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맛의 달인> 검증기
음식 만화의 바이블 <맛의 달인(Oishinbo)>의 <양식당의 고뇌> 편에는 굴과 와인의 궁합을 다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생굴을 먹으려는 주인공 야마오카가 "생굴과 어울리는 와인은 없고, 사케가 어울린다"며 셰프를 상대로 도발적인 발언을 던지는 장면이다.
결과는 주인공의 판정승.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와인보다 곡주인 사케가 굴에 더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연 그럴까? 교과서처럼 내려오는 "굴엔 샤블리"라는 공식이, 만화적 상상력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1. 서해와 남해: 한국 굴과 기본급 샤블리의 대면
만화책 내용만 믿을 수 없어 직접 실험해 보기로 했다. 굴은 알이 작고 풍미가 진한 서해안 굴과, 씨알이 굵고 크리미한 남해안 굴을 모두 준비했다.
대항마로는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1등급이 아닌,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본급(Village) 샤블리와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 샴페인을 준비했다. 그리고 만화의 주장대로 비교군인 사케를 곁들였다.
2. 마리아주(결혼)는 아니지만, 썸 정도는 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만화처럼 "도저히 못 먹겠다"거나 입안이 엉망진창이 되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괜찮았다. 추운 겨울, 차갑게 칠링 된 산도 높은 샤블리를 신선한 굴에 곁들이는 건 꽤 즐길만한 미식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사케와 번갈아 마시는 순간, 와인의 약점이 드러났다. 사케는 굴의 비릿함을 깔끔하게 씻어내고 감칠맛을 올려준 반면, 와인은 목 넘김 끝자락에 미세한 금속성 비린내를 남겼다.
분명 "못 마실 조합"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완벽한 '마리아주(Marriage, 결혼)'라기보다는, 서로의 단점을 적당히 참아주는 '동거'에 가까웠다.
3. 범인은 '유기산염'인가 '철분'인가
만화 <맛의 달인>에서는 그 원인을 와인 속의 유기산(주석산, 사과산 등)이 칼슘 등 미네랄과 결합해 만든 '유기산염(Organic acid salt)'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유기산염이 어패류의 비린 맛을 자극한다는 논리다.
현대 과학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결정적인 용의자를 지목했다. 바로 철분(Iron, Fe²⁺)이다. 일본 메르시앙(Mercian)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와인 속 철분은 해산물의 불포화지방산 산화를 폭발적으로 촉진해 '헵타디에날(Heptadienal)' 같은 비린내 물질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레드 와인도 아니고, 껍질을 벗겨 만든 화이트 와인에 무슨 철분이 있냐"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 와인은 레드 와인보다 철분 함량이 적다. 하지만 '적다'는 것이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레드 와인: 철분 함량이 높아 해산물과 최악의 상성이다.
화이트 와인: 토양과 양조 과정에서 유래한 미량의 철분(약 1~5mg/L)이 존재한다. 문제는 인간의 혀가 이 미량의 철분이 만들어내는 비린내에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사케: 사케 양조용 물은 철분이 거의 '0'에 가까워야 한다(0.02ppm 이하). 철분이 있으면 술 색이 변하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제거한다. 그래서 사케는 과학적으로 비린내를 유발하지 않는다.
즉, 샤블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포도라는 과일로 만든 술의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4. 한국 굴과 프랑스 굴의 차이
그렇다면 왜 서양인들은 굴과 샤블리를 먹어왔을까? 그들의 혀가 무뎌서가 아니라, 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주로 먹던 '유럽 평굴(Belon)'은 살집이 적고 요오드 향과 금속성 맛이 강하다. 굴 자체가 이미 떫고 강하기 때문에, 샤블리의 날카로운 산도가 레몬즙처럼 그 맛을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우리가 먹는 남해안의 굴(참굴, Pacific Oyster)은 살집이 두툼하고, 지방과 글리코겐이 풍부해 우유처럼 고소한 맛이 난다. 이 풍부한 지방질은 와인의 미세한 철분과 만나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샤블리를 마시며 느꼈던 그 묘한 쇠 맛은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5. 우리는 마케팅에 가스라이팅 당했다
사실 "굴에는 샤블리"라는 공식은 미각의 영역이라기보다 역사와 마케팅의 영역이다.
냉장 기술이 없던 19세기, 파리나 런던의 내륙 귀족들이 신선한 생굴을 먹는다는 건 엄청난 부의 상징이었다. 이때 굴의 비린내를 잡고 살균을 하기 위해 레몬이 필요했는데, 당시 레몬 역시 비싼 수입품이었다.
그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산도가 쨍하고(레몬 대용), 파리 근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샤블리였다. 게다가 "키메리지안 토양(굴 화석)에서 자랐으니 굴과 어울린다"는 그럴싸한 스토리텔링은 호사가들의 지적 허영심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결국 우리는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과시적 소비' 패턴을, 21세기 한국에서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굴의 특성이나 과학적 성분은 무시한 채, "이게 교양 있는 미식이야"라고 뇌를 속이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굴을 먹을 때 샤블리는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최고의 선택'도 아니다. 겨울철 기분을 내기 위해 샤블리를 마시는 건 좋지만, 완벽한 미식을 원한다면 사케가 과학적으로 더 우위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