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졸과 비겁, 그리고 굴복의 어딘가
그가 그녀를 굴복시키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무시와 피말림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변했다.
아마도 얼마 전 그녀의 딸이 한 말에서 그간의 모든 노력이 흩어졌음을 느껴서인 걸까.
이번의 무시는 그녀에게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일부러 설거지를 하지 않고 함께 하던 가사를 하지 않는다.
괜찮다. 그녀의 속도대로 천천히 해나가면 되니까.
그녀는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심적, 물리적 거리가 오히려 그녀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건넨다.
모든 일을 그녀 혼자 다 해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에게 굴복한 건 아니다.
오히려 즐겁게 해내고 있다.
그의 방법은 치졸하고 비겁하게 그녀를 굴복시키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녀에게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치사함에 놀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지나가고 있다.
어차피 그가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도가 다를 뿐, 그녀는 그녀대로,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군말 없이 꾸준히 할 일을 해낸다. 천천히.
그는 주변에서 소란스럽게 굴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묵직하게 가라앉은 상태이다. 어떤 동요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 그녀는 굳이 그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그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의 감정을 계속 비겁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그런 그가 두렵거나 숨 막히지는 않는다. 단지 그런 그의 모든 행동과 호흡들이 그저 치사하고 비겁하게만 느껴진다. 본인이 굴복시키고자 하는 대상에게, 가장 근본적인 괴로움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계속 치사하고 치졸하게 굴어라.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난 당신에게 영향받지 않거든.
그녀는 또다시 그에게서 눈과 몸, 그리고 마음을 돌린다.
더 들어낼 것이 있나 싶을 만큼 비어진 마음을 한번 더 흔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