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돈을 번다. 하지만 그 꿈의 끝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지는가, 아니면 또 다른 굴레에 갇히는가?
미래를 그리던 어느 날 밤, 백억, 천억이라는 숫자를 적어가다 문득 손끝에서 느껴진 것은 기대감보다 싸늘한 허무함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아등바등 숫자를 좇아왔던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으로 시작한 숫자 놀이였지만, 어느 순간 그 숫자들이 실체 없는 기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큰 돈은 오히려 추상적이었다.
일만 원은 구체적이다. 가족과의 외식 한 번, 친구와 나눠 마실 커피 몇 잔, 새로 나온 책 한 권. 십만 원이면 옷 한 벌, 작은 선물, 주말 나들이 비용이다. 이런 돈들은 내 일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가치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백억, 천억이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뇌는 일정 규모 이상의 숫자에 대해서는 실체적인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단순한 기호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치 광활한 우주를 숫자로만 이해하려는 시도와 같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결코 그 크기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결국 무의미한 기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억만장자들의 수백억짜리 요트나 우주여행이 우리에게 부러움보다는 이질감을, 때로는 허무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소비는 단순히 돈의 과시를 넘어, 무한한 숫자를 채우려는 무의미한 몸부림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이는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하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숫자 불리기에 매몰된 삶을 보여주는 슬픈 단면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종종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추상적인 성공을 꿈꾼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숫자만 커질 뿐, 그 뒤에 숨어있는 진짜 욕망은 점점 흐려진다.
과연 우리는 그 큰 돈으로 무엇을 얻으려 했던 걸까? 더 깊이 생각해보니,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모순이 숨어있었다. 돈에 얽매이기 싫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역설.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돈이라는 굴레에 더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성공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압력 속에 놓인다. 그런데 그 '성공'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이것은 현대인이 마주한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다. 젊은 시절부터 우리는 "나중에 자유롭게 살려면 지금 미친듯이 벌어둬야 해"라는 명제 앞에 선다. 그런데 정작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돈에 더욱 얽매이게 되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잊게 된다.
"돈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는 것도 사실 모호한 개념이다. 그것이 완전히 돈 걱정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돈이 없어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전자의 길을 택한다면 충분한 부를 축적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잃을 위험이 있다. 설령 많은 돈을 벌었다 해도, 더 큰 돈을 지키기 위한 불안과 책임감이라는 새로운 굴레에 갇힐 수 있다. 후자의 길을 선택한다면 욕망을 절제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자발적 가난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제약에 직면하게 된다. 둘 다 쉽지 않은 길이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을까?
결국 답은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 돌아가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삶을 살고 싶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먼저 있어야 한다. 어떤 집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람들과, 어떤 취미를 즐기면서 살고 싶은지. 그런 상상을 구체적으로 해보면, 거기에 필요한 돈의 규모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작은 실천들이 필요하다.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을 리스트로 만들어보거나, 구체적인 목표액을 설정할 때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상상해보는 것. 막연한 '성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복'을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생각보다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것을 향해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백억, 천억이라는 숫자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단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돈으로 만들어낼 삶의 질과 행복이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돈과 자유의 역설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돈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점으로 이끈다. 무의미한 숫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살아 숨 쉬는 삶의 가치를 찾아나설 용기를 준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돈에 얽매여 살되, 언젠가는 그 고리를 끊겠다"는 명확한 의식을 갖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것.
돈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도 있고, 그 흐름을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항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돈의 파도를 타되, 그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항해를 주도하는 지혜다.
돈은 지도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지도를 들고 떠나야 할 진짜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happysmile2u/222176063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