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어기고 전설이 되다
1. 등급의 역설: 테이블 와인이 수십만 원, DOCG가 2만 원?
와인 세계에는 절대적인 계급이 존재한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피라미드식 등급 체계에 목숨을 건다. 이탈리아의 경우, 맨 아래는 '테이블 와인(VdT)', 그 위는 '지역 와인(IGT)', 최상급은 '보증된 원산지 와인(DOCG)'이다. 상식적으로 DOCG가 가장 비싸고 맛있어야 한다.
하지만 1970년대 토스카나에서 이 상식이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너는 족보도 없는 싸구려 테이블 와인(Vino da Tavola)이야"라고 낙인찍은 와인이, 정부가 보증하는 최고 등급(DOCG) 와인보다 수십 배 비싼 가격에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건방진 '규정외(法外) 와인'들에게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는 맛이 없는데도 법만 지켜서 등급을 받은 '관료주의 와인'들에 대한 시장의 조롱이자, 통쾌한 반란이었다.
2. 키안티의 몰락: "레드 와인에 물을 타라?"
이 반란의 배경에는 현명하지 못한 행정 관료들과 낡은 법이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와인법(DOC)은 키안티(Chianti)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레시피를 강요했다.
"레드 와인에 의무적으로 청포도(화이트 품종)를 10~30% 섞어라."
과거 '리카솔리 남작'이 만든 레시피를 교조적으로 해석한 탓인데, 사실은 청포도 농가들의 표를 의식해 재고 처리를 법으로 강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붉고 진해야 할 레드 와인은 묽고 산미만 튀었으며, 10년도 못 가서 시어빠진 식초가 되었다. 법을 잘 지킬수록 와인은 맛이 없어지는 아이러니였다. (다행히 슈퍼 투스칸의 반란으로 정신을 차린 지금의 키안티 클라시코는 청포도 사용을 전면 금지했지만, 당시엔 이 법이 족쇄였다.)
3. 반역의 시작: 사시카이아와 사대주의
이때, 법 따위는 무시하고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나선 귀족이 있었다. 마리오 인치자 델라 로케타(Mario Incisa della Rocchetta) 후작이다.
그는 토스카나의 전통 품종인 산지오베제 대신, 프랑스 보르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었다. 그것도 토스카나 사람들이 "돌이 많아 농사 못 짓는 땅"이라며 버려둔 볼게리(Bolgheri) 해안가에! 게다가 이탈리아의 자존심인 대형 슬로베니아 오크통 대신, 프랑스산 바리크(Barrique, 소형 오크통)를 썼다.
이탈리아 관료들이 보기에 이것은 '반역'이자 지독한 '프랑스 사대주의'였다. 당연히 와인법은 그에게 어떤 등급도 주지 않았다. 그의 와인 '사시카이아(Sassicaia)'는 법적으로 가장 천한 등급인 '비노 다 타볼라(테이블 와인)'라는 딱지를 달고 출시되었다.
하지만 1978년, 런던 디캔터 매거진 주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사건이 터졌다. 이 '이탈리아산 테이블 와인'이 당대 최고의 프랑스 그랑 크뤼 와인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전 세계 평론가들은 경악했고, 시장은 열광했다.
4. 티냐넬로의 가세: 자본의 역습
사시카이아가 문을 열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와인의 대부 피에로 안티노리(Piero Antinori)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1971년, 수백 년간 지켜온 가문의 키안티 레시피를 찢어버리고, 법적으로 강제하던 청포도를 뺀 뒤 프랑스 품종을 섞은 '티냐넬로(Tignanello)' 첫 빈티지를 내놓았다.
안티노리는 알았다. "법을 어겨서 등급이 떨어지더라도, 맛이 좋으면 소비자는 지갑을 연다"는 자본주의의 진리를.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티냐넬로 역시 '테이블 와인' 등급을 받았지만, 가격은 정부 공인 DOCG 와인들을 비웃듯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것은 '관료가 만든 법(DOC)' 위에 '시장이 검증한 브랜드(Brand)'가 존재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5. 왕관 없는 제왕들: 슈퍼 투스칸 리스트
그렇다면 법을 어기고 전설이 된 이 반역자들은 누구인가? 이탈리아 정부가 주는 왕관(DOCG)을 거부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IGT 등급의 최고급 와인들'을 소개한다.
[Part 1. 클래식 4대장: 보르도 블렌딩의 정점]
가장 유명하고 상징적인 와인들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축으로 한다.
사시카이아 (Sassicaia): 모든 것의 시작. 카베르네 소비뇽 중심의 보르도 스타일. 유일하게 나중에 정부가 '볼게리 사시카이아 DOC'라는 단독 등급을 헌정하며 항복했다.
티냐넬로 (Tignanello): 이탈리아의 피(산지오베제)와 프랑스의 뼈대(카베르네)를 섞은 혼혈의 미학. 한국에선 삼성 이건희 회장이 좋아했던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오르넬라이아 (Ornellaia): 사시카이아의 라이벌. 좀 더 화려하고 모던한 맛을 자랑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뉘앙스가 섞인 세련됨이 특징이다.
솔라이아 (Solaia): 티냐넬로의 형제이자 상위 호환. 티냐넬로가 산지오베제 중심이라면, 솔라이아는 카베르네 소비뇽 중심이라 더 묵직하고 비싸다.
[Part 2. 컬트 메를로(Merlot): 마세토와 아이들]
진정한 고수들이 찾는 와인이다. 오직 메를로 품종 100%로 승부하며, 희소성과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마세토 (Masseto): 이탈리아의 '페트뤼스'. 슈퍼 투스칸 중에서도 가장 비싸고 구하기 힘든 '끝판왕'이다. 오르넬라이아 와이너리에서 생산된다.
레디가피 (Redigaffi): 투아 리타(Tua Rita) 와이너리의 역작. 2000년 빈티지로 이탈리아 메를로 와인 사상 최초의 로버트 파커 100점을 받아낸 전설적인 와인이다.
메소리오 (Messorio): 볼게리의 명가 레 마키올레(Le Macchiole)가 만든다. 극소량만 생산되며, 메를로 특유의 부드러움에 강철 같은 구조감을 더했다는 평을 받는다.
라파리타 (L’Apparita): 키안티의 명가 카스텔로 디 아마(Castello di Ama)가 만든다. 토스카나에서 최초로 시도된 100% 메를로 와인으로,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갈라트로나 (Galatrona): 페트로올로(Petrolo) 와이너리의 간판스타. 발다르노(Val d'Arno) 지역의 숨겨진 보석으로, 마세토의 라이벌이라고도 불린다.
6. 항복 선언: 법이 시장을 따라가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이탈리아 정부였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이탈리아 최고 등급인 DOCG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등급 외 와인인 슈퍼 투스칸만 찾아대니 국가적 망신이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법을 뜯어고쳤다. 1992년, 테이블 와인과 DOC 사이에 'IGT(지역 특산 와인)'라는 등급을 신설해 이 반역자들을 제도권으로 모셔왔다. 또한 키안티 클라시코 규정에서 청포도 의무 사용 조항을 삭제하고, 오히려 '청포도 사용 금지'(2006년)로 법을 개정했다.
이는 와인 역사상 가장 통쾌한 장면 중 하나다. "법을 어겨야 전설이 된다"는 힙스터들의 반란이, 결국 국가의 법조차 바꾸게 만든 것이다.
7. 결론: 위대한 타협, 혹은 자본의 승리
슈퍼 투스칸의 반란은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와인의 세계에서 진정한 권력은 법규나 등급 따위의 '완장'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소비자의 혀를 설득하는 '압도적인 품질'과, 낡은 관습을 깨부술 수 있는 '자본의 배짱'에서 나온다.
그러니 이탈리아 와인을 마실 때, 병목에 붙은 인증 딱지(DOCG)에 집착하지 말자. 그것은 단지 많은 세금을 냈다는 영수증일 뿐이다. 대신 그 안에 담긴 생산자의 배짱을 보자. 때로는 법을 어긴 '나쁜 놈'들이 당신의 미각을 구원한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