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들을 속여라
수년 전, 귀한 올드 빈티지 부르고뉴 와인들을 엄청나게 싸게 마실 수 있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와인을 오픈했는데 웬걸, 그 와인들은 거의 다 가짜였다. 맛을 보니 딱 저렴한 이탈리아 와인 맛이었다. 와인을 준비한 모임의 호스트에게 출처를 물으니 '지인을 통한 이탈리아 직구'라고 했다. 물론 참석자 전원 회비는 환불받았지만, 씁쓸한 경험이었다.
이런 일이 비단 한국의 작은 모임에서만 일어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고급 주택 주방. 이곳에는 요리 도구 대신 접착제와 잉크, 그리고 수십 종류의 도장들이 널려 있다. 싱크대 개수대에는 빈 병들이 나뒹굴고, 식탁 위에는 싸구려 캘리포니아 와인과 정체불명의 오래된 보르도 와인들이 뒤섞여 있다. 비밀 연구소라도 되는 걸까? 아니다. 이곳은 전 세계 와인 경매 시장을 주무른 희대의 사기꾼, '루디 쿠르니아완(Rudy Kurniawan)'의 작업실이다.
그는 이 주방에서 제조한 폭탄주에 프랑스 최고급 와인 '로마네 꽁띠'의 라벨을 붙여 팔았다. 한 병에 수천만 원, 비싼 건 수억 원을 호가했다. 기가 막힌 건, 산전수전 다 겪은 와인 평론가들과 억만장자 컬렉터들이 이 가짜 와인을 마시고는 "역시 전설적인 빈티지다", "신의 물방울이 따로 없다"며 찬사를 쏟아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와인 업계가 애써 외면해온 가장 불편한 진실을 들춰낸다. 인간의 미각이란 존재가 가격표와 브랜드 앞에서 얼마나 비굴해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마시는 게 진짜 와인인지, 아니면 '돈'과 '허영'인지 말이다.
1. 닥터 꽁띠(Dr. Conti)의 주방 레시피
인도네시아 출신의 루디 쿠르니아완은 200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해 구하기 힘든 올드 빈티지 와인들을 경매장에 쏟아냈다. 사람들은 그를 '닥터 꽁띠'라 불렀다. 부르고뉴의 전설, 로마네 꽁띠를 마법처럼 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마법의 출처는 프랑스 포도밭이 아니라 그의 집 부엌이었다.
FBI 수사로 밝혀진 그의 제조법은 '블렌딩'의 미학이었다. 그는 단순히 싸구려 와인을 병에 담는 수준이 아니었다. 진짜 올드 빈티지의 맛을 흉내 내기 위해, 과실 맛이 살아있는 평범한 캘리포니아 피노 누아를 베이스로 깔았다. 여기에 '세월의 맛'을 입히기 위해 산화되어 시큼해지거나 쿰쿰한 냄새가 나는 저렴한 보르도 올드 빈티지 와인을 소량 섞었다. 이렇게 하면 갓 만든 와인에서 나는 신선한 느낌이 사라지고, 그럴싸한 '묵은 풍미'가 만들어진다.
내용물이 준비되면 포장이 이어진다. 진짜 빈 병을 수집해 와인을 채우고, 집 프린터로 정교하게 인쇄한 라벨을 붙인 뒤 싱크대에서 수세미로 문질러 낡아 보이게 만들었다. 코르크에는 위조 도장을 파서 찍었다. 이 조악한 가내수공업 와인이 경매장에선 수천만 원짜리 보물로 둔갑했다. 루디는 이 수법으로 약 1,5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왜 최고의 미각들은 가짜에 환호했나?
여기가 이 장의 가장 미스터리한 지점이다. 피해자들은 와인 초보자가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소믈리에, 그리고 '부르고뉴의 신'이라 불리는 까다로운 평론가들조차 루디가 건넨 잔 앞에서 "완벽한 상태(Pristine Condition)"라며 감탄했다. 그들은 바보였을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루디의 와인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50년 된 와인은 산화되어 시큼하거나 밍밍한 경우가 많다. 이를 '바틀 베리에이션(병마다 상태가 다른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루디는 여기에 싱싱한 캘리포니아 와인을 섞었다.
전문가가 이 와인을 마시면 뇌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오래된 와인에서 이렇게 생생한 과일 향이 난다고? 이건 가짜야!"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와! 얼마나 관리를 잘했으면 50년 된 와인이 이렇게 젊을 수 있지? 이건 기적이야!"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루디는 전문가들이 '완벽한 보관 상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찔렀다.
또한 여기엔 '침묵의 카르텔'도 작동했다. 루디는 유명 평론가들을 자신의 화려한 파티에 초대해 수천만 원짜리 와인을 공짜로 대접했다. 공짜 술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거 가짜 같은데?"라고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강심장은 없었다. 의심은 무례함이 되고, 찬사는 매너가 되는 파티장이었으니까.
3. 또 하나의 전설: 토머스 제퍼슨의 와인
와인 위조의 역사는 루디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1980년대, 독일의 수집가 하디 로덴스톡(Hardy Rodenstock)은 루디보다 더 대담한 사기극을 벌였다. 그는 파리의 한 지하 창고 벽 뒤에서 1787년산 '샤또 라피트'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병에는 'Th.J'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는 이것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것이라고 홍보했다.
이 와인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억 7천만 원에 낙찰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낙찰자는 포브스 그룹의 회장 맬컴 포브스였다. 하지만 훗날 억만장자 빌 코크(Bill Koch)가 구매한 병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병에 새겨진 이니셜은 18세기 도구가 아니라, 현대의 고속 전동 드릴(치과용 도구)로 파낸 것이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와인 자체도 1960년대 이후의 것으로 밝혀졌다.
하디 로덴스톡 사건은 맛보다는 '스토리'와 '역사'를 파는 사기였다. 사람들은 와인 맛을 본 게 아니라, "미국 건국의 아버지가 마시던 술"이라는 환상을 마시기 위해 거액을 지불했다.
4. 그를 잡은 건 '혀'가 아니라 '데이터'였다
다시 루디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이 희대의 사기꾼을 잡은 건 소믈리에의 절대 미각이 아니었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자, 로랑 퐁소(Laurent Ponsot)의 팩트 체크였다.
루디는 경매에 '1945년산 클로 생 드니(Clos St. Denis)'를 내놓았다. 하지만 퐁소 가문은 1982년부터 그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빈티지를 위조해서 내놓은 것이다. 맛이 아니라 행정 기록과 역사가 덜미를 잡았다. 만약 루디가 연도를 1985년으로 적었다면? 아마 지금도 전 세계 부호들은 그의 가짜 와인을 마시며 행복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5. 사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디는 감옥에 갔지만, 위조 와인의 공장은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단속이 심한 프랑스를 피해 이탈리아나 주로 스위스의 보세 창고(Freeport)를 세탁소로 이용해 아시아로 넘긴다.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앞서 내가 겪은 사례처럼 알음알음 '직구'나 '지인 거래'를 통해 가짜 와인을 샀다는 피해는 가끔 들려온다.
와인 위조 시장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다. 라벨을 숭배하고, 가격이 곧 가치라고 믿는 우리의 허영심이 존재하는 한, 제2, 제3의 연금술사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싸구려 와인을 섞으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이 멍청한 놈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