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3세-러시아의 시작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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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때때로 한 인물의 손 안에 집약된다. 1462년, 스물두 살의 청년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보좌에 앉았을 때, 그가 물려받은 것은 몽골의 멍에 아래 200여 년을 허리 굽혀 살아온 작은 공국이었다. 그로부터 43년 뒤 그가 눈을 감을 때, 그 공국은 유럽 최대의 영토를 가진 단일 국가로 변모해 있었다. 이반 3세(Ivan III, 1440~1505)는 스스로를 "모든 루시의 군주(Gosudar vseia Rusi)"라 칭했고, 역사가들은 그에게 "대제(Великий)"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러시아사 교수를 역임한 존 페넬(J.L.I. Fennell)은 그의 저서 『모스크바의 이반 대제(Ivan the Great of Moscow, 1963)』에서 이반을 "러시아 국가 건설의 진정한 설계자"라 규정했고, 러시아의 위대한 사학자 세르게이 솔로비요프(Sergei M. Soloviev) 역시 『러시아의 역사(History of Russia)』 제7권에서 이반의 치세를 러시아 역사의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반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영토를 넓혔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흩어진 러시아의 정체성을 하나의 국가 이념으로 봉합하고, 유목 제국의 지배라는 트라우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켰으며,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문명적 경로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국가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짓밟고 역사에서 지워버린 냉혹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이 두 얼굴을 함께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반 3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이반이 태어나던 1440년대의 루시 땅은 혼돈 그 자체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반의 초년을 "극적이고 격동적"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의 아버지 바실리 2세는 왕위를 둘러싼 잔혹한 내전에서 사촌 드미트리 셰먀카에게 패배해 두 눈이 뽑히는 수모를 당했고, 어린 이반은 수도원에 숨겨졌다가 적에게 넘겨졌으며, 다시 석방되는 파란만장한 유년을 겪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1450년, 눈 먼 아버지는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고, 이반은 그때부터 정치와 군사를 몸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열두 살에는 북방 원정을 명목상 지휘했고, 열여덟에는 타타르군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 경험은 그를 무모한 전사가 아닌, 철저히 계산하고 기다릴 줄 아는 전략가로 빚어냈다. 권력이 얼마나 쉽게 빼앗길 수 있는지를 직접 목격한 아이는,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위협도 용납하지 않는 군주가 되었다.


집권 초반의 이반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먼저 내부를 정비했다. 야로슬라블(1463년), 로스토프(1474년)와 같은 소규모 공국들을 하나씩 복속시켰고, 무력보다는 외교와 결혼 동맹, 그리고 매입이라는 수단을 선호했다. 솔로비요프는 이 과정을 "공국들이 모스크바의 중력권으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반의 치세에서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가진 정복은 노브고로드(Novgorod)였다.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번성했고, 시민 의회인 베체(veche)와 민선 시장격인 포사드니크(posadnik)를 통해 독자적인 공화정을 유지하던 노브고로드는 중세 루시 세계의 또 다른 극점이었다. 인구와 부, 영토 면에서 모스크바에 결코 뒤지지 않는 도시였다.


1471년, 노브고로드의 친리투아니아 귀족 세력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손을 내밀려 하자, 이반은 이를 단순한 외교적 일탈이 아닌 문명 선택의 문제로 규정했다. 그는 노브고로드를 향해 군대를 움직이면서 "루시 땅을 가톨릭 이교도에게 팔아넘기려는 배교 행위"라는 종교적 언어로 전쟁을 정당화했다. 1471년 7월 14일, 셸로니 강(Shelon River) 전투에서 노브고로드군은 궤멸되었다. 지도자 드미트리 보레츠키를 포함한 귀족 4명은 즉결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년 뒤인 1478년 1월, 그는 노브고로드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공화정의 상징인 베체의 종—시민들이 종을 울려 의회를 소집하던—을 모스크바로 옮겨버렸다. 백과사전닷컴(Encyclopedia.com)의 관련 항목이 정확하게 서술하듯, 이것은 "노브고로드의 자치권이 완전히 소멸된 순간"이었다. 종을 빼앗는 행위는 단순한 전리품 징수가 아니었다. 독립 도시의 영혼을 묻어버리는 의식이었다. 1480년대에 이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브고로드 대주교의 영지와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군사 복무를 조건으로 하는 포메스티에(pomestie) 제도로 재편했다. 이 토지 재분배 시스템은 모스크바 중심의 새로운 군사-사회 질서의 기반이 되었고, 훗날 러시아 귀족 제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이반의 치세에서 1480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해는 러시아 역사에서 특별한 무게를 갖는다. 몽골-타타르의 멍에(татаро-монгольское иго)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해이기 때문이다. 킵차크 칸국의 후신 대오르다(Great Horde)의 칸 아흐마트(Ahmed Khan)는 이반이 1476년부터 관습적인 조공 납부를 거부하자 대규모 원정을 일으켰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조차 자신의 저술에서 "이반의 치세 초기, 그는 여전히 타타르의 조공국이었다"고 기록할 만큼, 복속의 구조는 견고했다. 리투아니아와 군사 동맹을 꾀한 아흐마트는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고, 이반의 군대는 우그라 강(Ugra River) 건너편에 진을 쳤다. 이른바 "우그라 강의 대치(Great Stand on the Ugra River)"라 불리는 이 대결은 기이하게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 양군은 1480년 가을 내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고, 결국 11월 11일, 아흐마트는 군대를 이끌고 초원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그는 노가이 오르다의 칸 이박에게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고, 황금 오르다는 급격히 붕괴했다. 전투 없이 이루어진 해방이었지만, 그 의미는 어떤 전쟁의 승리보다 컸다. 240여 년에 걸친 복속의 역사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이반이 이 대치에서 보여준 신중함과 인내를 두고, 당시의 일부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비겁함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역사가 페넬(Fennell)은 이반의 전략적 자제력이야말로 쓸모없는 소모전에서 러시아를 구한 핵심 요소라고 평가한다. 이반은 정면 충돌보다 외교적 고립—아흐마트의 리투아니아 동맹을 무력화하는 데 크림 칸국과의 협력을 활용했다—을 통해 적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아흐마트의 퇴각은 단순한 자연적 행운이 아니라, 이반이 치밀하게 설계한 외교망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이반의 외교적 감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1472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Sophia Palaiolog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의 배경은 복잡하다. 교황 바오로 2세는 소피아를 이반에게 중개하면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공동 십자군 결성을 기대했다. 그러나 학자 제임스 블레이크 위너(James Blake Wiener)가 분석하듯, 이반은 교황의 의도를 철저히 이용하면서도 그 목적에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소피아는 모스크바 도착 직후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정교회로 복귀했으며, 이반은 교황이 기대했던 어떤 종교적 양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반이 이 결혼에서 취한 것은 비잔티움의 정치적 유산이었다.


결혼 이후 이반의 궁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쌍두 독수리 문장(double-headed eagle)을 모스크바의 국가 문장으로 채택했다. 그는 "차르와 전제군주(Tsar i Samoderzhet')"라는 칭호를 공식 서한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Aristotele Fioravanti, c.1415~1486)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소피아의 인연을 통해 모스크바에 초빙되었고, 이들은 르네상스 양식과 러시아 정교회 미학을 결합한 크렘린의 우스펜스키 대성당(Dormition Cathedral)과 석조 성벽을 건설했다. 소피아에 관한 백과사전닷컴의 기술처럼, "모스크바는 당시 나무 울타리와 통나무 건물들이 즐비한 시골 도시였으나, 소피아의 생애 동안 처음으로 크렘린 안에 석조 건물이 세워졌다." 이탈리아의 무기 장인이 건설한 주조 공장에서는 이반의 군대를 위한 최초의 신뢰할 만한 대포가 생산되었다.


그러나 소피아의 역할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은 단순하지 않다. 베네치아의 외교관 암브로조 콘타리니(Ambrogio Contarini)는 1476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소피아가 이반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궁정이 두 파벌—첫 번째 아내의 아들 이반 몰로도이를 지지하는 측과 소피아를 지지하는 측—로 나뉘어 있다고 기록했다. 위키피디아의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 항목이 인용하듯, 소피아는 1472년 이반이 몽골 대표단에게 예속적인 의례를 행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그가 조공 관계를 끊도록 적극적으로 촉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역사가들은 소피아의 실제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지만, 그녀가 모스크바를 비잔티움의 정통 계승자로 격상시키는 이념 작업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만은 폭넓게 인정된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무르익고 있던 하나의 강력한 사상이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정교회 세계 전체에 충격을 안겼다. 러시아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버리셨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명을 주셨는가"라는 물음이 들끓었다.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답변은 16세기 초 수도사 필로페이(Filofei)의 편지에서 정식화되었다. 그는 "두 개의 로마가 무너졌다. 세 번째 로마, 즉 모스크바는 서 있다. 네 번째는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첫 번째 로마는 이단에 물들어 몰락했고, 두 번째 로마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 굴복했으므로, 이제 정교회 문명의 수호자는 모스크바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EBSCO 학술 데이터베이스의 관련 항목이 정리하듯, 이 이념은 이반의 치세 동안 "모스크바는 비잔티움 황제들의 계승자이자 보편적 그리스도교 제국의 중심"이라는 자기 인식과 결합되어 러시아 국가 이념의 핵심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반 자신은 즉위 의식에서 공식적으로 차르로 추대된 적이 없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대공"이라는 호칭에 만족했고, 외교 서한에서만 차르 칭호를 사용했다. 완전한 의례적 대관식은 손자 이반 4세 때에야 이루어진다. 이반 3세의 차르 칭호는 여전히 잠정적이었지만, 그가 심어놓은 씨앗은 분명했다.


이반 3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제도적 유산 중 하나는 1497년에 반포된 수데브니크(Sudebnik)이다. 미국 슬라브·동유럽학 리뷰(American Slavic and East European Review)에 게재된 호레이스 듀이(Horace W. Dewey)의 고전적 논문 「1497년 수데브니크: 무스코바이트 러시아 최초의 국가 법전(The 1497 Sudebnik: Muscovite Russia's First National Law Code)」(1956)은 이 법전을 러시아 법제사의 결정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수데브니크 이전까지 각 공국은 제각각의 관습법에 따라 운영되었다. 야로슬라블의 법과 노브고로드의 법이 달랐고, 모스크바의 법원 절차는 트베리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이반은 루스카야 프라브다(Russkaya Pravda), 프스코프 사법 헌장 등 기존 법원들을 통합하고 중앙집권적 사법 체계를 확립했다. 법전은 68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재판 절차, 형사 처벌(사형, 태형), 그리고 재산권을 규정했다.


그러나 수데브니크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논쟁적인 조항은 제57조다. 이 조항은 농민이 영주를 떠날 수 있는 기간을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11월 26일) 전후 각 1주, 즉 연 2주로 제한했다. 농민은 이동하려면 "포질로예(pozhiloye)"라는 이주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조치였다. 그러나 러시아 법제사 학자들은 이 조항에서 장차 러시아 사회를 옭아맬 농노제(крепостное право)의 법적 기원을 본다. 예일 대학교 애벌론 프로젝트(Avalon Project)가 수록한 러시아 역사 문헌들이 보여주듯, 역사가 클류체프스키(Klyuchevsky)는 1497년 법전을 로마의 콜로나투스(colonatus, 소작농 예속 제도)와 유비하며, 러시아 농민 예속의 기원이 이 조항에 있음을 논증했다. 1550년 이반 4세의 수데브니크가 이 조항을 반복했고, 1649년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Sobornoye Ulozheniye)는 마침내 농민의 이동 자유를 영구적으로 박탈했다. 이반 3세가 행정적 편의를 위해 내린 것처럼 보이는 결정이, 수백 년의 시간을 두고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박하는 역사적 족쇄가 된 것이다.


이반 3세를 평가할 때 우리는 종종 그의 냉혹함을 간과한다. 노브고로드 병합 이후 그는 수백 명의 귀족 가문을 강제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모스크바 충성파를 심었다. 역사가 구스타프 알레프(Gustave Alef)는 그의 저서 『무스코바이트 전제정의 기원: 이반 3세의 시대(The Origins of Muscovite Autocracy: The Age of Ivan III, 1986)』에서 이를 당대 유럽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체계적인 지배 계층 교체 작전으로 분석한다. 이것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다. 반란의 사회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는 예방적 폭력이었다. 말년의 이반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도 냉혹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첫 번째 아내 마리아 트베르스카야 소생의 아들 이반 몰로도이(Ivan the Young)가 149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당시의 사료에는 독살 의혹이 기록되어 있다—이반 3세는 장손 드미트리와 소피아 소생의 아들 바실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반복했다. 1497년 수데브니크 편찬의 실무 책임자 블라디미르 구세프가 연루된 음모 사건에서 소피아와 바실리도 반역 혐의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반은 한때 드미트리를 공식 후계자로 책봉했다가, 결국 마음을 돌려 1502년 바실리에게 대권을 넘겼다. 드미트리와 그의 어머니 엘레나는 투옥되어 생을 마감했다. 왕좌 앞에서 혈육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반 3세를 동시대의 유럽 군주들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모스크바를 통치하던 시절,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레콩키스타를 완수하며 통일 왕국을 세웠고, 영국에서는 장미 전쟁의 혼란 끝에 헨리 7세가 튜더 왕조를 개창했다. 중앙집권적 민족 국가의 시대가 유럽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비교를 흥미롭게 포착했다. 그는 이반 즉위 초 "타타르의 조공국이었고, 귀족들이 대공의 권위에 도전했으며, 노브고로드가 북방을 지배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를 위협했으며, 리보니아 기사단이 아직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치세 말에 이르자 "이반 3세는 완전히 독립된 왕좌에 앉았고, 비잔티움 황제의 딸을 곁에 두었으며, 카잔은 그의 발 아래 있었고, 황금 오르다의 잔재들은 그의 궁정에 몰려들었으며, 노브고로드와 다른 공화국들이 복속했고, 리투아니아의 왕은 그의 수중에서 놀아났으며, 리보니아 기사단은 패배했다"고 총평했다. 이 극적인 반전 앞에서 마르크스조차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반이 서방을 경계하면서도 그 기술과 미학을 흡수할 줄 알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474년 베네치아와, 1482년 헝가리와, 1489년 신성로마제국과, 1493년 덴마크와, 1496년 오스만 제국과 차례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헝가리 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는 1488년 사절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했고, 이반은 그에게 금세공인과 대포 제조공 같은 전문 기술자들을 요청했다. 신성로마황제는 이반에게 "왕" 칭호를 줄 테니 오스만 동맹에 참여하라고 제안했다. 이반은 거절했다. 그는 어떤 외세의 질서에도 편입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거절의 논리—독립과 자주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는 이후 러시아 대외 정책의 원형이 되었다.


역사의 냉정한 저울 위에 이반 3세를 올려놓을 때 그 무게는 압도적이다. 그가 즉위할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면적은 약 43만 제곱킬로미터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러시아의 영토는 약 28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단순한 두 배도 아닌 여섯 배 이상의 확장이었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적 변화였다. 이반의 치세 동안, "루시(Rus')"라는 옛 지명은 그리스 어원을 가진 "로씨야(Rossiia)", 즉 오늘날의 "러시아(Russia)"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백과사전닷컴이 지적하듯, "이 새로운 명칭은 이반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하나의 이름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이름이 따라온다. 이반 3세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존 페넬은 "이반 3세의 과도한 신중함, 화려함과 매력의 부재, 인간적 매력의 결여가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에게 '대제'라는 칭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역시 "이반은 애도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채 죽었다"고 기술한다. 그는 여성들이 그의 시선에 겁에 질려 기절했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위압적이었지만, 그의 덕목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기록은 놀랍도록 침묵 속에 있다. 그는 위대한 군주였지만 사랑받는 인간이 아니었다. 역사의 냉소는 그러하다. 가장 많은 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반드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지는 않는다.


이반 3세가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아마도 러시아라는 국가의 자기 인식일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러시아가 단순히 유목 제국의 변방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정치적 현실로 만들었다. 필로페이의 "제3의 로마" 사상은 이반의 치세가 만들어낸 정치적 환경 없이는 사상 공간에서 태어날 수 없었다. 이반 4세(공포왕 이반)의 폭정,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 19세기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논쟁,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정체성의 물음 속에 이반 3세가 그려놓은 원형(原型)이 면면히 흐른다. 쌍두 독수리 문장은 소련이 무너진 1991년 이후 다시 러시아 연방의 국가 상징으로 부활했다. 왕조적 의미는 사라졌지만, 그 형상이 다시 불러들여진 사실은 역사의 기억이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역사는 찬사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가 구축한 중앙집권 체제는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힘을 우선하는 전통을 낳았다. 노브고로드의 도시 공화정을 짓밟고, 수데브니크로 농민의 이동 자유를 제한하기 시작하고, 귀족 가문들을 강제 이주시킨 그의 결정들은 하나하나가 국가 통합의 논리 위에 세워졌지만, 동시에 러시아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 가능성을 조금씩 좁혀가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반 3세가 심어놓은 권위주의적 국가 모델은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 되었고, 그 패턴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다. 우리가 이반 3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를 영웅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복잡성 때문이다. 한 인간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언제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이반 3세의 생애는 그것을 더없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1505년 10월 27일, 예순다섯의 이반이 눈을 감았을 때, 그의 아들 바실리 3세는 아버지가 반쯤 완성해 둔 나라를 물려받았다. 모스크바 크렘린의 붉은 벽돌 성벽은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빚어낸 르네상스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황금 오르다의 잔재들은 초원 너머에서 아직 위협을 속삭였다. 그러나 이미 결정적인 무언가가 바뀌어 있었다. 루시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그 이야기의 저자는 이반 3세였고, 그 이야기는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0%98_3%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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