하지 않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의 자격을 갖는다.
사회학자 W. I. 토머스는 1928년 이것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사람들이 상황을 실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 결과는 실재한다." 이것이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다. 어떤 명제가 진실인지 아닌지보다, 그 명제가 진실로 받아들여지는지 여부가 사회적 결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고 하자.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고 일제히 예금을 인출하면, 은행은 실제로 파산한다. 거짓 소문이 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은 단순한 경제적 공황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 열등하다는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사회가 그 집단에게 교육과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실제로 그 집단의 성취를 낮추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 원래의 거짓 믿음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동원된다. 거짓이 현실을 빚고, 그 현실이 거짓을 진실로 만든다. 이 순환은 단순히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 깊은 윤리적 문제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실제 인간들이 실제로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의 합의가 항상 억압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사회를 유지하는 윤활유가 된다. 폴란드의 철학자 레세크 코와코프스키는 모든 사회가 일종의 공유된 신화, 즉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의심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이야기들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이 공유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에 관한 서사, 프랑스인들이 공유하는 혁명의 이상,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단군 신화와 민족의 서사 — 이것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사실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들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의 정확한 사실 여부보다 그것이 공유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거짓의 합의가 지닌 양면성을 직면하게 된다. 같은 메커니즘이 한편으로는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집단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신화는 공동체를 만들기도 하지만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다. 거짓의 합의는 중립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누군가에게 유리하고 누군가에게 불리하다. 누구의 거짓이 합의의 대상이 되는가, 그리고 누가 그 합의로부터 이익을 얻는가 — 이 물음이 거짓의 합의를 단순한 인식론적 퍼즐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로 만든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진실 자체가 권력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는 주장을 평생에 걸쳐 발전시켰다. '진실의 체제(régime de vérité)'라는 그의 개념에 따르면, 어떤 사회에서든 진실로 인정되는 것과 거짓으로 배제되는 것을 결정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이 메커니즘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진실을 말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 즉 전문가, 언론인, 학자, 성직자는 동시에 무엇이 진실로 통용될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는다. 이 권한은 지식을 통해 작동하지만, 그 지식의 배후에는 항상 권력이 있다.
푸코의 통찰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들 한다. 옥스퍼드 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post-truth'를 선정한 이후, 이 개념은 현대 정치와 미디어 환경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탈진실이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믿음이 공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새로운 현상인가?
역사를 돌아보면, 탈진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는 언제나 사실보다 서사에 더 쉽게 반응했다. 선전과 프로파간다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 유통되는 속도와 규모다.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은 사람들을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정보의 거품 속에 가두고, 그 거품 안에서 거짓은 공동체적 합의를 통해 빠르게 진실의 지위를 획득한다. 각자의 거품 속에서 각자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거짓의 합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진실의 사회적 구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모든 진실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진실, 즉 인간의 합의에 의해 성립되는 진실들이 있다. 법, 화폐, 국경, 명예 — 이것들은 인간이 합의함으로써 실재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합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실들이 있다. 지구의 나이, 기후 변화의 메커니즘, 백신의 효과 — 이것들은 인간이 어떻게 합의하든 변하지 않는다. 거짓의 합의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고 해서, 물리적 현실까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두 영역의 경계가 항상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물리적 사실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것이 공론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거부하기로 집단적으로 합의할 때, 그 사실은 공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결과, 물리적 현실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 현실에 대한 대응은 무력화된다. 거짓의 합의는 물리적 진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진실이 현실 속에서 갖는 힘을 박탈할 수 있다. 이것이 거짓의 합의가 지닌 가장 위험한 형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를 분석하면서 이 위험을 명확하게 포착했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선전이 목표로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거짓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점차 그 거짓에 맞서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공공연한 거짓에 맞서는 것은 지적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위협이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알면서도 동의하는 척하고, 그 집단적인 척함은 현실의 일부가 된다.
아렌트가 포착한 이 메커니즘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완전히 낯설지 않다는 점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집단적 압력, 반대 의견을 표명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다수의 믿음에 공개적으로 도전했을 때의 사회적 비용 — 이것들은 모두 거짓의 합의를 강제하는 부드러운 형태의 메커니즘들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총구가 그 역할을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왕따, 낙인, 경력의 위협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알고도 믿지 않기로 한 거짓은 진실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실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진실이 순수하게 인식론적 개념이라면, 즉 세계의 사실 상태와 일치하는 명제라면, 알고 있는 거짓은 어떤 집단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남는다. 그러나 만약 진실을 사회적 기능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 사람들의 행동을 형성하고, 제도를 구성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으로서의 진실 — 거짓의 합의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진실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두 가지 진실관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진실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을 포착하고 있다. 인식론적 진실은 세계가 어떠한가에 관한 것이고, 사회적 진실은 인간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발견되는 것이고, 후자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이 두 차원이 혼동될 때 발생한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을 마치 발견된 사실인 것처럼 포장할 때, 또는 발견된 사실을 사회적 합의의 문제인 것처럼 흐릴 때. 전자는 이념의 자연화이고, 후자는 사실의 정치화다. 역사 속의 가장 해로운 거짓의 합의들은 대부분 이 혼동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인종의 위계가 자연적 사실인 것처럼, 여성의 지적 열등함이 생물학적 진실인 것처럼, 특정 계급의 지배가 신의 뜻인 것처럼 포장될 때 — 사회적 합의는 발견된 사실의 외피를 두르고 비판의 여지를 차단한다.
결국 거짓의 합의에 맞서는 방법은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하나는 인식론적 층위에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과 실제로 사실인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회의주의와 비판적 사고의 훈련을 요구한다. 다른 하나는 윤리적 층위에서, 누가 어떤 거짓으로부터 이익을 얻는가를 묻는 것이다. 거짓의 합의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특정한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그 권력 관계를 가시화하는 것이 비판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합의를 해체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사회는 합의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법도, 화폐도, 언어도 합의다. 문제는 합의 자체가 아니라, 그 합의가 투명하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누구를 배제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비판과 수정에 열려 있는가다. 건강한 사회는 합의를 영원한 진실로 신성화하지 않으면서도 합의를 통해 작동하는 사회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장 어려운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어떤 거짓의 합의 위에 서 있는가?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가담한 합의를 내부에서 발견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들,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들 — 그것들이 바로 가장 강력한 거짓의 합의의 후보들이다.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한 시대의 자명한 진실이 다음 시대의 부끄러운 거짓이 되었음을. 노예제가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있었다. 여성이 투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상식이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 시대의 자명한 진실들 중 미래 세대가 부끄럽게 돌아볼 것은 무엇인가? 이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거짓의 합의에 맞서는 가장 근본적인 저항이다. 알면서도 믿기로 선택하지 않는 것, 그 선택에 이름을 붙이고 공적 공간에서 발화하는 것. 이것이 진실을 향한 유일한 길이다. 비록 그 길이 외롭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또 다른 합의들을 발견하게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