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이-권력의 그림자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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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종 승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패자의 이름을 지운다. 그러나 간혹 승자도 패자도 아닌, 그 경계 어딘가에서 시대를 뒤흔든 인물이 존재한다. 마마이(Mamai, ?–1380)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칭기즈 칸의 혈통을 잇지 못했음에도 킵차크 한국(Golden Horde, 주치 울루스)의 실질적 권력자로 군림했고, 수십 년 동안 유라시아 대초원의 운명을 손에 쥐었다. 그의 이름은 쿨리코보 전투의 패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마마이가 남긴 흔적은 러시아사, 몽골 제국의 해체사, 그리고 유목 제국의 정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깊은 자국이다. 인디애나 대학교의 중세 러시아사 전문가 찰스 J. 핼퍼린(Charles J. Halperin)은 자신의 권위 있는 연구서 『러시아와 킵차크 한국(Russia and the Golden Horde)』(1985)에서 마마이를 두고 "칭기시드 혈통이 없는 권력 찬탈자"라고 명확히 규정하면서도, 그가 킵차크 한국의 와해 과정에서 결정적 행위자였음을 강조한다. 이 에세이는 그 '찬탈자'의 삶과 시대를 들여다봄으로써, 역사가 승자의 언어로 덮어버린 더 복잡하고 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마마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등장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14세기 중반, 킵차크 한국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1346년부터 유라시아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이었다. 울리히 샤밀로글루(Uli Schamiloglu)의 학술 논문 「흑사병이 킵차크 한국에 미친 영향(The Impact of the Black Death on the Golden Horde)」(2017)은 이 시기 한국의 주요 도시들이 전염병으로 극심한 인구 감소를 겪었으며, 이것이 곧장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졌음을 논증한다. 당시 킵차크 한국의 번성한 도시 사라이(Sarai)는 인구 60만에 달하는 중세 최대 도시 중 하나였으나, 흑사병은 이 도시 문명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었다. 샤밀로글루는 14세기 중반 이후 한국의 도시화가 급격히 역전되고,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의 기반이던 세수 체계가 붕괴했음을 지적한다. 국가가 허약해질 때 권력은 중심에서 이탈해 변방의 군사 강자들에게 흘러든다. 마마이는 바로 이 진공 속에서 탄생했다.


마마이가 처음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361년 무렵이다. 당시 킵차크 한국은 '대혼란(Великая замятня, 벨리카야 자먀트냐)'이라 불리는 극심한 내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359년 베르디베크 칸이 암살된 이후, 약 20년 사이에 무려 20명이 넘는 칸이 교체되었다. 칸들은 즉위하자마자 음모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허약한 칸이 앉혀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연구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중세 키프차크 역사 전문 자료인 『대혼란(Great Troubles)』 관련 사료들에 따르면, 1362년 한국은 이미 세 개의 세력권 — 사라이의 켈디베크, 볼가불가리아의 불라트 테미르, 크림의 압둘라 — 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마마이는 이 중 크림을 근거지로 한 압둘라를 지지하며 급부상했고, 압둘라가 1370년 사망한 뒤에는 무함마드 볼라크를 허수아비 칸으로 옹립하며 서부 한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칸의 지위를 직접 차지할 수 없었다 — 칭기즈 칸의 남계 후손, 즉 '칭기시드(Chinggisid)'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철칙이 유목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베클레리베크(беклербег), 즉 최고 군사령관이자 행정 수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칸들을 연달아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 구조적 아이러니야말로 마마이를 단순한 반란자나 야심가와 구별 짓는 핵심이다. 핼퍼린은 자신의 연구에서 유목 정치 체계에서 '칭기시드 원칙(Chinggisid principle)'이 가지는 구속력을 강조한다. 이 원칙은 단순한 이념적 장식이 아니라, 유목 부족 집단의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정당성의 근거였다. 마마이는 이 원칙을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가 택한 길은 그 원칙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 자신이 세운 칸이 그 원칙의 상징이 되도록 하고, 실제 권력은 자신이 쥐는 방식으로. 이는 탁월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권력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정통성을 빌린 권력은 언제나 그 정통성을 가진 자의 출현으로 무너질 수 있다.


마마이의 근거지는 볼가강 서쪽, 흑해 북쪽 연안의 폰투스 초원 지대였다. 이 지역은 당시 제노바 상인들의 최대 무역 거점인 크림 반도와 직접 맞닿아 있었다. 제노바와 킵차크 한국의 관계는 1266년 제노바가 한국 칸으로부터 카파(Caffa, 현재의 페오도시야)에 교역 거점을 설치할 권리를 구매한 이래 장기간 지속되어온 복잡한 이해관계의 산물이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따르면 카파는 중세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 중 하나였으며, 인구가 최대 8만에 달하고 동방 무역로의 서쪽 종점으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핵심 허브였다.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카파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항구 중 하나"라고 기록했을 정도다. 이 항구를 통해 우크라이나 초원의 곡물, 킵차크 출신 노예, 모피, 소금,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온 비단과 향신료가 교환되었다.


국제 학술지 『국제 과학기술사회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에 실린 학술 논문 「제노바와 킵차크 한국 조약의 역사적 맥락」(빅토르 탈라흐 저, 2022)은 1374년부터 1375년 사이 카파의 대금출납 장부(Massaria) 기록을 분석하여, 마마이가 1374년 여름 또는 가을부터 크림 반도에 본거지를 두었음을 실증한다. 이 기록은 마마이가 카파의 교역세 징수 체계를 직접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 '주(主) 마마이의 재량에 따라 징수된 세금'이라는 라틴어 구절이 그것이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보호 제공과 세금 수취의 관계를 넘어, 마마이가 제노바 교역 네트워크의 구조 속에 깊숙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상업 네트워크의 가치를 이해했고, 이를 권력 유지의 핵심 물질적 기반으로 삼았다. 아조프(Azov)와 카파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통제는 마마이 세력의 경제적 생명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마이는 단순한 약탈 경제에 머물렀던 유목 지배자들과 달리, 중세 국제 교역 질서 속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한 인물이었다.


마마이 군대의 구성 역시 이 다층적 배경을 반영한다. 쿨리코보 전투에 관한 러시아 연대기들은 마마이의 군대 안에 '프랴기(fryagi)', 즉 제노바 용병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한다. 최근 학술 연구들은 이 용병들이 실제 전투에 직접 참가했는지, 아니면 마마이의 야전 사령부를 호위하는 역할에 그쳤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제노바 인들이 마마이의 군사 작전과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마마이의 군대에는 초원 유목 집단뿐 아니라 체르케스, 아르메니아, 알란 출신 용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역사가 마크 갤러티(Mark Galeotti)는 오스프리 출판사의 군사사 연구에서 지적한다. 이 군대는 순수한 몽골-타타르 군대가 아니라, 다민족 용병 집단과 종속 초원 세력들을 망라한 연합군이었다. 이 사실은 마마이 권력의 본질적 성격 — 이념이 아닌 이해관계로 결합된, 느슨하되 광범위한 연합 — 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마마이가 역사에서 가장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1370년대 모스크바 공국과의 일련의 충돌들, 그리고 1380년 9월 8일 쿨리코보 들판에서의 최후 결전을 통해서다. 이 대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마마이와 모스크바 사이의 관계가 1378년 보자강 전투(Battle of the Vozha River)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이 적대적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해 마마이는 무르자 베기치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드미트리 대공의 복종을 강제하려 했지만, 러시아 군대는 이를 격파했다. 이는 러시아 군대가 한국의 군사력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사건이었고, 마마이로서는 위신과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1380년의 쿨리코보 원정은 단순한 조공 독촉이 아니라, 이 손상된 패권을 회복하기 위한 전면전이었다. 마마이는 리투아니아 대공 야가일로(Jogaila)와 랴잔 공국의 올레그(Oleg of Ryazan)와 동맹을 맺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러시아 측 사료에 따르면 마마이가 동원할 수 있었던 총 병력은 상당했지만, 역사가 안드레이 아멜킨과 유리 셀레즈네프의 추산에 따르면 쿨리코보에 실제로 투입된 병력은 양측 모두 2만~3만 수준이었다 — 전통적인 민족주의 서사가 내세우는 수십만의 대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쿨리코보 전투의 실제 역사적 맥락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전투는 흔히 러시아의 '몽골 멍에' 탈출의 시작점으로 묘사되지만, 학술적 검토는 훨씬 복잡한 그림을 제시한다. 핼퍼린이 『쿨리코보 들판 전투의 역사와 역사적 기억』(2013)에서 명확히 지적했듯,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몽골 제국'이 아니라 마마이 개인의 군대였으며, 이 전투의 진정한 승자는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아니라 토크타미시(Tokhtamysh)였다. 역사가 고르스키(Gorsky)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마마이의 패배는 토크타미시가 킵차크 한국 전체를 통합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이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382년 토크타미시는 모스크바를 포위·함락하여 도시를 불태우고 드미트리를 다시 한번 납세 의무자로 만들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이 사실을 두고 "어떤 의미에서 토크타미시야말로 쿨리코보의 진정한 승자"라고 평가한다. 러시아의 '해방'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대우그라강 대치(Great Stand on the Ugra River)가 있었던 1480년까지 꼬박 10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쿨리코보를 둘러싼 사료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중요하다. 이 전투에 관한 러시아 측 1차 사료들 — 『자돈시치나(Zadonshchina)』, 『연대기 이야기(Chronicle Tale)』, 『마마이 전투 이야기(Skazanie o Mamaevom poboishche)』로 구성된 이른바 '쿨리코보 사이클(Kulikovo Cycle)' — 은 서로 상충하는 사실들을 담고 있으며, 종교적·민족주의적 목적에 의해 각색된 흔적이 역력하다. 예를 들어 가장 상세한 서술을 담고 있는 『마마이 전투 이야기』는 라도네즈의 세르기우스 성인(Sergius of Radonezh)이 드미트리에게 신성한 가호를 내렸다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 만남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핼퍼린은 이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모스크바 공국의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기획된 문학적 산물"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전투에서 드미트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조차 사료마다 다르다 — 어떤 버전에서 그는 말을 타고 선두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실신했고, 또 다른 버전에서는 부하와 갑옷을 바꿔 입고 나무 아래 숨었다가 전투 후에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마마이는 왜 쿨리코보에서 패배했는가? 이 질문에는 군사 전술적 분석을 넘어서는 답이 필요하다. 전술적 차원에서 보면, 드미트리는 블라디미르 세르푸홉스키(Vladimir Serpukhovsky)가 이끄는 기병 매복 부대를 숲속에 은닉해두었다가 마마이 군대의 좌측 날개가 러시아 전선을 압박하는 결정적 순간에 투입함으로써 전세를 뒤집었다. 마크 갤러티는 이 전투를 가리켜 "마마이가 더 나은 장군이었다면, 또는 드미트리가 덜 노련한 지휘관이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아슬아슬한 승부"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패인은 동맹의 붕괴에 있었다. 야가일로의 군대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 이는 단순한 행군 지연이 아니라 냉정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리투아니아 입장에서 마마이가 너무 강해지는 것도, 모스크바가 너무 강해지는 것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았다. 두 적을 서로 소진시키는 전략이 야가일로에게는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랴잔의 올레그 역시 명목상으로는 마마이 편이었지만, 그가 실제로 얼마나 성실하게 동맹 의무를 이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오히려 그가 드미트리에게 마마이의 이동 경로를 귀띔했다는 러시아 측 기록도 있다. 정통성을 결여한 권력은 연대를 구축하는 데도, 그 연대를 유지하는 데도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마마이를 둘러싼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그의 종교적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이다. 14세기 중반 킵차크 한국의 지배층 대부분은 1312년 우즈베크 칸이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한 이래 무슬림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마마이 역시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의 통치는 종교적 이념보다 실용적 권력 논리에 훨씬 더 충실했다. 그는 기독교 제노바 상인들과 협력했고, 이교도 리투아니아 대공과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자신의 군대 안에는 다양한 신앙 배경을 가진 병사들이 공존했다. 이 다층적이고 비이념적인 권력 행사 방식은 마마이를 단순한 이슬람 지하드 전사나 순수한 유목 약탈자로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이데올로기보다 앞서 정치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마이는 중세 세계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유형의 인물, 즉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실용주의적 권력 기술자에 가까웠다.


마마이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쿨리코보에서 패주한 마마이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재기를 도모했으나, 토크타미시의 군대가 동쪽에서 밀려왔다. 마마이의 군사들 상당수는 정통 칭기시드 혈통의 토크타미시가 나타나자 이탈해버렸다 — 이 장면이야말로 정통성 없는 권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마이는 카파로 도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제노바 상인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탈라흐의 연구에 따르면, 제노바 측의 카파 대금출납 기록은 마마이의 피살 시점이 1380년 11월 28일 이후, 늦어도 1381년 1월 23일 이전 사이임을 보여주며, 솔다이아 지구와 크림 고티아 지역이 토크타미시에 의해 제노바 측에 양도된 것은 마마이 살해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정황이 강하게 시사된다. 다시 말해, 제노바 상인들은 마마이를 살해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자 토크타미시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교역 특권을 확보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오랜 동반자가 짐이 된 순간,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를 처분했다. 이것이 이해관계로만 결합된 동맹의 본질이다.


마마이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산은 어쩌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그의 부상과 몰락은 킵차크 한국의 최종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연쇄를 촉발했다. 토크타미시는 마마이를 제거하고 한국을 일시 통합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내 자신의 후원자였던 티무르(Tamerlane)와 충돌했다. 1391년 티무르는 토크타미시의 군대를 괴멸시켰고, 1395년에는 사라이와 아조프를 완전히 파괴하여 한국의 핵심 도시 인프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뉴월드백과사전의 기술에 따르면, 티무르는 가장 유능한 장인들을 자신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이 킵차크 한국에 가해진 진정한 치명타였다. 마마이의 퇴장은 이 거대한 연쇄 붕괴의 첫 번째 고리였다.


역설적으로, 마마이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했던 러시아 제후들의 경험은 모스크바 중심의 통합 서사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쿨리코보 승리를 통해 타 러시아 제후들에 대한 모스크바의 우위를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를 얻었다. 핼퍼린의 초기 논문 「러시아의 땅과 러시아의 차르: 모스크바 이념의 형성, 1380-1408」은 쿨리코보 이후 20년간 모스크바 궁정이 이 승리를 어떻게 이념적으로 재구성했는지를 추적하면서, 그것이 즉각적인 군사적 의미보다 훨씬 큰 정치적 자본으로 축적되었음을 보여준다. 쿨리코보는 그 자체로 러시아를 해방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호자이며 구심점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마마이는 의도치 않게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했던 건국 신화를 선물한 셈이었다.


오늘날 마마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기억에서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러시아 역사 서술 전통에서 마마이는 극복되어야 할 야만과 타자의 표상이었다. 오스프리 출판사의 군사사 저술가 갤러티가 지적하듯, 오늘날 모스크바의 러시아―나의 역사(Россия―моя история) 파빌리온에 전시된 역사 서사는 쿨리코보를 "분열된 러시아가 단결하여 몽골의 힘을 꺾고 강력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순간"으로 단순화한다. 러시아 군사 프로파간다가 이 서사를 21세기에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마이의 패배가 현재진행형의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문화에서는 '마마이'라는 이름이 때로 자유로운 전사의 이미지로 민간 전승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 역사적 마마이와의 직접적 연결은 불분명하다. 이처럼 동일한 역사적 인물이 이웃한 두 민족의 기억 속에서 정반대의 의미로 재구성된다는 사실 자체가, 마마이가 지나간 패배자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적 쟁점임을 보여준다.


마마이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은 정통성 없는 권력이 걷는 필연적 경로를 보여주는 비극적 교훈처럼 읽힌다. 그는 탁월한 능력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리고 국제 정세를 읽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음에도, 끝내 '칸이 될 수 없는 자'라는 원초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칭기시드 혈통이라는 정통성의 결핍은 그가 아무리 많은 칸을 세우고 쓰러뜨려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이었다. 토크타미시가 나타났을 때 마마이의 군사들이 이탈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목 사회의 정치 논리에서 정통성은 단순한 상징적 명분이 아니라 복종의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근거였다. 핼퍼린이 강조하는 '칭기시드 원칙'은 중세 유라시아 정치에서 헌법과도 같은 효력을 지녔고, 그것을 우회하여 세운 권력은 언제나 그 원칙의 정당한 계승자가 등장하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질 운명이었다.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승자의 이야기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돈스코이(돈강의 영웅)'라는 이름을 얻었고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마마이는 패자로 기록되었고, 그의 이름은 '사나운 타타르 침략자'의 동의어로 민간에 남았다. 그러나 패자의 이야기를 읽지 않고는 승자의 이야기도 절반밖에 이해할 수 없다. 마마이의 삶은 권력의 본질, 정통성의 무게, 흑사병이 만들어낸 역사의 공백, 그리고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 태어나, 균열을 넓히다가, 마침내 그 균열에 삼켜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의 흔적은 지금도 중세 유라시아 역사의 지층 어딘가에,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현재적 긴장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7%88%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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