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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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랫동안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여겨왔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우주의 광대함과 복잡성을 드러낼수록, 전통적인 신의 모습이 현실과 부합하는지 의문스럽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의 실망감, 과학적 발견과의 충돌,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글은 우리가 신을 한정된 인식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만들어온 신의 모습이 사실은 우리의 한계된 인식 속에서 창조된 투영일 수도 있다.


우리는 4차원의 시공간 속에 산다.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수학과 물리학은 이미 우리에게 더 높은 차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끈 이론은 11차원을, 다차원 우주론은 무수히 많은 차원의 존재를 시사한다.

2차원 평면에 사는 존재를 상상해보자. 그들에게 구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단지 그들의 세계를 지나가며 변화하는 원의 단면들로만 인식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고차원 존재는 우리 차원에서 관찰되는 부분적 현상들로만 드러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3차원 공간에서 2차원 평면에 선을 그어 벽을 만들 수 있지만, 4차원 존재는 시간 축을 이용해 그 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조작하거나, 우리에게는 '순간이동'으로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가상 세계의 캐릭터가 모니터 너머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 역시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차원의 감옥 안에 있다.


우리가 '전지전능'이라 부르는 속성은, 사실 고차원 존재가 우리 차원을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인식의 차이일 수 있다. 마치 우리가 2차원 세계의 모든 점을 동시에 볼 수 있듯이, 5차원 존재에게는 우리의 모든 시공간이 하나의 정지된 그림처럼 펼쳐져 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며, 우리의 자유의지마저도 그들에게는 이미 정해진 경로로 인식될 수 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은 고차원 존재가 우리 차원의 물질이나 에너지에 미묘하게 개입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종이 위의 2차원 세계에 연필로 선을 그어 '벽'을 만들고, 그 위로 손을 뻗어 물체를 순간이동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고차원 존재에게는 우리 세계의 모든 '불가능'이 단순한 차원 간의 상호작용에 불과할 수 있다.


중요한 통찰이 나온다. 우리가 개미집을 관찰할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개미들의 복잡한 사회 구조에 흥미를 느끼고 그들의 생존 방식을 연구할 수는 있지만, 개별 개미의 '기도'를 직접적으로 들어주지는 않는다. 개미가 아무리 간절히 무언가를 요청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인지하지 못할 뿐더러, 설령 인지한다 해도 우리가 개입함으로써 초래될 예측 불가능한 결과 때문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차원의 신적 존재들 역시 우리 차원에 대해 '무관심'하다기보다는 '초월적'인 관찰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간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탐구의 대상이다. 우리의 문명, 발전, 갈등, 그리고 사랑과 같은 감정들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흥미로운 패턴이자 연구 자료일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정육면체의 각 면과 모서리를 살펴보듯, 우리 차원의 다양한 측면들을 관찰하며 더 큰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활용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도, 그들에게는 차원적 실험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얼핏 우리를 소외시키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더욱 깊은 경외감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라는 겸손한 깨달음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대한 우주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부재하거나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신과 소통하는 방식, 혹은 신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했을 뿐이다. 신은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는 인격적 존재라기보다는,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차원적 구조 자체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존재가 이 거대한 직물의 한 올 한 올을 이룬다.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이다.


결국 이 관점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깊은 겸손함이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신도 우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거대한 차원적 실험의 일부이며, 그 자체로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마치 정육면체가 2차원 존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이듯, 우리 역시 더 낮은 차원에서 보면 신비로운 존재일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관찰당하는 객체가 아니라, 이 복잡다단한 차원의 계층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상호작용하는 존재다.

이는 우리가 우주의 신비에 대해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일깨워준다. 우리는 차원의 계층 속에서 동시에 관찰자이자 관찰당하는 존재이며, 이 사실 자체가 우리 존재의 특별함을 증명한다.


이러한 성찰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인격신에게 구원을 기대하거나,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보다 고차원의 존재가 이 우주의 복잡한 구조 속에 내재되어 있음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는다.

이것은 더 과학적이고, 더 겸손하며, 더 우주적인 신앙의 형태다. 우리는 여전히 삶 속에서 '기적'과 같은 초월적 현상을 경험할 수 있고, 우리를 둘러싼 장엄한 질서 속에서 고차원 존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차원의 언어로, 구조의 언어로 이해할 뿐이다.

신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우주 그 자체의 심오한 법칙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적 겸손함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신비를 탐구할 용기를 선사한다.


(이미지 출처 https://kr.pinterest.com/pin/425731589727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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