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이 낳은 괴물
핑크는 새로운 블랙이다
여름날 한강 공원의 돗자리 촌이나 청담동의 테라스 카페를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술이 있다. 바로 투명한 병에 담긴 분홍빛 액체, 로제 와인(Rosé Wine)이다.
과거에 "레드도 아니고 화이트도 아닌 어정쩡한 술" 취급을 받던 이 와인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21세기 와인 시장의 가장 강력한 '패션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사람들은 로제 와인의 '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분위기(Vibe)'를 이야기한다. 수영장, 햇살, 그리고 핑크빛 와인 한 잔. 이것은 완벽한 인스타그램 게시물이다.
와인 마케터들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들은 로제 와인을 미식의 영역에서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이제 로제는 술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트렌디하고 여유로운 사람이다'를 증명하는 액세서리가 되었다.
1. 미라발의 역설: 디자인 학교를 갓 졸업한 물?
이 '비주얼 마케팅'의 정점에는 미라발(Miraval)이 있다.
할리우드 슈퍼스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한,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프로방스 로제 와인이다. 예쁜 병 모양, 완벽한 연어색, 그리고 셀럽의 후광까지. 미라발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냉정하다. WSET 디플로마를 보유한 와인 교육자이자 유튜버 아냐 가리볼디(Anya Gariboldi)는 미라발을 두고 이렇게 독설을 날렸다.
"병은 완벽하고 색깔도 아름답다. 하지만 맛은? 마치 '디자인 학교를 갓 졸업한 듯 겉만 번지르르한 딸기맛 물(Strawberry water)' 같다. 기술적인 결함은 없지만 마음에 울림이 없다. 이것은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와인이지, 기억에 남는 와인이 아니다."
이것이 현대 상업용 로제 와인의 현주소다.
소비자들은 "색이 연할수록 고급이다"라는 편견에 갇혀 있고, 생산자들은 그 니즈를 맞추기 위해 포도의 개성을 지우고 색을 뺀다. 그 결과 우리는 와인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표준화된 핑크색 음료'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2. 투명한 병의 역설: 예쁜 관(Coffin)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병(Bottle)'에 있다.
로제 와인의 생명은 '색깔'이다. 그래서 생산자들은 그 예쁜 색을 보여주기 위해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초록색이나 갈색 병을 버리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병(Clear Glass)'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것은 와인에게 '투명한 관'이나 다름없다.
와인은 빛(자외선 및 가시광선)에 극도로 취약하다. 투명한 병에 담긴 와인이 마트 진열대의 형광등이나 야외의 햇살에 노출되면, 불과 수 시간 만에 '빛 산화(Light Strike)' 현상이 발생한다. 와인 속 아미노산이 빛과 반응해 'DMDS(디메틸 디설파이드)' 같은 황화합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 나는 냄새는 끔찍하다. 젖은 개 냄새, 삶은 양배추 냄새, 썩은 양파 냄새.
생산자들은 이 위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갈색 병에 담으면 소비자가 안 집어가니까."
그들은 와인의 '품질(보존)'보다 소비자의 '시각적 욕망'을 선택했다. 당신이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기 위해 산 그 예쁜 로제 와인은, 사실 이미 화학적으로 병들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3. 예외는 있다: 힙스터들의 성배, '자연주의 로제'
그렇다면 모든 로제 와인이 '인스타용 설탕물'일까? 그건 아니다.
이 핑크빛 홍수 속에서도 진짜배기들은 존재한다. 특히 저개입 자연주의 씬에서 로제는 '상업성'이 아니라 '파격'의 상징이다.
대표적인 것이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에서 자란 프랭크 코넬리센(Frank Cornelissen)의 '수수카루(Susucaru)'다.
이 와인은 투명하고 예쁜 핑크가 아니다. 탁하고 진한 수박색에 가깝다. 맛도 밍밍하지 않다. 화산토의 미네랄과 펑키한 산미가 폭발한다. 전 세계 힙스터들이 이 와인을 구하기 위해 웃돈을 얹어준다.
프랑스 타벨(Tavel) 지역의 전설 에릭 피퍼링(Eric Pfifferling)이 만드는 랑글로레(L'Anglore)도 있다.
그는 "로제는 가벼운 술"이라는 통념을 깨고, 레드 와인처럼 진하고 복합적인 로제를 만든다. 그의 와인은 수년씩 숙성이 가능하며, 블라인드로 마시면 고급 레드 와인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이들은 말한다.
"색깔을 마시지 말고, 에너지를 마시자."
진짜 좋은 로제 와인은 투명한 병에 담긴 예쁜 액세서리가 아니라, 흙냄새와 효모가 살아 숨 쉬는 '농부의 술'이다.
4. 결론: 마시자, 하지만 속지는 말자
물론 더운 여름날, 얼음 버킷에 담긴 시원한 로제 와인 한 잔이 주는 쾌감은 부정할 수 없다. 낭만은 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마트에서 집어 드는 그 대량 생산된 핑크빛 액체가 고도의 양조 철학이라기보다는, 철저히 기획된 '패션 상품'에 가깝다는 사실은 인지해야 한다.
즐기되, 숭배하지는 말자.
그리고 기왕 마실 거라면, 남들이 다 마시는 '예쁜 물' 말고, 수수카루처럼 탁하고 거친 '진짜들의 저개입 자연주의 로제'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 인스타그램 필터로는 담을 수 없는 진짜 맛의 세계가 있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