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정복과 파괴의 신화

by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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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종 괴물과 영웅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인물을 낳는다. 티무르(Timur, 1336~1405)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도, 그가 남긴 해골 탑과 불탄 도시의 기억은 중동과 남아시아 전역에 여전히 생생하다. 역사학자 베아트리스 포르브스 맨즈(Beatrice Forbes Manz)는 그의 기념비적 연구 『티무르의 흥기와 통치(The Rise and Rule of Tamerlane)』(1989)에서 티무르를 "자신이 파괴한 세계와 자신이 건설한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인물"로 규정했다. 이 한 문장은 티무르 연구의 핵심 긴장을 압축한다. 그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도덕적 판결을 내리려는 욕구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역사에서 만나는 가장 복잡한 인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를 다룬 학문의 역사 자체도 흥미롭다. 유럽에서 티무르는 오랫동안 크리스토퍼 말로의 희곡 『탬벌레인 대왕(Tamburlaine the Great)』(1587)이 만들어낸 이미지, 즉 압도적 의지의 화신으로 낭만화되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를 "문명 파괴의 도구"로 혹독하게 단죄했다. 반면 19세기 오리엔탈리즘 시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를 문명의 전파자로 미화했다. 이처럼 티무르에 대한 역사 서술은 항상 서술자의 시대와 입장을 반영해왔다. 21세기의 역사학은 이 모든 편향을 걷어내고 당대 사료들, 즉 페르시아어로 쓰인 궁정 연대기, 아랍어 역사서, 중국 외교 기록, 유럽 여행기들을 교차 검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결과 드러난 티무르의 모습은 낭만도 단죄도 아닌, 훨씬 더 불편하고 훨씬 더 매혹적인 무언가다.


1336년,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샤흐리사브즈 근교 케시 지역에서 티무르는 바를라스 부족의 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날짜 자체도 논쟁의 대상이다.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l-Din Ali Yazdi)가 쓴 공식 전기 『자파르나마(Zafarnama, 승리의 서)』(1424)는 1336년을 제시하지만, 니잠 앗딘 샤미(Nizam al-Din Shami)의 초기 버전 『자파르나마』를 포함한 일부 사료는 출생 연도에 대해 일치하지 않는다. 맨즈는 이 불일치가 단순한 기록 오류가 아니라 궁정 역사가들이 티무르의 생년을 상서로운 점성술적 날짜에 맞추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지적한다. 영웅의 탄생은 처음부터 신화화의 과정에 놓였던 것이다.


바를라스 부족은 몽골계였지만 이미 수 세대 전부터 투르크화되고 이슬람화된 집단이었다. 훗날 그는 스스로를 칭기즈 칸의 후계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 그의 혈통은 칭기즈 가문과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몽골 제국의 유산인 이른바 '칭기스 원칙(Chinggisid principle)'에 따르면, 진정한 칭기즈 후손만이 '칸'의 칭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로런 데빗(Reuven Amitai)과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을 비롯한 학자들은 이 합법성의 문제가 티무르의 통치 전략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딜레마였다고 분석한다. 티무르는 평생 공식적으로는 '아미르(Amir)', 즉 총사령관의 칭호를 사용했고, 칭기즈 후손 출신의 꼭두각시 칸을 옆에 두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 구조를 유지했다. 나아가 그는 칭기즈 가문의 후손인 사라이 물크 하눔과 결혼하여 스스로를 '구르간(Güregen)', 즉 '칸의 사위'로 칭했다. 이 교묘한 정치적 장치들은 그의 지적 날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젊은 시절 티무르는 험난한 시련을 겪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혼란한 권력 투쟁 속에서 여러 부족과의 전투를 거치며 성장했다. 1941년 소련의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Mikhail Gerasimov)가 그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티무르의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에 심각한 부상 흔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오른 다리는 뼈가 불완전하게 아문 채로 굳어 있어, 그가 평생 뚜렷한 절름발이였음이 법의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티무르-이-랑(Timur-i-lang)'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유럽에서 '타메를란(Tamerlane)'으로 변형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별명은 적들이 붙인 조롱이었지만, 그는 끝내 이를 극복하고 역사상 가장 두려운 이름 중 하나로 만들었다. 역사학자 저스틴 마로직(Justin Marozzi)은 그의 저서 『타메를란: 이슬람의 검, 세계의 정복자(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2004)에서, 이 신체적 결함이 티무르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심리적 동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육체적 불완전함은 그에게 약점이 아니라 연료였다.


1370년, 수십 년의 분쟁과 연합, 배신과 재기를 거쳐 티무르는 마침내 트란스옥시아나(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 사이 지역, 아랍어로 '마 와라 안나흐르')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당시 중앙아시아의 권력 지형을 알아야 한다. 차가타이 칸국은 이미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각 지역 실력자들은 저마다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다. 티무르는 초기에 강력한 아미르 후사인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결정적 순간에 후사인을 제거하고 단독 패권을 잡았다. 맨즈는 이 배신을 티무르의 권력 장악 방식의 전형으로 지목하며, 그가 충성심보다 실용성을 일관되게 우선시했다고 분석한다. 도덕적으로는 냉혹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35년간 멈추지 않는 정복 전쟁을 벌였다. 페르시아, 이라크, 코카서스, 킵차크 초원, 인도, 시리아, 아나톨리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는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역사가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는 방대한 저서 『스텝의 제국(The Empire of the Steppes)』(1939, 영역본 1970)에서 티무르의 정복 범위를 14세기 말 구세계의 심장부 전체를 아우른 것으로 평가하며, "알렉산더 이후 어떤 정복자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광대한 영토를 유린하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이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그는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안에서 동쪽으로는 인도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볼가 강 유역에서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지역을 단 한 세대 안에 휩쓸었다.


티무르의 군사적 천재성은 여러 동시대인과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몽골의 기동력에 정주 문명의 공성 기술을 결합했다. 필요에 따라 유목 기병대처럼 움직이다가도, 요새화된 도시 앞에서는 체계적인 포위전을 펼쳤다. 군사사가 존 키건(John Keegan)은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Warfare)』(1993)에서 티무르의 군사 체계가 동서 전쟁 기술의 가장 성공적인 융합 사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전투 대형의 유연성을 높이 샀다. 티무르의 군대는 전통적인 몽골식 분대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보병과 기병의 조합, 그리고 초기적 형태의 포병까지 통합하는 복합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순수한 전술적 능력보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심리전이었다. 티무르는 공포를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항복하는 도시에는 관대함을 베풀고, 저항하는 도시에는 가차 없는 보복을 가했다. 이 이분법은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사파르나마를 비롯한 당대 연대기들은 도시마다 그 운명이 어떻게 갈렸는지를 상세히 기록한다. 이스파한은 1387년 처음 항복했지만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 티무르의 반응은 냉혹했다. 역사가들은 이때 학살된 이스파한 시민의 수를 7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로 추산하며, 그들의 해골로 쌓은 탑은 이 도시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모건은 『몽골인들(The Mongols)』(1986)에서 이러한 '해골 탑(towers of skulls)'이 단순한 잔혹함의 표현이 아니라 의도적인 경고 메시지였다고 분석한다. 다음 도시가 그 탑을 보고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들기 위한 전략적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불편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공포를 계량화하고 전략화한 사람, 그것이 티무르의 본질 중 하나였다.


또한 티무르는 정보 수집과 첩보에 극도로 능했다. 그는 원정에 앞서 반드시 해당 지역의 지형, 정치 구조, 지도층 내부의 갈등을 파악하는 사전 정보 작업을 수행했다. 이란 역사가 압바스 이크발 아쉬티야니의 연구와, 이를 발전시킨 현대 역사가 샤힌 바스타니(Shaheen Bastani)의 분석에 따르면, 티무르는 상인, 수피 성인, 종교 학자들의 네트워크를 정보 수집 채널로 적극 활용했다. 그는 적의 땅을 발 한 번 딛기 전에 이미 그 땅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1398년의 인도 원정은 그 잔혹함과 동기 모두에서 깊이 분석할 가치가 있다. 델리 술탄국의 술탄 나시르 앗딘 마흐무드 투글루크는 명목상의 지배자에 불과했고, 실권은 분열된 아미르들에게 나뉘어 있었다. 티무르는 이 내부 균열을 정확히 파악하고 침공을 결행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흥미롭다. 이슬람 술탄들이 힌두교도들에게 너무 관대하다는 것, 즉 불충분한 이슬람 통치를 교정하겠다는 종교적 명분이었다. 그러나 당대 사료들, 특히 티무르 궁정 역사가 샤라프 앗딘 야즈디의 『자파르나마』는 원정의 주된 목적이 인도 아대륙의 막대한 부를 획득하는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델리로 진격하던 중 티무르는 수만 명에 달하는 힌두 포로들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의 장군들은 이 포로들이 전투 중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티무르의 결정은 학살이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피리슈타(Muhammad Qasim Hindu Shah Firishta)가 17세기에 편찬한 역사서 『굴샨-이-이브라힘(Gulshan-i-Ibrahim)』은 이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역사학자 헤르만 쿨케(Hermann Kulke)와 디트마르 로터문트(Dietmar Rothermund)는 공저 『인도의 역사(A History of India)』(1986)에서 이 사건을 "중세 인도 역사에서 가장 체계적인 대량 학살 중 하나"로 규정했다. 전투 이전에 이루어진 포로 학살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군사적 논리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델리는 그 후 오랜 폐허로 남았다. 이슬람 역사가 이반 바투타의 관찰을 계승한 당대 기록들은 티무르의 원정 이후 델리 일대가 수십 년간 제대로 된 행정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음을 전한다. 역사학자 피터 잭슨(Peter Jackson)은 『델리 술탄국(The Delhi Sultanate)』(1999)에서 티무르의 침공이 투글루크 왕조에게 치명적이었으며 이후 사이이드 왕조의 취약한 성립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진공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문명은 칼날 앞에서 이토록 쉽게 무너진다.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평원에서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번개(Yıldırım)'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전사였다. 그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유럽 연합 십자군을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7년째 포위하고 있었다. 당시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그는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데 동쪽에서 그보다 더 강한 폭풍이 밀려왔다.


역사학자 도널드 니콜(Donald Nicol)은 『비잔티움의 마지막 세기들(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1972)에서 앙카라 전투를 비잔틴 제국의 수명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외부 요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전투 자체의 상세한 분석은 존 맨(John Man)의 『타메를란(Tamerlane)』(2007)과 같은 연구에서 더 충실하게 다루어진다. 티무르는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의 내부 분열을 정교하게 활용했다. 바예지드의 군대에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투르크 공국 군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티무르는 이들 중 상당수를 사전에 회유하거나 그들이 바예지드에게 품은 원한을 자극해두었다. 전투 중반 이들이 이탈하자 오스만 군대는 붕괴했다. 바예지드는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은 '공위 시대(İnterregnum, 1402~1413)'라 불리는 내전 상태에 빠졌다. 비잔틴 제국은 이 혼란의 반사이익으로 50년이라는 추가 수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야 오스만의 손에 떨어졌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보다 선명할 수 없다. 이슬람 세계 최강의 정복자가 기독교 제국의 마지막 보루를 구해준 셈이었다. 한편 바예지드의 처우에 관한 유럽의 전설적 묘사, 즉 티무르가 그를 우리에 가두어 발판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정리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당대 유럽인들이 동방의 야만성을 과장하여 전파한 허구이며, 실제로 바예지드는 포로 신분이었지만 상당한 예우를 받았고 약 8개월 후 사망했다. 역사의 진실은 전설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러나 티무르를 단순한 파괴자로만 읽는 것은 역사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정복지에서 약탈한 부와 인재를 수도 사마르칸트로 쏟아부었다. 장인, 건축가, 학자, 시인들을 전쟁터에서 살려두어 사마르칸트로 데려왔다. 이 행위 자체가 이미 모순을 품고 있다. 그는 도시를 불태우면서 그 도시를 만든 사람들을 살려두었다. 파괴와 창조가 같은 손에서 나왔다.


이슬람 예술사가 올레그 그라바르(Oleg Grabar)와 셰일라 블레어(Sheila Blair)의 연구들은 티무르 시대 건축의 특수한 위치를 분명히 한다. 블레어와 블룸(Jonathan Bloom)의 공저 『이슬람 예술과 건축(The Grove Encyclopedia of Islamic Art and Architecture)』은 티무르 시대의 건축을 이슬람 건축 역사에서 하나의 정점으로 평가하며, 특히 청색과 청록색 타일을 이용한 거대한 돔 양식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이롭게 바라보는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 구리아미르 영묘, 샤히진다 영묘군, 비비하눔 모스크는 모두 이 약탈된 문명의 결정체다. 특히 비비하눔 모스크는 당시 이슬람 세계 최대의 모스크를 목표로 건설되었다. 건설 과정에서 95마리의 코끼리가 돌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인도에서 약탈한 코끼리들이 인도 포로들과 함께 이 위대한 건물을 짓는 데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그 아름다움에 쓴맛을 더한다.


또한 그는 체스를 즐겼으며 천문학과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자신의 통치 원칙을 담은 것으로 알려진 『투주카트-이-티무리(Tuzukat-i-Timuri)』는 근대 학자들 사이에서 진위 논쟁이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빈센트 스미스(Vincent Smith)와 인도의 학자 아지즈 아흐마드(Aziz Ahmad)는 이 문서가 후대, 아마도 무굴 시대에 티무르의 권위를 빌려 작성된 위작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진짜라면 국가 통치와 군사 전략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 후대 사람들이 티무르의 이름으로 이런 문서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권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티무르가 단순한 정복 본능을 넘어 복잡한 지정학적 계산을 했다는 증거들이다. 1400년대 초 그는 카스티야, 프랑스, 영국의 왕들과 외교 서한을 교환했다. 1403년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가 보낸 사절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는 사마르칸트를 직접 방문하고 『카스티야 왕의 사절로서 티무르 궁정에의 여행기(Embassy to Tamerlane)』라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문헌은 현재 티무르 시대 사마르칸트의 실상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외부 자료 중 하나로, 역사학자 가이 르 스트레인지(Guy Le Strange)의 영역본(1928)을 통해 서양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클라비호의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의 궁정은 화려하고 정교했으며, 그는 오스만 제국이라는 공동의 잠재적 적에 대항한 동서 연합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것이 구상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슬람 군주가 기독교 왕국들에 동맹을 제안했다는 것은, 그의 의사 결정이 종교적 정체성보다 지정학적 이익에 의해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를 진영과 이념의 충돌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배치로 읽었다. 이 냉정한 현실주의는 6세기 후 마키아벨리가 체계화할 논리를 그가 이미 몸으로 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동쪽으로는 명나라와도 지속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명의 영락제와 교환한 서신들은 중국 측 사료인 『명실록(明實錄)』에 보존되어 있으며, 역사학자 에드워드 드레이어(Edward Dreyer)와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의 연구들은 이 동서 관계가 표면적 우호 이면에 팽팽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티무르가 명나라 원정을 준비하며 명에 보낸 마지막 서한의 어조는 외교적 언어를 가장한 위협으로 해석된다. 그는 체스판의 모든 칸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티무르의 종교적 정체성은 또 하나의 복잡한 층을 형성한다. 그는 분명 무슬림이었고, 자신의 전쟁을 종종 지하드로 포장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심하게 선택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는 시아파 이슬람 성지를 공격했고, 수니파 이슬람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모순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역사학자 사미라 콜레프(Samira Koltaev)와 특히 이라 라피두스(Ira Lapidus)는 방대한 저서 『이슬람 사회의 역사(A History of Islamic Societies)』(1988, 2002 개정판)에서 티무르의 종교성을 "도구화된 이슬람(instrumentalized Islam)"으로 분석한다. 그에게 이슬람은 진심으로 믿는 신앙이었지만, 동시에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이기도 했다. 이 두 차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신앙이 종종 그렇듯, 두 차원은 하나의 의식 속에서 구분 없이 뒤섞인다.


그럼에도 그는 수피 성인들을 깊이 존경했으며, 특히 낙슈반디야(Naqshbandiyya) 수피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역사학자 드무트 그린(Devin DeWeese)의 연구는 중앙아시아 이슬람화 과정에서 수피 교단이 어떻게 군사-정치 권력과 공생했는지를 보여준다. 티무르는 수피 성인들의 영적 권위를 자신의 세속적 권위와 결합함으로써 더 완전한 형태의 정당성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사마르칸트 근교의 수피 성지들을 보수하고 확장했으며, 유명한 수피 학자들을 궁정에 초빙했다. 이것이 순수한 신앙의 표현인지, 계산된 정치적 투자인지를 가르는 선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1405년, 티무르는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마지막 대원정을 준비하던 중 현재 카자흐스탄의 오트라르에서 사망했다. 공식적 사인은 폐렴 또는 독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과음에 의한 신체 약화가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의 나이 예순여덟이었다.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는 명나라 원정이 실현되었다면 티무르가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나 그 꿈은 오트라르의 혹한 속에서 끝났다.


그의 죽음 이후 티무르 제국은 그의 예상대로 빠르게 분열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 즉 티무리드 왕조(Timurid dynasty)는 15세기 내내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에서 놀라운 문화적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오늘날 '티무리드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이슬람 예술과 학문의 황금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역사학자 리사 골롬벡(Lisa Golombek)과 도널드 윌버(Donald Wilber)의 공저 『티무리드 건축(The Timurid Architecture of Iran and Turan)』(1988)은 이 시기 건축의 예술적 성취를 상세히 분석하며, 헤라트를 중심으로 꽃핀 세밀화와 사본 예술이 훗날 페르시아-인도 예술 전통 전체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다.


특히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는 사마르칸트에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대를 건설하고 『울루그 베그 성표(Zij-i Sultani)』를 편찬했다. 이 별 목록은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가장 정확한 천체 관측 기록으로 평가받으며 유럽 천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괴자의 손자가 인류의 과학 지식을 진보시킨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그냥 넘기기 어렵다.


그리고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Babur, 1483~1530)는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그 왕조는 17세기에 타지마할을 지었다. 티무르가 한 세기 반 전에 폐허로 만들었던 델리 인근에서, 그의 피를 이은 후손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를 남긴 것이다. 파괴와 창조가 혈통을 통해 이렇게 이어진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때로 시학에 가깝다.


티무르의 유골은 그가 직접 건설한 사마르칸트의 구리아미르 영묘에 안치되어 있다. 이 영묘는 원래 그의 사랑하는 손자 무함마드 술탄을 위해 건설되었으나, 티무르 본인의 죽음으로 그의 영묘가 되었다. 역사의 계획은 언제나 원래의 의도를 비껴간다.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저명한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이끄는 발굴팀이 무덤을 열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무덤 위에 새겨진 저주를 읽은 자는 나보다 더 무서운 침략자를 세상에 불러들일 것이다"라는 경고가 전해졌다. 게라시모프의 팀은 이를 미신으로 일축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였다.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1942년 11월, 스탈린은 유골을 이슬람 전통에 따라 정중히 재안장하도록 명령했다. 그 직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결정적인 반전을 이루었다. 이 연속의 우연은 신화로 굳어졌고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물론 역사는 이러한 단선적 인과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6세기가 지난 뒤에도 하필 티무르여야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게라시모프는 법의학적 두개골 복원을 통해 티무르의 생전 얼굴을 재현했다. 그의 복원 작업이 담긴 연구 『얼굴의 복원(The Face Finder)』(1971)은 법의학적 인류학의 고전 텍스트가 되었다. 복원된 얼굴은 강하고 비대칭적인 몽골-투르크 계통의 특징을 보여준다. 역사의 괴물이 이렇게 구체적인 얼굴을 얻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은 티무르를 국가적 정체성의 중심에 놓는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의도적으로 티무르를 새로운 국가 서사의 핵심 인물로 격상시켰다. 타슈켄트 한복판에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고, 화폐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이 상징적 선택은 소련식 집단주의 역사관을 걷어내고 새로운 민족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역사학자 아디브 칼리드(Adeeb Khalid)는 『이슬람 이후 중앙아시아(Islam after Communism)』(2007)에서 이 '티무르화(Timuridization)' 과정이 어떻게 선택적 역사 기억을 통해 현대 국가 정체성을 구성했는지를 분석했다.


그러나 인도와 이란, 시리아에서 티무르는 여전히 파괴의 상징이다. 이란의 역사 교과서들은 그를 페르시아 문명의 파괴자로 기술하고, 시리아 다마스쿠스 시민들의 집단 기억에는 1401년의 약탈이 상처로 남아 있다. 같은 역사적 인물이 어떤 이에게는 영웅이고 다른 이에게는 악마인 이 간극은, 영국의 역사 이론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전통의 발명(The Invention of Tradition)』(1983)에서 제시한 논의와 맞닿는다. 역사적 인물은 종종 후대에 의해 다시 발명된다. 티무르는 그 과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다.


이 모순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아마도 해소되지 않는다. 역사학자 맨즈는 그의 책 결론부에서 이렇게 쓴다. "티무르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역사가의 임무가 아니다. 역사가의 임무는 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말은 냉정하게 들리지만 심오하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해 없이는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결국 티무르를 이해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은 그를 하나의 완결된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야망이 있었고, 잔인했으며, 총명했고, 예술을 사랑했다. 수백만 명을 죽였고, 동시에 수천 명의 예술가와 학자를 살렸다. 그의 손으로 파괴된 도시들의 잿더미 위에서 사마르칸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빛났다. 그의 침공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그의 후손들이 타지마할을 지었다. 이 모순들은 단순히 역설로 포장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파괴했기 때문에 건설할 수 있었다. 그의 창조는 파괴의 결과물이었다.


인구통계학자 매튜 화이트(Matthew White)는 『대학살의 역사(Atrocitology)』(2011)에서 티무르를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집계한다. 그가 직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를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5%에 해당한다. 이 숫자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동시에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 사진을 보면 숨을 삼킨다. 같은 사람의 업적이다.


역사는 선인과 악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 역사는 티무르처럼, 두 얼굴이 하나의 몸에 붙어 있는 존재를 우리 앞에 내놓고 판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가장 정직한 대답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를 단죄할 수도 없고, 온전히 칭송할 수도 없다. 그를 영웅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수백만 희생자에 대한 모욕이고, 그를 단순한 악마로만 치부하는 것은 역사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외면하는 지적 게으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를, 그리고 그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잔인함 양쪽 모두를, 끝까지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 불편한 응시 속에서만, 우리는 티무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많은 것을 파괴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티무르의 역사 안에 씨앗처럼 박혀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8B%B0%EB%AC%B4%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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