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엔 레드, 생선엔 화이트?
색깔론에 갇힌 식탁
레스토랑에 가면 흔히 보는 풍경이 있다. 스테이크를 시킨 손님은 메뉴판의 레드 와인 섹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해산물 파스타를 시킨 손님은 화이트 와인 섹션에서만 고민한다. 소믈리에나 직원이 와서 묻는다. "고기를 주문하셨으니 묵직한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공식을 '마리아주(결혼)'의 십계명처럼 배웠다. "육류에는 레드, 어류에는 화이트."
이것은 1초 만에 메뉴를 고를 수 있게 해주는 편리한 공식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미각을 가두는 가장 강력한 감옥이다.
미국 최초의 마스터 오브 와인(MW)이자 '맛의 반란자'로 불리는 팀 하니(Tim Hanni)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음식과 와인의 '완벽한 페어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와인을 더 어렵게 만들어 비싸게 팔려는 마케팅의 허상일 뿐이다. 당신이 즐겁다면, 스테이크에 달콤한 화이트 진판델을 마셔도 그게 정답이다."
그의 말처럼 페어링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오답'은 존재한다.
취향은 자유지만, 입안에서 불쾌한 쓴맛을 폭발시키는 '화학적 충돌'까지 즐거움이라고 우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챕터는 그 '오답'을 피해 가면서, 마케팅이 주입한 색깔론을 깨부수는 가이드다.
1. 소고기와 샴페인, 금기인가 혁명인가?
미식가들 사이에서 스테이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종종 거론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샴페인(Champagne)'이나 묵직한 '오크 숙성 화이트'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완벽한 논리다.
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단백질과 지방이다. 특히 마블링이 좋은 소고기의 기름진 맛(Fat)을 씻어내고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데에는, 떫은 타닌(레드)만큼이나 '높은 산도(Acid)'와 '기포'가 탁월한 역할을 한다.
뉴욕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르 베르나르댕(Le Bernardin)'의 수석 소믈리에 알도 솜(Aldo Sohm) 역시 샴페인의 범용성을 강조한다.
"샴페인을 식전주로만 가두지 마라. 그것은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나 튀김 요리의 기름기를 씻어내는 최고의 클렌저(Cleanser)다."
잘 구운 등심 스테이크 한 점을 먹고, 차가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셔보자. 샴페인의 쨍한 산미가 고기의 느끼함을 칼로 베어내듯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이것은 레드의 타닌이 주는 묵직한 조화와는 또 다른, 경쾌하고 세련된 쾌감이다.
2. 참치 회와 피노 누아의 썸
반대도 마찬가지다. "생선엔 무조건 화이트"라는 말도 반만 맞다.
흰 살 생선(광어, 도미)에 레몬을 뿌려 먹을 때는 가벼운 화이트가 맞다. 하지만 기름기가 꽉 찬 참치 뱃살이나 연어, 혹은 간장 양념을 바른 장어구이라면?
이때는 화이트 와인의 가벼운 바디감이 생선의 기름기에 밀려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오히려 타닌이 적고 산미가 좋은 '피노 누아(Pinot Noir)'나 가벼운 '가메(Gamay)' 같은 레드 와인이 훨씬 훌륭한 파트너가 된다.
붉은 살 생선의 철분 뉘앙스와 피노 누아의 흙 내음은 묘하게 닮아 있다. 간장 베이스의 소스라면 더더욱 레드 와인과 찰떡궁합이다.
결국 페어링의 핵심은 '고기냐 생선이냐'가 아니라, '무거우냐 가벼우냐(Body)', '기름지냐 담백하냐(Texture)'의 싸움이다.
3. 한국 전문가들의 조언: "김치에 레드 와인은 최악이다"
앞서 "무엇을 마시든 자유"라고 했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특히 우리 식탁(한식)에서 '고기엔 레드' 공식을 맹신하면 낭패를 보기 쉽다.
삼겹살을 먹을 때 우리는 고기만 먹지 않는다. 김치를 굽고, 파무침을 곁들이고, 쌈장에 찍어 먹는다.
이때 묵직한 레드 와인(카베르네 소비뇽 등)을 마시면 어떻게 될까?
와인의 타닌(Tannin)이 고춧가루의 캡사이신(매운맛)과 충돌하여 입안에서 묘한 반응을 일으킨다. 매운맛은 더욱 자극적으로 증폭되고, 와인의 과실 향은 사라진 채 쓴맛이나 금속성의 뉘앙스만 남기 쉽다. 물론 강한 자극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미식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밸런스의 붕괴'에 가깝다.
국내 1호 와인 박사 이재술 소믈리에는 한식과의 페어링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양념이 강한 한식, 특히 맵고 짠 음식에는 타닌이 많은 레드 와인보다는 산미가 좋고 잔당감이 있는 화이트나 스파클링이 훨씬 잘 어울린다. 매운맛을 중화시키고 입안을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즉, 갈비찜이나 불고기처럼 간장 베이스에 달큰한 고기 요리에는 레드 와인이 어울리지만, 삼겹살에 김치를 곁들이거나 제육볶음을 먹을 때는 차라리 차가운 리슬링이나 샴페인이 정답에 가깝다. 소주가 왜 한식과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은 '알코올의 단맛'과 '차가운 온도' 덕분이다.
4. 떡볶이와 리슬링: 당신만의 공식을 쓰자
진정한 고수는 공식을 외우지 않고 원리를 이해한다.
위의 표를 보자. "매운맛(Spicy)은 단맛(Sweet)을 필요로 한다."
이 원리만 알면 한국인의 소울 푸드인 떡볶이, 닭발의 최고의 파트너는 쿨피스가 아니라 '리슬링(Riesling)'이나 '모스카토(Moscato)'라는 답이 나온다.
소금기 가득한 굴(Salt)에는 짠맛을 중화시키는 산도 높은 샴페인(Acid)이 맞고, 느끼한 튀김(Fat)에는 그 기름을 씻어줄 스파클링이나 타닌 있는 레드가 맞다.
라벨의 색깔이나 재료의 종류에 얽매이지 말자.
치킨에 샴페인을 마시고, 삼겹살에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것. 그것이 마케터가 쳐놓은 결계를 깨고 미식의 해방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Special Note] 당신의 식탁을 설계한 그림자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도대체 누가 전 세계인에게 "고기엔 레드, 생선엔 화이트"라는 공식을 이토록 강력하게 각인시켰을까?
이 거대한 흐름의 배후에는 와인 대국들의 '수출 전략'이 숨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농식품 진흥공사 '소펙사(SOPEXA)'와 같은 국가 마케팅 기구들이다. 20세기 중반, 와인 불모지였던 미국과 아시아 시장을 뚫기 위해 그들은 고도의 전략을 세웠다. 낯선 와인 문화를 빠르게 이식하려면, 복잡한 미식의 원리보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공식'을 전파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르도(레드)와 루아르(화이트) 등 각 지역의 식문화를 묶어 "이것이 프랑스의 정답이다"라는 식으로 홍보했다. 즉, 유럽의 '지역적 관습'이 마케팅을 타고 전 세계의 '절대적 규칙'으로 둔갑한 것이다.
또한, 와인 교육의 표준을 만든 영국의 WSET나 마스터 소믈리에 협회(CMS) 역시 이 공식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했다. 전 세계 수만 명의 소믈리에를 배출하고 평가하려면, 채점 가능한 '표준 정답'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당신이 공식을 어기고 멋대로 마시는 건 무식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과 시스템이 주입한 '상업적 매트릭스'에서 탈출해, 진짜 미각을 찾아가는 해방의 몸짓이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