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경제학-현대적 해석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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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런던, 템스강 연안의 공장지대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공장 안에서는 8세 아이들이 거대한 기계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실을 잇고, 여성들은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면직물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토록 많은 부가 생산되는데도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비참해져만 갔다. 칼 마르크스는 이 역설적 현실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이 새로운 경제 체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풍요 속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은 고통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150년도 더 된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오늘날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여전히 마르크스가 목격했던 그 근본적 모순들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생산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했지만,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경제 위기는 반복되며,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만든 경제 시스템에 의해 소외당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통찰은 경제를 자연법칙처럼 영원불변한 것으로 본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달리, 경제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권력 관계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체제로 보았다면, 마르크스는 그것을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등장한, 따라서 변화 가능한 체제로 이해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단순히 학문적 차이를 넘어서, 경제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심장부에는 잉여가치론이 있다. 이 이론은 자본가가 어떻게 '공정한' 거래를 통해서도 노동자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마르크스만의 독창적 발견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모든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입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가치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즉, 특정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그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 논리를 따르면 자본가의 이윤은 어디서 나오는가? 모든 상품이 정확히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면, 이윤이 발생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는 이 수수께끼를 노동력 자체를 하나의 특별한 상품으로 분석함으로써 풀었다. 노동자는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이때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 즉 노동자가 생존하고 다음 세대를 키우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와 같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이 실제로 생산해내는 가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하루 생활하는 데 6시간의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들이 필요하다면, 노동력의 일일 가치는 6시간의 노동에 해당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정당한 가격에 구매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노동자를 8시간, 10시간, 심지어 12시간까지 일하게 만들 수 있다. 바로 이 추가된 시간의 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는 사기나 강탈이 아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시장가격에 구매했고, 노동자는 약속된 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이 가진 독특한 속성 - 자신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 - 때문에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는 도덕적 비난의 의미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합법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지칭하는 분석적 개념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단순한 돈이나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처럼 스스로를 증식시키려는 내재적 충동을 가진 사회적 관계였다. 자본은 화폐(M) → 상품(C) → 생산(P) → 새로운 상품(C') → 더 많은 화폐(M')의 끝없는 순환을 통해 자신을 확대재생산한다.

이 순환에서 핵심은 생산 과정(P)이다. 자본가는 화폐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고, 생산 과정에서 노동력이 투입되어 기존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닌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서 판매하면 처음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화폐를 회수할 수 있다. 바로 이 차이가 잉여가치이며, 이것이 자본 증식의 원천이다.

자본의 축적은 이렇게 창출된 잉여가치의 일부를 다시 생산에 투자하는 과정이다. 마르크스는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이다!"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자본가 개인의 탐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적 논리를 지적한 것이다. 자본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축적해야 하는 강제된 상황에 놓여 있다. 축적하지 않는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결국 도태되고 만다.

이러한 축적 과정은 단순히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사회 전체의 부극화를 심화시킨다. 자본가들이 축적한 부는 곧 노동자들이 생산했지만 돌려받지 못한 잉여가치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축적이 진행될수록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주의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체제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작동 방식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은 이러한 모순의 핵심이다.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기계와 기술을 도입한다. 이는 합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실제로 단기적으로는 그 자본가의 이윤을 증가시킨다. 하지만 모든 자본가가 같은 전략을 채택하면, 전체적으로는 노동력에 대한 기계의 비율이 높아진다.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면, 불변자본(기계, 원료 등)에 대한 가변자본(노동력)의 비율이 감소한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잉여가치는 오직 살아있는 노동력에서만 창출되는데, 그 노동력의 상대적 비중이 줄어들면 잉여가치의 총량도 감소한다. 투자한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 즉 이윤율이 저하되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의 합리적 행동이 전체 자본가 계급에게는 이윤율 저하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이른바 '합성의 오류'가 발생한다.

과잉생산의 모순도 마찬가지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가능한 한 낮게 유지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은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단지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소비자이기도 하다. 임금을 억제하면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생산된 상품을 모두 판매하기 어려워진다.

1929년 대공황이 바로 이러한 과잉생산 위기의 전형적 사례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생산성이 급속히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었다. 그 결과 생산능력과 소비능력 사이의 격차가 벌어졌고, 결국 시장이 붕괴되면서 대규모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은 또 다른 모순을 낳는다. 경쟁 과정에서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거나 경쟁에서 밀어내면서, 소수의 대자본이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이는 독점의 형성으로 이어지며, 자본주의가 전제로 하는 자유경쟁을 스스로 파괴한다. 독점기업들은 혁신에 대한 동기를 잃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며,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저해한다. 또한 소득이 소수의 거대 자본가들에게 집중되면서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느끼는 불만을 설명하는 심리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어떻게 왜곡하고 억압하는지를 보여주는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경제학적 분석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은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노동 능력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발전시킨다. 노동은 단순한 생존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자아실현의 수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활동이 왜곡된다.

첫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 노동자가 온 정성을 다해 만든 제품은 그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 창조물이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힘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만든 기계가 자신을 더욱 혹독하게 부리는 도구가 되고, 자신이 생산한 상품이 자신은 살 수 없을 만큼 비싸게 팔린다.

둘째, 노동 활동 자체로부터의 소외다. 노동은 더 이상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강제된 고통이 된다. 분업과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는 전체 생산 과정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받으며 인간적 존재감을 상실한다.

셋째, 인간의 종적 본질로부터의 소외다. 인간은 본래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노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 발휘될 기회가 박탈된다. 노동자는 단순한 육체적 기능만을 반복하며, 정신적·창조적 능력은 위축된다.

넷째,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소외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경쟁자로 만든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해야 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해관계가 대립된다. 본래 협력하고 연대해야 할 인간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변질된다.

이러한 소외는 오늘날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받으며,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에 놓여 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성과 평가와 KPI에 매달리며 창의성보다는 수치에 집착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시선에 맡긴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현대적 소외의 대표적 징후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마르크스의 이 유명한 선언은 단순히 계급 간의 대립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의 근본 동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은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와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 간의 구조적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 대립은 개인적 감정이나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극대화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 한다. 이 둘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대립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세력, 즉 조직화된 노동자 계급을 키운다고 보았다.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공통의 경험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되고, 집단적 행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노동조합의 형성, 파업, 정치적 운동 등이 이러한 계급의식의 발현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계급의 개념은 마르크스 시대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전통적인 공장 노동자 외에도 비정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화이트칼라 노동자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조건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계급투쟁의 양상도 다변화되었다. 전통적인 노동조합 활동과 파업을 넘어서, 시민 운동, 환경 운동, 인권 운동, 젠더 평등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저항과 변화의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도전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확장된 계급투쟁'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놀라운 설명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가 자본주의의 표면적 현상이 아닌 본질적 구조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가장 정확히 들어맞은 영역이다. 토마 피케티의 연구에 따르면,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상회하면서(r > g)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축적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그 자본이 낳는 수익을 통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에만 의존하는 사람들과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미국의 경우 상위 1%가 전체 부의 40%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말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격차 확대"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화와 투기자본의 문제도 마르크스의 분석틀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실물 생산보다 금융이 경제를 주도하는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생산 영역에서의 이윤율 저하를 배경으로 한다. 실물 경제에서 충분한 이윤을 얻기 어려워진 자본이 금융 부문으로 몰리면서, 투기적 거품이 형성되고 주기적으로 붕괴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부동산 거품의 형성과 붕괴, 파생상품을 통한 위험의 전 세계적 확산, 금융기관들의 연쇄 도산 등은 모두 자본의 투기적 성격과 과잉축적의 결과였다. 흥미롭게도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행 구제금융, 양적 완화 등)은 결과적으로 부유층에게 더 많은 이익을 안겨주어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노동의 변화와 새로운 소외도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노동의 형태는 크게 변했지만, 소외의 본질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플랫폼 경제에서 일하는 배달 기사나 우버 드라이버들은 전통적인 고용 관계에서 벗어나 있지만, 알고리즘에 의해 더욱 철저하게 통제받는다. 그들은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아닌 애매한 지위에서 사회보장의 혜택은 받지 못하면서 모든 위험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사무직 노동자들 역시 새로운 형태의 소외를 경험한다. 성과 평가, KPI, 데이터 분석 등에 매달리면서 인간적 창의성보다는 수치 달성에 집착하게 된다. 재택근무와 원격 업무는 일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24시간 언제든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다.

생태 위기와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마르크스가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의 분석틀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자본주의의 축적 논리는 본질적으로 무한한 성장을 추구한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고, 환경의 수용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단순한 생산 요소로 취급하면서 끊임없이 착취하고 소진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동시에 토지의 지력과 노동자의 활력이라는 모든 부의 원천을 파괴한다"고 썼는데, 이는 오늘날의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를 예견한 선구적 통찰이었다.

기업들이 단기적 이윤 극대화에 매달리면서 장기적 환경 비용을 외부화하는 행태, 화석연료 기업들이 기후변화의 과학적 증거를 은폐하고 로비를 통해 규제를 막는 행위 등은 모두 자본축적 논리의 결과다. 개별 기업이 환경친화적 행동을 취하더라도, 전체 시스템이 성장과 경쟁을 강요하는 한 근본적 해결은 어렵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완벽한 이론이 아니다. 그는 기술 혁신이 가져올 생산성 향상의 규모를 과소평가했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그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은 그가 상상한 방식으로는 실현되지 않았다. 20세기의 소비에트 체제는 마르크스가 꿈꾼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핵심 통찰들은 여전히 강력한 설명력을 갖는다.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점, 경제 위기가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의 내재적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점, 그리고 경제를 단순한 시장 메커니즘이 아닌 사회적 권력 관계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은 현재의 경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더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던진 근본적 질문이다. 경제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효율성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인가, 아니면 모든 인간의 전면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현실적 문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의 전면적 발전"이라는 이상을 제시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고, 노동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되며,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 - 심화되는 불평등, 반복되는 경제 위기,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위기, 기후변화와 생태 파괴, 팬데믹이 드러낸 사회적 취약성 - 은 모두 기존의 경제 시스템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비판적 관점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물론 마르크스의 처방전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분석 방법과 비판적 정신이다. 현상의 표면이 아닌 본질을 꿰뚫어보고, 기존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 경제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과연 우리는 이 거대한 자본의 흐름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그 답이 우리 각자의 의식과 집단적 행동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변화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미지 출처 https://ws.or.kr/article/1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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