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하버드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만약 국가가 당신에게 매달 월급의 10퍼센트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도록 법으로 강제한다면, 그것은 자선인가, 아니면 세금인가?" 학생들은 잠시 침묵했다. 누군가는 "자선이죠"라고 대답했고, 누군가는 "그건 강탈에 가깝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그 침묵과 소란 속에 이 에세이의 핵심이 있다. 롤스는 끝내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말을 남겼다. "어쩌면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느냐보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 모릅니다." 그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유효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선행을 자발성의 산물로 이해해왔다. 누군가 길을 걷다가 쓰러진 노인을 도울 때, 우리는 그 행위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선"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세계의 수많은 종교와 철학 전통이 한목소리로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행의 뿌리가 내면의 선한 의지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노인을 도운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에 따라 법적으로 구조 의무를 지고 있었다면, 그 행위는 여전히 아름다운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을 비롯한 수십 개의 국가들은 실제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울 법적 의무를 시민에게 부과하고 있다. 프랑스 형법 제223-6조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음에도 외면한 자를 최대 5년의 징역과 75,000유로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그렇다면 프랑스인이 강에 빠진 사람을 구했을 때, 그것은 선행인가, 아니면 단순한 법적 의무의 이행인가? 도움을 받은 익사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도덕 감각은 무언가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 질문이 얼핏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덕 철학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첨예한 분열선 위에 정확히 놓여 있다. 우리는 이 분열을 두 거인의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한쪽에는 칸트가, 다른 한쪽에는 벤담이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평생을 보낸 철학자였다. 그는 도덕적 행위의 가치는 오직 그 행위가 의무로부터, 즉 순수한 이성적 의지로부터 비롯될 때만 생긴다고 보았다. 칸트에게 선행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였다. 상인이 정직하게 거래하는 이유가 '정직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이 발각되면 손해이기 때문'이라면, 그 정직함은 도덕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두려움에서, 혹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행한 선행은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도덕적 의미에서 선이 아니다. 칸트는 이것을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명확히 밝혔다. "선의지(good will)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 법적 강제 아래에서 행해진 선행은 이 기준에서 보면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것은 두려움과 계산의 산물이지, 순수한 의지의 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의 맞은편에는 제레미 벤담이 있다. 벤담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로, 1789년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인간의 모든 도덕적 판단은 단 하나의 원리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벤담에게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행복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가져다주느냐로 결정된다. 동기는 부차적인 문제다. 가난한 사람이 밥을 먹었다면, 그것이 자선으로 이루어졌든 세금으로 이루어졌든, 법에 의한 강제로 이루어졌든, 결과적으로 선이다. 밀은 이 입장을 한층 정교화하여 행복의 질을 구분했지만, 결과 중심주의라는 뼈대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 관점에서는 강제든 자발이든 결과가 같다면 도덕적 무게도 같다.
이 두 입장 사이의 충돌은 학술적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 충돌을 매일 경험한다. 헌혈을 예로 들어보자. 대한민국은 자발적 헌혈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으며, 헌혈은 법적 의무가 아니다. 그 결과 혈액 수급은 만성적으로 불안정하다. 반면 혈액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나라도 있고,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 헌혈을 '권장'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강제에 가깝게 운영하는 시스템도 존재해왔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린 피가 자발적으로 기증된 피인지, 아니면 금전적 보상을 위해 채혈된 피인지를 병원에서 수혈 받는 환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목숨이 그 피 덕분에 구해졌다면, 과연 어느 피가 더 선한 피인가? 이 질문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도덕의 본질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탐침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역사는 이 논쟁이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님을 반복해서 증명해왔다. 20세기 초 영국의 복지국가 건설 과정을 생각해보자. 1911년 자유당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국민보험법을 통과시켰을 때, 영국 상류층과 보수 언론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더 타임스』는 이것을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비난했고, 처칠의 정치적 맞수였던 보수당 지도자들은 "자선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강제된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강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칸트의 언어를 빌리지 않았지만, 구조는 동일했다. 강제된 선행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법은 수백만 명의 영국 노동자들이 질병과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최초의 사회 안전망이 되었다. 이후 1948년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가 설립한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공 의료 제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NHS를 폐지하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영국 정치인은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다. 처음에는 강제로 걷힌 돈이 만들어낸 제도가, 이제는 영국인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일부가 된 것이다. 당시의 강제가 지금의 선이 된 것인가, 아니면 그 강제는 처음부터 선이었던 것인가?
이 역사적 사례는 선행의 '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법으로 강제된 행위의 도덕적 주체는 누구인가? 개인인가, 국가인가? 납세자인가, 정치인인가? 국민보험법의 수혜자인 노동자를 도운 것은 법을 만든 로이드 조지인가, 보험료를 납부한 고용주인가, 아니면 기여금을 낸 노동자 본인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선행의 주체가 개인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한다. 어쩌면 선행은 개인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집단이 만들어내는 구조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법과 제도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인간의 공감 능력을 도덕의 기초로 보았지만, 동시에 공감만으로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인간의 감정은 멀리 있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것에 더 강하게 반응하고, 낯선 사람보다 아는 사람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법은 이 편향을 교정하는 메커니즘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 우리와 멀리 있는 사람, 우리와 닮지 않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은 종종 감정이 아니라 제도의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德)이란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습관화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2권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설령 처음에는 법의 강제로 선행을 시작했더라도, 그 반복이 결국 덕성을 형성할 수 있다. 마치 매일 억지로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아침형 인간이 되듯이, 강요된 선행이 자발적 선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통찰은 오늘날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연구로도 뒷받침된다. 행동이 태도를 바꾼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믿기 때문에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믿게 된다. 법이 강제하는 선행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선을 향한 내면의 성향 자체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심리학적 증거는 풍부하다.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그들의 저서 『넛지(Nudge)』에서 인간의 행동이 초기 선택 설계, 즉 '디폴트(default)'에 크게 영향받음을 보여주었다. 장기 기증 동의율을 살펴보면, 기본 설정이 '동의'인 나라(옵트아웃 방식)는 90퍼센트 이상의 동의율을 보이는 반면, 기본 설정이 '비동의'인 나라(옵트인 방식)는 15퍼센트 수준에 불과하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비교한 에릭 존슨과 대니얼 골드스타인의 연구에서 이 격차는 충격적으로 드러났다. 법적으로 옵트아웃 방식을 채택한 오스트리아는 99퍼센트 이상의 동의율을 보였고, 옵트인 방식의 독일은 12퍼센트에 불과했다. 사람들의 기증 의지나 도덕적 성향이 두 나라 간에 그토록 다를 리 없다. 차이를 만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였다. 제도적 강제 혹은 유도가 결과적으로 '좋은 일'의 총량을 극적으로 늘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회적 선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이 맥락에서 보면, 법은 선행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설계하는 것이다. 구분은 미묘하지만, 그 의미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논의를 너무 빨리 결론으로 이끌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가장 불편한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행의 강제는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침해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 어떤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칸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것, 즉 인간은 항상 목적 자체이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이른바 '인간성 정식(humanity formula)'—은, 국가가 개인을 '선한 결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한다. 만약 국가가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당신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논리를 일관되게 밀어붙인다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역사는 이미 보여주었다. 선한 결과를 위해 개인을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도덕의 영역에서 공학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설계되고 조작되어야 할 부품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는 해결 불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강제'의 층위를 세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법적 강제가 모두 같은 종류의 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을 통한 재분배와 특정 선행 행위의 직접 강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군복무를 통한 국가 방위 의무와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적 명령은 다르다. 전자는 사회 계약의 일부로,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 이래 자유주의 전통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정한 의무의 자발적 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로를 달릴 때 교통법규를 지키도록 강제당한다. 그 강제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안전하게 도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세금과 복지 제도도 마찬가지다. 나의 세금이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수술비가 되고, 누군가의 세금이 나의 실업 수당이 된다. 이것은 강탈이 아니라 상호 보험이다.
그러나 강제의 층위가 달라지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국가가 개인의 외적 행위를 넘어, 내면의 동기와 정서까지 규율하려 할 때, 우리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선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그린 세계를 떠올려보자. 오세아니아의 당은 시민들이 단순히 복종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당은 윈스턴 스미스가 빅 브라더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내면 깊은 곳에서 당의 이념을 '믿기를' 원했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당은 고문과 세뇌를 동원했다. 오웰의 소설은 1949년에 쓰였지만, 그것은 이미 스탈린의 소련과 히틀러의 독일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자아비판 강요, 공개 고백, 집단 열정의 의례적 시연—이 모두는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의 감정과 신념까지 국가가 소유하려는 시도였다. 이 지점에서 강제된 선행은 더 이상 선의 근사치조차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선행의 강제가 재앙으로 끝난 사례는 넘친다.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사회 실험들을 보라. 소련의 집단 농장화(collectivization)는 농민들에게 "사회 전체를 위한 선"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강제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이것을 역사의 필연이자 도덕적 의무로 포장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강제된 선행'의 결과로 홀로도모르(Holodomor)가 발생했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중국의 대약진 운동(1958~1962)도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한 선"이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에게 개인 소유를 버리고 인민공사에 합류할 것을 강제했다. 그 결과는 역사상 최악의 기근 중 하나로, 공식 추산만으로도 1,500만 명에서 5,500만 명이 사망했다. 이 끔찍한 결과들은 선한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니 때로는 선한 의도가 가장 위험한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강제된 선행이 선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강제'가 정당한 절차와 민주적 합의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 결과가 지속적으로 검토되고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을 짚어야 한다. 선행을 강제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단순히 동기의 순수성만이 아니다. 강제된 선행의 세계에서는 도덕적 감수성이 퇴화한다. 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의 논리가 도덕적 가치를 밀어내는 현상을 분석했다. 이스라엘의 어린이집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늦게 아이를 데려가는 부모에게 벌금을 부과하자 오히려 늦게 오는 부모의 수가 증가했다. 벌금이 도덕적 의무—"제시간에 아이를 데려가야 한다"—를 경제적 거래—"늦어도 돈을 내면 된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강제와 보상의 언어로 도덕을 표현하는 순간, 사람들은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멈춘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도덕적 근육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법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법이 금지하지 않은 것은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다. 법의 그물 밖에 있는 악은 무죄가 된다. 이것은 도덕의 최소화이지, 선의 실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이 물음에 쉬운 답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법으로 강제된 선행이 여전히 선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조건들이다.
첫째, 그 강제가 민주적 합의와 정당한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을 때다. 다수결만으로는 부족하다. 존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뒤에서, 즉 자신이 그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일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동의할 수 있는 규칙이어야 한다.
둘째, 강제의 목적이 개인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증진하되 그 과정에서 개인의 기본권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강제가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고, 외적 행위의 결과에 집중할 때다. 법은 "당신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위험에 처한 이웃을 외면할 수 없다"는 명령은 가능하다.
넷째, 그 강제가 도덕적 자율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자율성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굶주림과 극빈은 자유를 파괴한다. 기본적인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에게 자발적 선행을 기대하는 것은 공허하다.
이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강제된 선행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완전한 도덕적 행위는 아닐지라도, 사회적·결과적 의미에서 충분히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칸트 자신도 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칸트는 사회 계약과 공화주의적 법치를 지지했다. 그는 법적 의무가 도덕적 의무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법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외적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선한 사회 구조가 선한 개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구조를 만드는 강제는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법이 선행을 강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법이 선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법이 규정하는 외적 행위의 영역을 넘어, 내면에서 스스로 선을 택하는 능력을 가질 때 비로소 완전한 의미의 도덕적 존재가 된다. 법은 최소한의 선을 보장하는 울타리이지, 선의 완성이 아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가르치지 말고, 사랑하는 법을 살아라." 법은 행위를 강제할 수 있지만, 사랑을 가르칠 수 없다. 법이 사라진 자리에도 남아 있는 것, 누가 보지 않아도 선을 택하는 것, 그것이 도덕의 가장 깊은 지층이다. 니체는 도덕을 강제와 공포의 산물로 보며 경멸했지만, 그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한 가지 종류의 도덕, 즉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만을 보았다. 내면에서 자라나는 도덕,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선은 그의 비판 바깥에 있다.
그렇다면 이 에세이를 처음부터 읽어온 당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오늘 좋은 일을 했는가? 아니, 더 정확히 묻자. 당신은 오늘 누군가를 도왔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왜 그랬는가?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나중에 비슷한 도움을 돌려받기를 기대해서? 아니면 단지 그것이 옳다고 느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솔직히 말하면 복합적인 이유로 선을 행한다. 두려움과 기대와 공감과 습관이 뒤섞인 채로. 우리의 동기는 칸트가 요구하는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가 선이 아닌 것은 아니다. 도덕의 세계는 칸트가 그린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쩌면 훨씬 인간적이다.
결국 우리가 이 질문에서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강제된 선행이 선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회, 어떤 종류의 인간을 원하는가?" 법적 강제 없이도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원한다면, 우리는 법보다 먼저 문화를, 제도보다 먼저 교육을, 강제보다 먼저 공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문화와 교육과 공감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법이 있다. 강제된 선행은 선을 위한 비계(飛階)일 수 있다. 건물을 올릴 때 비계가 없이는 높은 층에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비계 자체가 건물은 아니다. 공사가 끝나면 비계는 철거되고, 건물은 스스로 서야 한다. 우리가 짓고자 하는 것은 법이 없어도 선을 택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그 건물 자체여야 한다. 다만 우리는 아직 공사 중이다. 그리고 공사 중인 동안, 비계는 필요하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강에 빠진 사람을 구한 프랑스인의 행위는 선인가? 법적 의무가 있었더라도, 그가 두려움이 아닌 진심으로 손을 내밀었다면, 그것은 선이다. 법이 그를 그 자리로 데려갔을지 몰라도, 손을 뻗은 것은 결국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손이 익사자의 손을 잡은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타인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법이 그를 선의 입구 앞으로 데려갔고, 그는 스스로 그 문을 열었다. 선행의 강요는 선행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 기회를 진정한 선으로 채우는 것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몫이다. 법은 우리를 선의 문 앞에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