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시는 건 와인인가, 편견인가?
"메를로라면 절대 안 마셔!" (The Curse of Merlot)
2004년, 저예산 로드 무비 한 편이 미국 전역을 강타했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다.
이 영화는 평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등)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각색상을 거머쥔 수작이다. 흥행 또한 폭발적이었다. 미국에서만 제작비의 4배가 넘는 7,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그야말로 '와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하지만 미식의 역사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흥행작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대신 와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문화적 세뇌'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사건의 발단은 주인공 마일스의 대사 한 줄이었다. 와인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가진 척하는, 전형적인 지식인 코스프레(Snob)인 그가 식당 앞에서 친구에게 내뱉은 말이다.
"메를로(Merlot)라면 절대 안 마셔! 만약 메를로를 시키면 난 돌아갈 거야!"
권위 있는 아카데미 수상작 주인공의 이 한 마디가 가진 파급력은 실로 엄청났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사이드웨이 효과(The Sideways Effect)'라고 부른다. 실제로 영화 개봉 직후 미국 시장에서 메를로의 판매량은 2% 하락했고, 가격은 수년간 침체기를 겪었다. 반대로 마일스가 "가장 섬세하고 지적인 품종"이라며 찬양했던 피노 누아(Pinot Noir)는 판매량이 20% 가까이 급증했다.
대중들은 자신의 혀가 아닌 '영화 대사'로 와인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메를로는 촌스럽고, 피노 누아는 우아하다." 마케팅과 미디어가 뇌를 지배한, 가장 완벽하고도 씁쓸한 사례다.
1. 슈발 블랑의 함정: 감독이 설계한 더블 아이러니
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감독이 주인공 마일스(그리고 그를 따라 하는 관객들)를 조롱하기 위해 심어놓은 치명적인 덫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것을 잃은 마일스가 동네 햄버거가게에서 햄버거와 함께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전설의 와인 '샤또 슈발 블랑(Château Cheval Blanc) 1961'.
그는 이 와인을 애지중지하며 '성배(Holy Grail)'처럼 모셨지만, 사실 이 와인의 정체는 마일스의 모순을 폭로하는 결정적 증거다.
첫 번째 모순: 메를로의 배신
슈발 블랑은 보르도 우안(Saint-Émilion)의 와인이다. 이곳은 메를로(Merlot)의 성지다. 슈발 블랑은 빈티지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메를로가 40~50% 섞여 있다. "메를로 따윈 절대 안 마신다"던 그가, 정작 가장 아끼던 와인은 메를로 베이스였다.
두 번째 모순: 까베르네 프랑의 굴욕
더 웃긴 건 나머지 절반이다. 슈발 블랑의 나머지 50% 이상은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이 차지한다. 영화 중반, 마일스는 친구와 눈이 맞은 썸녀가 일하는 와이너리에서 까베르네 프랑 와인을 시음하며 이렇게 말한다. "음, 내 취향은 아니군."이라며 시큰둥하게 넘겨버린다.
결국 마일스는 메를로도 혐오하고, 까베르네 프랑도 무시했다. 하지만 정작 그 두 품종을 섞어 만든 '슈발 블랑'은 보물처럼 애지중지했다.
아무리 맛에 예민한 미식가였음에도, 그 또한 '슈발 블랑'이라는 이름값(Label)과 자신이 만든 편견의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2. 그는 왜 메를로를 미워했나: 취향이라는 이름의 '스노비즘'
그렇다면 마일스는 왜 그토록 메를로를 증오했을까? 사실 그 혐오는 미각적인 이유라기보다 사회적인 스노비즘(Snobbism)에 가깝다.
당시 미국 시장에서 메를로는 '가장 대중적이고 마시기 쉬운 와인'의 대명사였다. 와인에 대해 결벽증적인 자부심을 가진 마일스에게 메를로는 개성 없는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보통 사람들'의 저급한 취향이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전처가 메를로를 좋아했기에 그 기억을 지우려 했다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의 결핍을 '남들과 다른 취향'으로 포장하려 했던 심리에 있었다. 반면, 재배하기 까다롭고 껍질이 얇아 상처받기 쉬운 '피노 누아'에는 예민하고 사회 부적응적인 자기 자신을 투영해 과도하게 몰입했다.
우리가 "나는 이 와인이 싫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말 혀의 판단일까? 아니면 그 와인에 덧씌워진 기억, 편견, 혹은 남들의 시선 때문일까? 마일스는 자신의 감정적 결핍을 '고상한 취향'인 척 포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3. 햄버거와 종이컵: 우아한 거짓말이 벗겨지는 순간
영화의 엔딩 신. 최고급 와인잔도, 우아한 디캔팅도 없다. 햄버거 가게의 플라스틱 테이블 위, 1회용 종이컵에 담긴 수백만 원짜리 슈발 블랑.
그는 이 와인을 평생의 보물처럼 모셨지만, 여기에 이 영화 최고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슈발 블랑은 메를로가 절반 가까이 섞인 와인이다. "메를로 따윈 절대 안 마신다"던 그가 정작 인생 최고의 순간을 위해 아껴둔 와인은, 그가 그토록 멸시하던 메를로 베이스였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영화 제작진은 이 장면을 위해 여러 유명 샤또에 촬영 허가를 요청했지만, "우리 귀한 와인이 싸구려 햄버거와 종이컵에 담기는 꼴은 못 본다"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슈발 블랑이 선택되었고, 덕분에 마일스의 모순(메를로 혐오자면서 메를로 와인을 숭배함)은 더욱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일스가 그토록 혐오하던 메를로(샤또 슈발 블랑)를 편견 없이 가장 맛있게 마신 순간은, '와인은 예술'이라는 모든 허세와 껍데기를 내려놓고 싸구려 햄버거를 베어 물었을 때였다.
와인의 본질은 무엇일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라벨인가, 아니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인가?
영화 <사이드웨이>는 1,000달러짜리 코미디를 통해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것은 와인인가, 아니면 이미지인가?"
4. 사이드웨이(Sideways): 영화의 끝에서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구체적인 서사로 다시 돌아온다.
<사이드웨이>는 와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인생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무엇을 마시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준으로 그 선택을 했느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샛길(Sideways)’이라는 구조 속에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샛길’은 결코 좋은 선택들이 아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판단으로, 혹은 친구의 선택에 끌려 계획 없이 샛길로 들어섰고, 그때마다 사건사고와 실패를 겪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샛길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선택의 결과였고, 결과 역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샛길은 다르다.
그 길이 더 나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회피나 충동이 아니라, 스스로 방향을 정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샛길들과는 구분된다.
와인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명한 레이블, 높은 점수,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스타일을 따라가다 보면 시행착오는 필연이다. 여러 번 실패하고 나서야, 남들이 정한 기준보다 자신의 취향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의 뒤에서 다루는 저개입 자연주의 와인 역시 그런 선택지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맞는 해답은 아니고, 항상 성공적이지도 않지만 이미 만들어진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자기 판단으로 들어선 샛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점에서 영화 <사이드웨이>의 마지막 장면과 닮아 있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