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종종 승자의 기록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인물들은 승리와 패배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를 걸었던 자들이다. 토크타미쉬 칸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14세기 후반 유라시아 스텝을 무대로, 그는 칭기스칸의 후예라는 혈통적 정통성과 탁월한 군사적 감각을 바탕으로 킵차크 칸국(황금 오르다)을 통일하고 한때 모스크바를 불태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그가 이룬 영광 때문만이 아니라, 그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택한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이 결국 그를 어떻게 파멸시켰는가 하는 비극적 아이러니 때문이다. 그의 삶은 권력의 본질, 충성과 배신의 경계, 그리고 한 제국의 흥망이 어떻게 개인의 결단과 맞물려 작동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역사적 실험실이다.
토크타미쉬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발을 디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14세기의 유라시아 스텝은 단순한 광야가 아니었다. 그것은 칭기스칸이 구축한 몽골 제국의 유산이 분열되고 경합하는, 지극히 복잡한 정치적 공간이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중앙아시아사 연구자 토머스 올슨(Thomas Allsen)이 그의 저서 『몽골 제국과 세계사(Mongol Imperialism)』에서 지적했듯, 몽골 제국의 유산은 단일한 계승이 아니라 복수의 울루스(ulus, 분봉 왕국)들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과 협상 속에서 분기했다. 킵차크 칸국, 즉 주치 울루스는 그 분기된 조각들 중 서북방을 담당한 거대한 단위였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공국들,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카프카스 산맥, 동쪽으로는 티무르 제국의 팽창과 마주한 이 지정학적 공간에서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사방이 압력으로 가득 찬 용광로 안에 들어앉는 일이었다.
이 용광로의 열기는 1359년부터 더욱 격렬해졌다. 역사가들이 '대혼란(Великая замятня)'이라 부르는 이 시기에 킵차크 칸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의 중세사 연구자 찰스 핼퍼린(Charles Halperin)은 『러시아와 황금 오르다(Russia and the Golden Horde)』에서 이 기간 동안 칸국의 통일성이 구조적으로 해체되었다고 분석한다. 한편으로는 볼가 강 서쪽의 서부 오르다와 동쪽의 동부 오르다가 분리되어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마이와 같은 비(非)칭기스계 군벌이 칸을 허수아비로 내세우는 구조가 굳어졌다. 약 20년간 무려 25명에 달하는 칸이 즉위했다가 퇴위하거나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이 칸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얼마나 유동적인 자리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바로 이 혼돈의 한복판에 토크타미쉬가 등장했다.
토크타미쉬는 킵차크 칸국의 한 지류인 투카-티무르 가문 출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대략 1340년대에서 135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투이호자는 킵차크 칸국 동부의 지배자였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경쟁자에게 살해되었다. 고아이자 망명자의 신세로 전락한 토크타미쉬는 청년기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이란의 사파비 시대 역사서와 티무르 조정의 공식 연대기인 『자파르나마(Zafarnama)』를 저술한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Sharaf ad-Din Ali Yazdi)는 토크타미쉬가 처음 티무르의 궁정에 나타났을 때를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혈통만을 재산으로 삼은 젊은이"로 묘사했다. 이 혈통, 즉 칭기스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진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자산이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티무르(타메를란)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는 실제로는 바를라스 부족 출신의 투르크-몽골계 군벌로,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 칭기스칸의 후손 칸을 형식적으로 내세우는 '아미르(amīr, 총사령관)'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이슬람사 학자 베아트리스 포브스 만츠(Beatrice Forbes Manz)는 『티무르의 부상(The Rise and Rule of Tamerlane)』에서 이 정통성 문제가 티무르의 전 생애에 걸쳐 그를 따라다닌 구조적 제약이었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 때문에 티무르에게 칭기스계 혈통을 가진 꼭두각시 칸의 존재는 항상 필요했고, 토크타미쉬는 그 역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티무르는 그에게 병력을 지원하고 망명처를 제공했다. 이 후원은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다. 티무르에게 토크타미쉬는 북방의 경쟁자를 견제할 유용한 체스 말이었고, 토크타미쉬는 그것을 알면서도 기회를 포착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자를 역이용하는 이 냉정한 계산은, 토크타미쉬가 단순한 행운아가 아님을 보여 주는 첫 번째 증거였다.
1376년과 1377년 두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1378년 토크타미쉬는 킵차크 칸국 동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운명은 그에게 예기치 않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1380년 9월, 쿨리코보 벌판에서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마마이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러시아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몽골 지배로부터의 정신적 독립을 선언한 사건으로 신화화되어 왔다. 그러나 핼퍼린을 비롯한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해석에 강력히 의문을 제기한다. 쿨리코보는 몽골 지배 체제에 대한 전면적 반란이 아니라, 비정통 군벌 마마이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것이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자신도 정통 칭기스계 칸인 토크타미쉬에게는 별도의 복속 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미묘한 정치적 계산과 상관없이, 마마이는 쿨리코보의 패배로 군사적 위신을 잃었다. 같은 해 토크타미쉬는 칼카 강 전투에서 마마이의 잔존 세력을 격파했고, 마마이는 크림 반도의 제노바 식민지 카파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토크타미쉬는 단숨에 킵차크 칸국 전체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었다.
마마이가 제거된 방식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마마이의 몰락은 그가 정통성 없는 찬탈자였기에 내부로부터 무너진 것이었다. 반면 토크타미쉬는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라는 '칸 정통성(qan legitimacy)'을 내세워 귀족과 군벌들의 자발적 귀순을 이끌어 냈다.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은 『몽골인(The Mongols)』에서 몽골 제국의 정치 문화에서 칭기스계 혈통이 단순한 상징적 요소가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 권위의 원천이었음을 강조한다. 토크타미쉬는 이 문화적 자본을 누구보다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그의 즉위는 단순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정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올바른 혈통이 혼돈을 종식시킨다는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대형 군사 행동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쿨리코보 전투 불과 2년 뒤인 1382년, 토크타미쉬는 대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에 나섰다. 이 원정의 준비 과정은 치밀했다. 그는 볼가 강을 건널 때 러시아 상인들과 외교 사절들을 함께 잡아두어 자신의 진군 소식이 모스크바에 미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차단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마마이를 격파했다는 것은 타타르의 지배가 끝났다는 신호로 러시아 공들에게 받아들여졌지만, 토크타미쉬는 그 환상을 철저히 깨부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군대를 소집할 시간도 없이 모스크바를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했고, 모스크바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시도했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성문을 열었다가 학살당했다. 도시는 불타고 주민 수천 명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러시아 연대기 『니콘 연대기(Nikon Chronicle)』는 이 사건을 "최악의 재앙"이라고 기록하며 시신을 치우는 데만 수일이 걸렸다고 전한다. 핼퍼린은 이 원정이 킵차크 칸국의 주권 회복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러시아 공국들에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토크타미쉬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점령하거나 합병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조공 관계를 재확인하고 러시아 공들의 복속을 다시금 각인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후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킵차크 칸국에 보냈고, 쿨리코보 전투의 영웅적 의미는 한동안 빛이 바랬다.
이 원정의 성공은 토크타미쉬에게 킵차크 칸국의 지배 복원 이상의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는 이제 서쪽의 러시아, 북서쪽의 리투아니아, 남쪽의 카프카스와 이란 국경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선 자가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는 것이다. 강력해진 토크타미쉬는 이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라드 1세,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 심지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교신하며 티무르를 견제하는 반(反)티무르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이집트 맘루크 궁정의 역사가 알-마크리지(al-Maqrizi)의 기록에는 토크타미쉬의 사절이 카이로에 도착하여 공동 작전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1385년에는 티무르의 세력권에 속했던 타브리즈를 기습하여 대규모 약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은인이자 후견인이었던 티무르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 선언이었다.
왜 토크타미쉬는 이토록 무모해 보이는 대결을 선택했는가? 만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킵차크 칸국의 지정학적 필요에서 찾는다. 티무르의 팽창은 킵차크 칸국의 남쪽 경계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었고, 방어적 선제공격만이 칸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토크타미쉬의 전략 사고를 지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이익과도 충돌이 있었다. 티무르의 팽창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 남쪽 경로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는 킵차크 칸국이 통제하던 북쪽 무역로(볼가 강 경유 루트)를 우회하거나 위협하는 것이었다. 상업적 이해관계와 안보 불안이 겹치면서, 충돌은 사실상 피하기 어려운 구조적 운명이었다. 다만 그 타이밍을 토크타미쉬가 선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티무르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냉혹한 현실주의자였으며, 배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티무르와 토크타미쉬의 전쟁은 1387년부터 1395년에 걸쳐 세 차례의 주요 충돌로 이루어졌다. 1387년의 1차 충돌에서 토크타미쉬는 티무르의 영토 깊숙이 침입했으나 결정적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물러났다. 1391년 콘두르차 강 전투에서 티무르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의 심장부로 쳐들어갔다. 이 전투의 규모는 경이로웠다. 야즈디의 『자파르나마』에 따르면 양측 합산 병력이 수십만에 달했다고 하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과장으로 보며 각각 수만 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콘두르차 전투에서 토크타미쉬는 패했으나 도주에 성공하여 세력을 재건했다. 이 복원력 자체가 그의 비범함을 보여 준다. 패배한 뒤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 그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니라 정치적 네트워크와 군사적 재건 능력을 갖춘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1395년 테렉 강 전투는 달랐다. 티무르는 이번에는 철저했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카프카스 산맥을 넘는 진군로를 개척하며 킵차크 칸국의 서부를 우회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투 당일, 티무르는 자신의 좌익과 우익을 앞으로 내세워 토크타미쉬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동시에, 예비 병력을 측면 포위 기동에 투입했다. 야즈디의 기록과 중세 아르메니아 역사가 토마 메츠오페치(Thomas Metsobeti)의 기술을 종합하면, 전투의 분기점은 토크타미쉬의 우익이 붕괴한 순간이었다. 킵차크 기병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중앙도 무너졌고, 토크타미쉬는 다시 한번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칸국의 주력 전투력 자체가 분쇄되었다.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칸국의 핵심 도시들인 사라이, 아스트라한, 아조프를 차례로 파괴했다.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볼가 강 무역로와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 파국적 패배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는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여 확인해 준다.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 알-자디드(새 사라이)는 현재 러시아 아스트라한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 14세기 중후반의 번성했던 도시층 위에 뚜렷한 화재와 파괴의 흔적이 나타나고 그 이후의 거주층은 급격히 얇아진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기록과 아랍 지리학자 이븐 바투타(Ibn Battuta)가 1330년대에 남긴 여행기를 종합하면, 당시 사라이는 인구 수십만의 번영하는 국제 교역 도시였다.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서, 도시 안에는 모스크, 교회,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관(商館), 각국 사절들의 숙소가 공존했다. 티무르의 원정 이후 이 도시들은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킵차크 칸국의 상업적 번영은 영구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패배 이후 토크타미쉬의 삶은 극적인 부침의 연속이었다.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Vytautas)에게 몸을 의탁했다.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쉬의 복위가 가져다 줄 전략적 이익에 주목했다. 킵차크 칸국의 북부 스텝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영향력 확대와, 동방 무역로에 대한 발언권 강화가 그 핵심이었다.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알프레다스 밤브라우스카스(Alfredas Bumblauskas)와 같은 연구자들은 이 동맹을 순수한 이타심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팽창주의의 논리로 분석한다. 1399년, 비타우타스는 토크타미쉬를 복위시킨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남진했다. 여기에는 리투아니아 귀족 기사단뿐 아니라 폴란드, 독일 기사단 출신 병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토크타미쉬의 잔존 기병들도 합류했다. 이 다국적 군대는 당대 유럽과 스텝 세계가 충돌하는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러나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리투아니아-토크타미쉬 연합군은 킵차크 칸국의 새로운 실권자 에디구(Edigü)에게 참패를 당했다. 에디구는 마마이와 유사한 비칭기스계 군벌이었지만, 지략과 군사적 능력에서 뛰어났다. 그는 토크타미쉬와의 전쟁에서 티무르의 후원을 등에 업고 킵차크 칸국의 새 강자로 부상했다. 보르스클라 전투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결과를 넘어 토크타미쉬의 역사적 퇴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은 다시는 킵차크 칸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는 역사적 선고와 다름없었다. 그는 이후 시베리아 지역을 전전하며 지역 세력과 연합하는 유랑의 삶을 이어갔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기록이 엇갈린다. 러시아 연대기는 1406년 또는 1407년 사이비르 부근에서 에디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하지만, 일부 사료는 티무르 제국의 군대에 의한 처형을 언급하기도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어김없이 관철되었다. 한때 제국의 통일자였던 그가 추적당하는 망명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스텝 정치의 잔혹한 법칙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제 토크타미쉬가 역사에 남긴 진정한 의미를 살펴볼 차례다. 그의 개인적 비극 너머에는 유라시아 역사 전체를 뒤흔든 구조적 결과들이 있다.
첫째, 그와 티무르의 전쟁은 킵차크 칸국을 회복 불가능하게 약화시켰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15세기 러시아 공국들이 몽골의 멍에를 벗어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1382년 모스크바를 불태우며 몽골의 지배를 재확인한 토크타미쉬가, 자신의 권력 야망으로 벌인 전쟁을 통해 결국 러시아 해방의 토대를 깔았다. 킵차크 칸국이 약화된 이후, 1480년 이반 3세(이반 대제)는 '우그라 강의 대치'를 통해 칸국에 대한 조공을 최종 거부했다. 러시아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페렌추크(Yaroslav Pelenski)는 이 과정에서 킵차크 칸국의 내부 분열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강조하며, 그 분열의 원초적 계기로 테렉 강 전투 이후의 구조적 붕괴를 지목한다.
둘째, 토크타미쉬의 패배는 중앙아시아 교역 지형을 영구히 바꾸었다. 볼가 강 경유의 북방 무역로가 무너지면서 동서 교역은 점차 오스만 제국이 통제하는 남방 경로나 해양 경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15세기 후반 아프리카 우회 항로를 개척한 역사적 동기 중 하나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육상 무역로의 통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토크타미쉬와 티무르의 전쟁이 가져온 교역로의 재편은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간접적으로 연결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이 연결고리는 긴 인과 사슬을 거치는 것이지만, 역사의 나비 효과는 종종 이렇게 멀리까지 뻗어 나간다.
셋째, 토크타미쉬의 등장과 몰락은 유목 제국의 정치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시간 대학교의 역사학자 데니스 사이너(Denis Sinor)는 유목 국가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강력한 후계자 문제'와 '분봉적 분산 권력 구조'를 꼽는다. 토크타미쉬가 킵차크 칸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통일은 제도적 기반 위에 선 것이 아니라 개인적 카리스마와 군사력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가 티무르에게 패하자 칸국은 다시 분열되었고, 에디구마저 사라진 뒤에는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등 복수의 소국으로 해체되었다. 이 해체의 씨앗은 이미 토크타미쉬의 시대에 뿌려져 있었다.
토크타미쉬의 역사적 위상을 가늠하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증인이 있다. 바로 이슬람 세계 최고의 역사 철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이다. 그는 1401년 티무르의 다마스쿠스 포위 당시 도시 함락을 막기 위한 협상단의 일원으로 티무르를 직접 만났고, 이 만남을 자신의 자서전 『타리프(al-Ta'rif)』에 상세히 기록했다. 이븐 할둔은 티무르가 대화 중 토크타미쉬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음을 전한다. 티무르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경탄했으며, 세 차례의 전쟁에서 매번 도주에 성공한 토크타미쉬의 생존 능력을 인상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 기록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븐 할둔이 단순한 역사 서술자가 아니라 그의 주저 『무카디마(Muqaddimah)』에서 집단적 연대('아사비야')를 바탕으로 한 국가 흥망 이론을 정립한 역사 사회학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토크타미쉬는 바로 이 이론의 살아 있는 사례였을 것이다. 강한 부족적 결속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 결속이 내부 분열과 외부 충격 앞에 무너지면서 몰락한 인물.
흔히 토크타미쉬의 대(對)티무르 도전을 배신이나 배은망덕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맥락을 단순화한 것이다. 스텝의 정치 문화에서 후견-피후견 관계는 결코 절대적 충성을 의미하지 않았다. 만츠가 지적하듯, 티무르 본인도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아미르 후세인을 결국 제거했다. 양측 모두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티무르 역시 처음부터 토크타미쉬를 순수한 동맹으로 여기지 않았다. 토크타미쉬는 자신이 충분히 강해졌다고 판단했을 때 독립을 선언한 것이고, 문제는 판단 자체가 아니라 그 판단의 시기와 상대의 강도를 제대로 재지 못한 데 있었다. 그는 티무르를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거나, 혹은 티무르를 견제할 충분한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 계산은 빗나갔다.
토크타미쉬의 군사 전략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기습과 기동을 중시했고, 1382년 모스크바 원정에서 보여 준 것처럼 정보 차단과 신속한 기동을 결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러나 티무르와의 대결에서는 이 전술적 우위가 작동하지 않았다. 티무르는 토크타미쉬보다 더 광대한 병참 네트워크와 더 다양한 병종 조합을 보유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기병 중심의 몽골-투르크 전통 위에 공성 기술과 보병 전술을 통합한 복합 전력이었다. 미국의 군사사 연구자 R. D. 맥체스니(R. D. McChesney)는 티무르의 전쟁 수행 능력이 동시대 어떤 군대도 따라오기 어려운 유연성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스텝 유목민의 기동력에 정주 문명의 화력과 공성 능력을 접목시킨 이 하이브리드 전력 앞에, 순수한 유목 기병 체제에 의존한 토크타미쉬의 군대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토크타미쉬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각각 다른 얼굴로 기억된다. 카자흐 역사학에서 그는 킵차크 칸국의 위대한 통일자, 스텝 제국의 마지막 영광으로 복권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소비에트 카자흐스탄의 국민 국가 건설 과정에서 토크타미쉬는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소환되었다. 카자흐스탄의 역사학자 카나트 우스세노프(Kanat Usseinov) 등은 그를 카자흐 초원 국가 정체성의 선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 러시아 역사학의 주류 서사에서 그는 오랫동안 모스크바를 불태운 침략자로 기억되어 왔으며,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영웅성을 가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그를 중앙아시아 왕권의 경쟁자이자 파괴자로 보는 시각이 상존한다.
이 상이한 기억은 그의 역사적 복잡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증거다.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인물, 보는 위치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침략자가 되기도 하는 인물, 그런 인물이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주역이다.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은 그들이 단순한 선악의 구도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크타미쉬는 분명히 그런 부류에 속한다.
토크타미쉬의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특질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집요함이다. 아버지를 잃고 유랑한 청년은 티무르의 후원을 발판으로 일어섰고, 두 차례의 실패 끝에 칸국을 통일했으며, 콘두르차에서 패하고도 다시 일어섰고, 테렉 강의 파국 이후에도 15년 가까이 복권을 도모했다. 이 집요함은 물론 권력욕과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정통 칭기스 혈통의 계승자라는 사명감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제국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집요한 자에게 반드시 보상을 주지 않는다. 토크타미쉬의 비극은 단지 패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패배가 그 자신뿐 아니라 킵차크 칸국 전체의 회복 불가능한 몰락을 함께 초래했다는 데 있다. 그가 더 신중했다면, 티무르와의 충돌을 10년 또는 20년 뒤로 미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칸국은 더 오래 존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가 내린 선택들은, 한 인간이 주어진 조건과 본능적 충동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 주는 실물 교재로 남아 있다.
불꽃처럼 타오른 그의 생애는 짧고 폭렬했다. 하지만 그 불꽃이 휩쓸고 간 자리는 유라시아의 역사 지형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킵차크 칸국의 마지막 통일자이자 그 칸국의 파국을 불러온 인물, 러시아를 굴복시키고도 그 씨앗을 자신도 모르게 해방의 토양에 뿌린 아이러니의 화신, 대항해시대의 먼 서막을 열었을지도 모를 교역로 파괴자, 이슬람 역사 철학의 거인 이븐 할둔이 주목한 흥망의 표본 — 토크타미쉬 칸은 그렇게 역사 속에 남아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먼 과거의 한 통치자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란 무엇이고 제국은 어떻게 무너지며 인간은 운명 앞에서 어떻게 싸우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D%81%AC%ED%83%80%EB%AF%B8%EC%8B%9C_%EC%B9%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