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상태에 대한 오해

관찰자 메타인지 그리고 메타자아

by 글 써 보는 의사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보면 메타인지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고, 자기를 관찰하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자기감정에 끌려다니지 말고 관찰하라는 말도 듣는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말은 대개는 오해되고 있다. 자기감정을 관찰하라는 말은 자기감정을 한 발 떨어져서 분석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난다고 하자. 그리고 나는 화가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한다.

‘어, 내가 화가 나네.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 내가 뒷감당할 일이 또 벌어지겠지. 그럼 그건 결국 나한테 손해가 되고 그러니 참자.’

라고 생각하고 화를 통제했다. 절제하고 나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게 자기를 관찰한 걸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자기 관찰이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기감정에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화가 날 때 그 화에 지배 당해 분노의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이 감정에 매달려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 화를 분석하며 화를 참는 것 역시 그 화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그 화에 지배당하건, 그 화를 참건 여전히 그 화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이 화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신경회로를 활성화시킨다. 그리고 반복되면 그것은 일종의 무의식적 습관이 된다. 활성화된 신경회로는 화가 나면 다시 '습관처럼' 반응한다. 다시 말해, 화가 나면 계속 특정 반응으로 고착된다.


관찰이란 화에 대해 반응하는 신경회로 자체를 끊는다는 말이다. 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내가 보기에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방법뿐이다. 참는 게 아니다. (혹은 아예 다른 반응회로를 만들거나, 그러나 그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화 자체를 쳐다보고 반응하지 않는 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물주기에 비유하면 좀 더 이해가 편하다. 그냥 물(화에 끌려가는 경우)을 주든 똥물(화를 참는 경우)을 주든 식물은 자랄 수 있다. 그러나 물을 안 주면(무반응) 식물은 확실히 죽는 수밖에 없다.


좀 더 이해가 쉽게 말하면, 화가 나는 나를, 내가 바라본다는 느낌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둘이 되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화가 나는 내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아예 따로 또 있는 것이다. 체감상 둘로 나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것은 정신병적인 해리 상태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해리 상태는 정상적인 사회 기능이 안 된다. 그러나 관찰 분리 상태는 일상 기능에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일상 기능이 더 잘 된다.)

이와는 달리 화가 나는 나를 나 자신이 분석하고 참는 상태는, 여전히 분리되지 않고 한 사람인 상태다. 화나는 나를 여전히 동일한 내가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는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화 = 나' 라고 화와 나를 동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집착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정말 관찰자가 되는 상태를, 그 분리되는 느낌을 나는 메타인지로 부르지 않고, ‘메타자아’라 부른다. 메타인지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여 표현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차라리 메타자아라는 말이 혼동이 덜 되고, 그 느낌을 더 가깝게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미 '메타자아'라는 용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찾아보진 않았다)


좀 더 피부로 느껴지게끔 예를 들어 보자면, 남이 화를 내는 장면을 내가 관찰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럴 때 나는 그 화를 관찰하지, 그 화를 분석하고 참지 않는다. 그 화를 내는 사람이 내가 아니기에 내가 거기 매달리고 말려들 이유가 없다. 메타자아로서 관찰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화내는 내가 있고, 그걸 관찰하는 내가 있다.

다만 한 가지, 남을 관찰할 때와 다른 부분이 있는데, 남이 화를 낼 때는 내가 그 화를 느낄 수 없지만, 내가 화를 내는 장면을 바라볼 때는, 내가 그 화를 바라보는 동시에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일 수 있으나 지금 내 능력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또 하나, 관찰자 상태를, (감정만을 놓고 예를 든다면), 감정의 포기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일단 이는 이 상태를 겪지 못해서 발생하는 오해이다. 그것은 감정의 포기가 아니라, 감정을 포함해 의식의 영역이 보다 넓어지는 것이다. 사실 감정은 오히려 전보다 더 풍성히 느껴지며(왜냐하면 감정을 억압, 왜곡,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으면서, 그 위에 관찰자가 보태지는 것이다.

전에는 A라는 의식 상태로 살았다면 이제는 A + B 의 상태로 사는 것이다.


각 상태에서는 그 상태만이 전부로 보이기에 그 너머를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자기가 확장되는 경험이 없거나 아직 한 번밖에 겪지 못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처음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마치 다 깨달은 듯, 끝인 듯 착각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왜 다른 사람들은 이걸 모를까, 하고 자기만 안다는 특별한 느낌이 생기기도 한다. (특별하다는 느낌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도하게 억누를 필요는 없다. 특별하다는 느낌 자체는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기도 하고, 또 생각하지 말란다고 쉽게 없어지지도 않는다. 과도하게 억누르며 발생하는 왜곡보다 차라리, 놔두고 더 전진하여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순간이 올 가능성이 높다. 이게 더 현실적 방법이다.)


작은 철조망 우리 속에서만 살던 토끼는 우리가 전부인 줄 알다가, 철조망에서 벗어나 더 넓은 잔디밭 나무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되면, 황홀해하며 여기가 천국이구나 여긴다. 그렇게 그게 전부인 줄 알다가 다시 울타리가 무너지고 이제는 산을 뛰어다니게 되면, 세상에, 하고 다시 놀란다. 그러나 이제 다른 산으로도 넘어가게 되면, 이때부터는 경이로움이나 황홀함, 놀라움은 줄어들고, 오히려 겸허함을 포함한 깊은 감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확장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면, 그때는 알게 된다.

아, 이게 끝이 없구나.


이때쯤 되면 이제 ‘알았다’ 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알았다'는 '알 수 없다'로 대체되고, 결국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겠구나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 그저 알아가면서 이렇게 살아갈 뿐이구나. 나는 한없이 작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이때쯤이 되면 초월적 경험보다, 살아감 자체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살아감 자체에서 경이감을 점점 더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 경이감은 때때로 초월적인 느낌이 난다.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초월이 일상으로 안정적으로 내려오고, 일상과 기적의 구분이 점점 더 옅어진다. 일상과 가족, 직업, 평상시 모든 활동들에 더 집중하게 된다. 평범하게 반복되는 감각과 감정들이 더 깊게 다가오고, 아주 사소한 일들로 감동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이해(혹은 삶을 이해하려는 욕구)보다, 삶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깊어진다.

삶을 이해할 수 없기에, 오히려 삶을 더 신뢰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이 나보다 더 크고, 더 지혜롭기에 굳이 내가 과도하게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를 가야 할 자리로 이끌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가 어머니를 믿듯, 개울 물줄기가 그보다 큰 강의 흐름을 믿고 맡기듯, 파도가 더 큰 바다의 조류에 그저 떠다니듯 하는, 그런 믿음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지혜를 뛰어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개울 물은 보다 큰 강의 흐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파도는 바다의 큰 흐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믿고 맡긴다.






여기까지가 현재로서 내가 이해하는 자기 관찰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사실 며칠 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어떤 시작의 문턱에 있음을 이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또 내일의 나는 다시 달라질 것임을 알 뿐이다.


이것은 아침, 점심, 저녁의 변화와도 이어진다. 매일 아침이 기적인 이유는 내가 완전히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침, 점심, 저녁은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또 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하나 더, 메타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없다. 그것은 순간순간 자아의 인식에 의해 변화하는 단면들의 나열일 뿐이다. 이 부분도 나중에 다루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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