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돈스코이-미완의 대영웅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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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순간이 있고, 인물이 시대를 뒤바꾸는 순간이 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y Donskoy, 1350~1389)의 생애는 바로 후자에 속한다. 그는 열 살도 되지 않아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자리에 올랐고, 서른 살이 채 되기 전에 러시아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몽골을 물리친 전사"로 읽으면 이 인물의 본질을 절반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드미트리의 삶은 정치적 계산, 종교적 정당성, 군사적 용기, 그리고 운명의 아이러니가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다. 그 얽힘을 풀기 위해서는 14세기 유라시아 초원 지대의 권력 지형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


영국의 러시아 중세사가 존 펜넬(John Fennell)은 그의 저서 『중세 러시아의 위기, 1200~1304(The Crisis of Medieval Russia, 1200~1304)』에서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이 단순한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제도적 유연성과 교회 권력과의 공생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드미트리는 바로 그 공생 구조의 정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가 전임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 공생 구조를 도구로 삼아 전례 없는 선택을 했다는 데 있다.


1350년 10월 12일,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모스크바 대공 이반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알렉산드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이반 2세는 1359년 세상을 떠났다. 드미트리의 나이 불과 아홉 살이었다. 정치적 공백 속에서 이 어린 공자를 후견한 인물이 모스크바 대주교 알렉시우스(Alexius, 본명 엘레페리 표도로비치 비아콘토프)였다. 알렉시우스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는 황금 군단(Golden Horde)의 칸들과도 협상할 수 있는 노련한 외교가였으며, 심지어 칸의 아내 타이둘라의 눈병을 치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황금 군단 내부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지녔다.


미국의 역사가 재닛 마틴(Janet Martin)은 그의 저서 『중세 러시아, 980~1584(Medieval Russia, 980~1584)』에서 알렉시우스의 역할을 "교회와 세속 권력의 봉합자(broker between ecclesiastical and secular power)"로 규정한다. 알렉시우스는 야를리크(yarlyk), 즉 황금 군단의 대공 승인 칙령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의 경쟁자인 트베리(Tver) 공국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가 블라디미르 대공 칭호를 놓고 집요하게 다투었지만, 알렉시우스의 외교적 역량과 교회 제재 수단의 결합 앞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는 어린 시절부터 권력이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교회의 권위와 칸의 칙령이 맞물릴 때 완성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이것은 훗날 그가 세르기우스의 축복을 구하고, 야를리크를 전략적으로 다루는 방식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그러나 알렉시우스의 후견이 드미트리에게 준 것은 외교적 자산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커다란 심리적 과제이기도 했다. 러시아 중세사가 찰스 하칼레이(Charles Halperin)는 『러시아와 황금 군단(Russia and the Golden Horde)』에서 루시 공후들이 몽골 지배 하에서 발전시킨 독특한 이데올로기적 전략을 "침묵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silence)"라고 부른다. 즉 몽골의 지배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권위에 복종하는 이중적 태도가 루시의 공식 담론 안에 체계적으로 내재화되었다는 것이다. 드미트리는 이 이중성의 세계 안에서 성장했고, 훗날 그것을 깨뜨리는 자가 되었다.


드미트리가 성년에 접어들 무렵, 황금 군단은 겉으로는 여전히 강대했지만 속으로는 급속히 균열이 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이후 황금 군단 내부에서는 이른바 '대혼란(Velikaya Zamyatnya)'이라 불리는 내전 상태가 이어졌다. 1357년부터 1380년 사이 약 20명이 넘는 칸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이 혼란의 근본 원인을 영국의 몽골 제국사가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은 그의 저서 『몽골인들(The Mongols)』에서 정주 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한 지배층의 분열,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붕괴, 그리고 상업 네트워크의 교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1346~1353년 사이 유럽과 서아시아를 휩쓴 흑사병은 황금 군단의 핵심 교역 거점인 사라이(Sarai)와 크림 반도 항구 도시들을 황폐화시켰고, 이것이 군단의 재정 기반과 군사 동원 능력을 근본에서 뒤흔들었다.


이 혼란 속에서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 마마이(Mamai)였다. 마마이는 킵차크 씨족 출신의 유력 귀족, 즉 베클라리베크(beklaribek, 군사 최고사령관)로서 칭기즈칸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그의 권위에 결정적인 흠결이었다. 몽골 전통에서 칸 칭호는 오직 칭기즈칸의 후손인 황금씨족(Golden Kin)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마마이는 이 혈통적 결함을 우회하기 위해 허수아비 칸들을 내세우는 방식을 택했다. 마마이 치하에서 두 명 이상의 이름뿐인 칸이 공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혈통의 공백이 드미트리에게는 결정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찰스 하칼레이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한다. 마마이에 대한 저항은 칭기즈칸 가문 전체에 대한 반역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었다. 드미트리가 마마이에게 저항하면서 그 저항을 "황금 군단의 정통 질서를 어지럽히는 찬탈자에 맞서는 행위"로 프레임할 수 있었던 것은, 마마이의 이 구조적 약점 때문이었다. 후대의 러시아 연대기들이 마마이를 "사악한 이교도"뿐만 아니라 "정통이 아닌 찬탈자"로 묘사하는 것은 이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전쟁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야기로 구성된다. 드미트리는 그 이야기의 프레임을 선점하는 데 성공했다.


쿨리코보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드미트리가 어떻게 모스크바를 재건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1367년,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 최초의 석조 크렘린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모스크바의 요새는 목조였다. 흰 석회석(московский белый камень)으로 쌓아 올린 새 크렘린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스크바가 더 이상 임시적 권력의 거점이 아님을 선언하는 건축적 메시지였다.


러시아 건축사가 윌리엄 브럼필드(William Brumfield)는 그의 저서 『러시아 건축의 역사(A History of Russian Architecture)』에서 이 크렘린 건설을 "도시 정치 신학의 물질화(materialization of urban political theology)"라고 부른다. 트베리나 수즈달이 아닌 모스크바가 루시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선언이 돌과 흙으로 새겨졌다. 석조 크렘린의 존재는 실제 방어적 효과도 컸다. 1368년과 1372년, 리투아니아 대공 올게르트(Algirdas)가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를 공격했을 때 드미트리의 군대는 석조 성벽 안에서 버티며 도시를 방어할 수 있었다. 목조 요새였다면 불가능했을 저항이었다.


그러나 크렘린의 의미는 방어적 기능을 넘어선다. 재닛 마틴은 이 건설이 모스크바의 경쟁 공국들에게 보낸 심리적 신호였다고 지적한다. 영구적인 석조 건물은 왕조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목조 도시는 불태워질 수 있지만 돌로 된 도시는 다르다. 드미트리가 석조 크렘린을 완성한 1367년은 그가 불과 17세였던 해였다. 권력의 세습과 영속성에 대한 이 이른 집착은, 그가 훗날 칸의 야를리크 없이 아들에게 대공위를 넘기는 결정을 내릴 때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1378년 보자 강(Vozha River) 전투는 쿨리코보의 서막이자, 루시 역사에서 종종 그 중요성이 과소평가되는 사건이다. 마마이는 베기치(Begich)가 이끄는 군사를 파견해 모스크바를 압박하고자 했다. 드미트리는 이를 정면으로 맞받았다. 오카 강 지류인 보자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루시 군대는 몽골 계통의 군사력을 야전에서 처음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의 의미를 현대 역사학자들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으로 평가한다. 안톤 고르스키(Anton Gorsky)는 그의 저서 『모스크바와 황금 군단(Moskva i Orda)』에서 보자 강 전투가 드미트리 군대의 전술적 성숙을 보여준 시험대였다고 분석한다. 전통적으로 루시 군대는 몽골의 기병 전술 앞에서 개활지 야전을 기피하고 성벽 방어에 의존했다. 그러나 보자 강에서 드미트리는 지형을 활용한 측면 공격으로 적을 격파했다. 이것은 2년 뒤 쿨리코보에서 복병 연대를 핵심 전술로 사용하는 발상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이 승리의 의미를 과장하지 않았다. 그는 마마이가 반드시 더 큰 규모로 복수하러 올 것임을 알았다. 보자 강 직후 드미트리가 취한 행동들—동맹 공국들과의 외교 접촉 강화, 군대의 재편, 세르기우스의 수도원 방문 빈도 증가—은 그가 다음 충돌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가는 사후에 사건을 해석하지만, 위대한 지도자는 사전에 사건을 준비한다. 드미트리는 후자에 속했다.


1380년의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마이가 구성한 동맹의 성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마마이는 두 개의 핵심 동맹을 확보했다. 하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야기에우워(Jagiełło)였다. 14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포괄하는 거대한 정치체로, 동쪽으로 팽창하는 모스크바에게는 서방의 최대 위협이었다. 야기에우워와 마마이의 동맹은 따라서 모스크바를 동서 양면에서 압박하는 구조였다. 다른 하나는 랴잔(Ryazan) 공국의 올레크(Oleg)였다. 랴잔은 지리적으로 황금 군단과 모스크바 사이에 위치해 있어, 매번 몽골 침입의 최전선을 감당해야 했다. 올레크의 마마이 동조는 이 지정학적 절박함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드미트리의 대응 전략은 군사와 종교를 동시에 동원하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군사적으로 그는 트베리, 수즈달 등 경쟁 공국들을 설득하고 압박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정치사학자 로버트 크러미(Robert Crummey)는 그의 저서 『모스크바 공국의 형성(The Formation of Muscovy, 1304~1613)』에서 이 연합 형성을 "강압과 동의의 변증법(dialectic of coercion and consent)"으로 분석한다. 드미트리는 공통의 위협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참여를 거부하는 공국에는 모스크바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종교적 차원에서 드미트리가 수행한 가장 중요한 행동은 라도네시의 세르기우스(Sergius of Radonezh) 방문이었다. 세르기우스는 당시 살아 있는 가장 존경받는 정교 수도자로, 트로이체-세르기에바 수도원(Trinity-Sergius Lavra)을 창건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러시아 정교회 전문가 폴 콘타블(Paul Contable)과 여러 역사가들은 세르기우스가 단순히 축복을 내린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의 군사 행동에 명시적인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학적 선언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 동방 정교회는 몽골의 지배를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하는 신학적 틀 안에 갇혀 있었다. 세르기우스의 축복은 이 해석 틀의 균열이었다. 이제 저항이 반란이 아니라 신앙의 행위로 신학화된 것이다.


세르기우스가 드미트리에게 두 명의 수도사 전사—페레스베트(Peresvet)와 오슬랴뱌(Oslyabya)—를 동행시켰다는 연대기 기록 역시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이들은 전투 효율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위해 파견되었다. 수도복을 입은 전사의 이미지는 이 전쟁이 세속적 권력 다툼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싸움이라는 메시지를 군대 전체에 전달했다. 현대 역사가들 중 일부는 이 이야기 자체가 후대의 첨가일 수 있다고 보지만, 그 상징이 14세기 루시인들의 심성 세계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했는가는 이후 러시아 문학과 예술이 이 장면을 수없이 재현해온 사실이 증명한다.


9월 8일 새벽, 드미트리의 군대는 돈 강을 건넜다. 이 결정 자체가 전략적 도박이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의미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마마이와 야기에우워 사이의 합류 지점을 선점하는 기동이기도 했다. 군사사학자 브라이언 데이비스(Brian Davies)는 그의 저서 『러시아의 전쟁, 국가, 사회, 1460~1730(Warfare, State and Society in the Eastern Marchlands of Europe, 1500~1700)』에서 드미트리의 돈 강 도하를 "전략적 선제 기동(preemptive strategic maneuver)"으로 평가한다. 마마이의 군대가 야기에우워와 합류하기 전에 먼저 쿨리코보의 지형에서 전투를 강제함으로써, 드미트리는 삼면 협공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강을 건너는 결단은 무모함이 아니라 계산된 대담함이었다.


연대기들은 드미트리가 전투 직전 병사들에게 한 연설을 전한다. 그 내용은 여러 판본에서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지만 핵심은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물러날 강이 없다. 여기서 이기거나, 여기서 죽거나." 이 말이 실제로 발화된 것인지, 아니면 후대 연대기 편찬자들이 부여한 서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구전과 기록이 공유하는 이 이미지—퇴로를 끊은 지도자—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결단의 서사가 갖는 보편적 힘을 드러낸다. 역사는 때로 실제 사건만큼이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 의해 형성된다.


전투 당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전통적인 서술에 따르면, 안개 속에서 몽골 전사 첼루베이(Chelubey)와 수도사 페레스베트가 말을 달려 일기토를 펼쳤다. 두 사람 모두 창에 찔려 낙마했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19세기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Viktor Vasnetsov)의 그림으로 유명하게 시각화되었고, 러시아 집단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일기토 이야기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서사가 스텝 유목민 전통의 개막 결투 관습과 러시아 서사시(byliny)의 문학적 관습이 결합된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진위가 아니라 그 기능이다. 일기토 서사는 수만 명의 병사들이 전투에 임하는 집단적 정신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시킨다. 신앙의 수도사가 이교도의 전사와 맞서는 것—이 이미지가 전투 전날 밤 군영 전체에 퍼졌다면, 그것은 어떤 물리적 무기보다 강력한 전투력이었을 것이다.


전투의 향방은 오랫동안 불투명했다. 마마이의 군대는 러시아 중앙군을 강하게 압박했고, 한때 러시아 전선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는 기록도 있다. 드미트리 자신이 갑옷을 바꿔 입고 일반 병사로 위장한 채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도자로서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드미트리는 쓰러진 나무 아래에서 혼절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연대기 기록도 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러시아 군대가 숲속에 매복시켜 두었던 예비대, '복병 연대(Zasadny polk)'의 기습에서 왔다. 이 전술의 설계자로 전해지는 인물은 드미트리의 사촌 블라디미르 세르푸홉스코이(Vladimir of Serpukhov)와 그의 부지휘관 드미트리 볼린스키(Dmitry Bobrök-Volynsky)였다고 러시아 연대기는 전한다. 수 시간에 걸쳐 매복을 유지하다가 마마이의 군대가 러시아 중앙 전선에 완전히 몰입한 순간 측면을 기습하는 이 전술은, 당시 루시 군대의 전술적 세련도를 잘 보여준다. 안톤 고르스키는 이 전술의 실행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전장의 지형 선택 단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쿨리코보 벌판의 지형—한쪽이 숲으로 막힌 개활지—은 바로 이 매복 전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고, 드미트리는 그 지형을 전투지로 선택하면서 이미 결말의 일부를 설계해두었다.


마마이의 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패주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마마이는 전장을 탈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칭기즈칸의 정통 후예인 토크타미시에게 패배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우워는 러시아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투에 합류하지 않고 군대를 돌렸다. 삼면 협공의 기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쿨리코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극적인 과장이 있었다. 소련 시대의 역사 서술은 러시아의 민족 영웅 서사를 강화하기 위해 양측 합쳐 40만에서 50만 명이 싸웠다는 숫자를 유통시켰다. 이 수치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14세기의 농업 생산력과 병참 능력으로 그 규모의 군대를 하나의 전장에 집결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숫자를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안톤 고르스키는 그의 상세한 연구에서 러시아 측 병력을 5만에서 최대 10만 명 수준으로, 마마이 측도 비슷하거나 더 적은 규모로 추정한다. 독일의 러시아 중세사가 하인츠-디트리히 뢰벨(Heinz-Dietrich Löwe)을 비롯한 학자들도 유사한 수정론을 지지한다. 2006년 이후 수행된 고고학적 발굴 조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쿨리코보 전투지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골의 수량은 수십만 명이 싸웠다는 가정과 양립하기 어렵다. 대규모 전투 후에는 특정 패턴의 무기류와 유골 분포가 나타나야 하는데,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는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이 역사학적 수정이 쿨리코보의 의미를 약화시키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수십만 명의 대군이 충돌한 서사보다, 실제 가용 병력의 한계 안에서 지형과 전술과 동맹을 최대한 활용해 더 강한 적을 이긴 이야기가 더 인간적이고 더 설득력 있다. 쿨리코보의 진정한 위대함은 숫자의 규모가 아니라 결단의 질에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쿨리코보 직후부터 시작된다. 1382년, 황금 군단의 새 칸 토크타미시(Tokhtamysh)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다. 토크타미시는 마마이를 제거하고 황금 군단을 재통일한 인물로, 칭기즈칸의 정통 혈통을 지닌 칸이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드미트리가 마마이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논리—"마마이는 찬탈자"—는 토크타미시에게는 적용될 수 없었다. 정통 칸에 대한 저항은 훨씬 복잡한 정치적·신학적 명분을 요구했고, 드미트리는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모스크바를 떠나 코스트로마(Kostroma)로 피신했다. 모스크바는 속임수로 성문이 열린 후 함락되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14세기 러시아 연대기들은 이 참사를 생생하게 전한다. "길거리에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이 재앙 앞에서 드미트리가 수도를 버리고 떠난 것은 오랫동안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복잡하게 만들어온 대목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비겁함으로 읽고, 다른 이들은 냉철한 현실 판단으로 읽는다.


찰스 하칼레이는 이 사건을 더 넓은 맥락에서 분석한다. 드미트리의 후퇴는 쿨리코보가 최종적인 결산이 아니라 긴 과정의 한 단계였음을 확인시켜준다. 황금 군단은 여전히 모스크바가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382년 토크타미시의 침공은 쿨리코보에서의 패배에 대한 보복이자, 새 칸이 루시 공후들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드미트리는 이후 토크타미시에게 복종을 표하고 다시 조공 관계를 재건했다. 쿨리코보의 영웅이 황금 군단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역사적 과정이 단선적이지 않음을 웅변한다.


그러나 이 "굴복" 속에도 드미트리는 작지만 결정적인 전례를 만들었다. 토크타미시에게 아들 바실리를 인질로 보내면서도, 대공위 자체의 세습에 대해서는 협상의 여지를 유지했다. 표면적 복종과 실질적 자율성의 간극—이것이 드미트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하려 했던 균형이었다.


드미트리의 모든 업적 중에서 역사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의 유언장이다. 138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대공위를 아들 바실리 1세에게 물려주는 유언을 작성했다. 그런데 이 유언장 어디에도 황금 군단 칸의 승인, 즉 야를리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이 왜 혁명적인가?


1240년 바투(Batu Khan)의 침공 이래, 루시 공후들의 지위는 칸의 야를리크에 의해 공식화되는 것이 관례였다. 새 대공이 즉위할 때마다 황금 군단의 수도 사라이(Sarai)에 사절을 보내 야를리크를 받아와야 했다. 이 관행은 몽골 지배의 가장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드미트리의 유언장은 이 관행을 침묵 속에서 폐기했다. 그는 황금 군단의 권위를 부정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재닛 마틴은 이 유언장을 "법적 형식이 아니라 의지의 선언(not a legal document but a declaration of will)"이라고 부른다. 이후 바실리 1세는 실제로 야를리크 없이 대공위에 올랐고, 황금 군단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군사적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금 군단 자체가 이 시기 티무르(Timur, 탐베를레인)의 침공으로 심각한 내부 위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1395년 티무르는 황금 군단의 군대를 격파하고 사라이를 약탈함으로써 황금 군단의 중앙 권력을 사실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시켰다. 드미트리의 유언장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역사의 타이밍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쿨리코보 전투는 군사적 사건인 동시에 문화적 사건이었다. 전투 직후부터 이 전투를 기념하는 문학 작품들이 쏟아졌다. 『쿨리코보 전투 이야기(Skazanie o Mamaevom poboishche)』와 『돈 강 저편에서(Zadonshchina)』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중세 러시아 문학 작품이다. 『자돈시치나』는 러시아 최고의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Slovo o polku Igoreve)』의 문체와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계승하면서, 12세기의 패배와 14세기의 승리를 대비시킨다. 1185년 이고리 공의 패배가 분열과 굴욕의 기억이라면, 1380년 드미트리의 승리는 통합과 재생의 기억이다. 이 대비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드미트리의 승리를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루시 역사의 서사적 전환점으로 위치시키는 서사 전략이었다.


미국의 러시아 문화사가 마이클 체르니아프스키(Michael Cherniavsky)는 그의 저작 『차르와 인민(Tsar and People)』에서 쿨리코보가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서 수행한 기능을 분석한다. 체르니아프스키에 따르면, 쿨리코보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트베리 사람도, 수즈달 사람도, 모스크바 사람도 쿨리코보에서 함께 싸웠다는 기억이—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든 간에—루시라는 광역 집단 정체성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이 집단 기억의 형성이 얼마나 사후적이고 구성적인 것이었는지도 직시해야 한다. 역사가 찰스 하칼레이는 쿨리코보 전투가 동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것과 같은 위상을 갖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모스크바의 1382년 함락은 쿨리코보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상쇄했고, 드미트리 생전에 이 전투가 루시 해방의 상징으로 기념되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쿨리코보의 신화화는 주로 15세기 이후, 특히 1480년 황금 군단의 멍에가 완전히 끊어진 이후 본격화되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그 사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 의해 사후적으로 부여된다. 쿨리코보는 그 과정의 가장 선명한 사례 중 하나다.


드미트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몽골 지배가 러시아 문명에 남긴 유산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이 주제에 대해 역사학계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해석 전통이 있다. 하나는 몽골 지배를 러시아 발전을 150년 이상 후퇴시킨 순수한 재앙으로 보는 시각이다. 18~19세기 러시아 역사가들, 특히 니콜라이 카람진(Nikolai Karamzin)이 대표하는 이 전통은 몽골 지배를 러시아 문명의 "암흑기"로 규정했다.


다른 하나는 조지 버나즈스키(George Vernadsky)와 레프 구밀료프(Lev Gumilev)로 대표되는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 시각이다. 버나즈스키는 그의 방대한 저작 『몽골과 러시아(The Mongols and Russia)』에서 몽골 지배가 러시아 국가 형성에 구조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 역참 제도(yam system), 조세 징수 방식, 심지어 군사 조직 원리까지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흡수한 제도적 유산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은 반몽골 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몽골 제국 행정의 가장 유능한 계승자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읽힌다.


현대 역사학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린다. 찰스 하칼레이는 몽골 지배가 러시아에 미친 영향이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그리고 사회 계층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귀족과 교회는 몽골 체제와 협력하며 특권을 유지했고, 농민과 도시민은 조공과 약탈의 직접적 피해를 감당했다. 드미트리 자신이 이 복잡성의 산물이었다. 그는 황금 군단의 야를리크로 권위를 확보하면서도, 황금 군단의 실질적 권력에 저항했다. 그는 몽골 체제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해체자였다. 이 역설이 드미트리를 단순한 민족 영웅 서사에 가두는 것을 거부하게 만드는 이유다.


드미트리의 종교적 유산은 그의 정치적 유산과 분리될 수 없다. 그가 쿨리코보 전야에 세르기우스를 방문한 것은, 정치와 종교가 14세기 루시에서 얼마나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세르기우스 연구의 권위자인 러시아 종교사가 니콜라이 세르비나(N. Serbina) 등은 세르기우스의 생애와 사상이 드미트리의 전쟁 결정에 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세르기우스는 단순히 승리를 빌어준 것이 아니라, 정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정당할 수 있다는 신학적 입장을 지지했다.


영국의 러시아 정교 전문가 세르게이 해켈(Sergei Hackel)은 세르기우스가 러시아 수도원 전통에서 수행한 역할을 "영적 민족주의의 촉매(catalyst of spiritual nationalism)"로 규정한다. 세르기우스가 창건한 트로이체-세르기에바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열된 루시 공국들에게 공통의 신앙적 정체성을 제공하는 구심점이었다. 드미트리가 전쟁 전에 이 수도원을 방문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 행위가 아니라, 루시의 공통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드미트리는 1988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시성은 그의 사후 600년이 지난 시점에 이루어졌으며, 구소련의 종교 탄압이 완화되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 시대에 러시아 정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기반을 재정립하는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드미트리의 시성이 어느 정도는 현대 정치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 인물이 사후에도 계속해서 동시대의 필요에 의해 재해석되고 재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미트리는 14세기에도, 20세기 말에도,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서 계속 살아 있다.


1389년, 드미트리는 불과 3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쿨리코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이를 확인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가 남긴 공국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보다 영토로도, 위상으로도 비교할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세르푸홉(Serpukhov), 갈리치(Galich), 드미트로프(Dmitrov), 코스트로마—모스크바 공국의 실효 지배 영역은 드미트리의 재위 기간 동안 눈에 띄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드미트리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영토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의 전례였다. 몽골의 지배가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루시의 공후들이 연합하면 황금 군단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대공위는 칸의 허락이 아니라 모스크바 왕조의 내부 의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 세 가지 전례가 드미트리가 죽으면서 역사에 각인한 것이었다.


로버트 크러미는 드미트리의 유산을 "미완의 혁명(unfinished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는 황금 군단의 멍에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 그러나 그 멍에에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균열을 만들었다. 이후의 역사는 그 균열을 넓혀가는 과정이었다. 드미트리의 손자 바실리 2세는 황금 군단과의 전쟁에서 한때 포로가 되는 굴욕을 겪었지만, 그 손자의 아들 이반 3세는 1480년 우그라 강의 대치에서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고 황금 군단을 물러나게 했다. 100년에 걸친 그 과정의 출발점에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있었다.


'돈스코이(Donskoy)', 즉 '돈 강의 사람'이라는 칭호는 드미트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쓰이지 않았다. 이 칭호는 그가 죽은 후 후대가 부여한 것이다. 이것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역사가 인물에게 이름을 줄 때 그 이름은 언제나 후대의 판단을 담기 때문이다. 돈 강은 단순한 지리적 지형이 아니다. 그것은 되돌아올 수 없는 결단의 상징이다. 카이사르의 루비콘처럼, 드미트리의 돈 강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러나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위인 신화로 포장하는 것은 그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이다. 그는 토크타미시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는 한때 야를리크를 사기 위해 황금 군단에 선물을 보냈다. 그는 승리한 전투만큼이나 타협한 협상들에 의해 자신의 공국을 지켰다. 위대한 지도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드미트리는 그 정의에 부합했다.


재닛 마틴의 말을 빌리면, 드미트리의 생애는 "불완전한 성공과 불가피한 타협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은 통치의 사례"다. 1380년 쿨리코보에서 그는 역사의 방향에 투표했다. 그 투표는 당장 모든 것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2년 후 토크타미시의 말발굽이 모스크바를 짓밟는 와중에도, 쿨리코보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후 세대들이 돌아올 참조점이 되었다. 우리가 해낸 적이 있다는 것—그 기억이 다음번의 저항을 가능하게 한다.


역사의 전환점은 언제나 사후에 선명해진다. 당사자들은 안개 속에서 싸운다. 드미트리는 1380년 9월 8일 아침, 안개로 뒤덮인 쿨리코보 벌판에서 돈 강을 등지고 서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가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 그는 그저 살아남으려고, 그리고 모스크바를 지키려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싸움이, 그것의 이름이 붙기도 전에, 이미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나아감이 시대를 바꾸는 것.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93%9C%EB%AF%B8%ED%8A%B8%EB%A6%AC_%EB%8F%88%EC%8A%A4%EC%BD%94%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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