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는 딸기가 없다
지인에게 직접 들은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 지인분이 프랑스 보르도 와인 투어를 갔다가, 5대 샤또 중 하나인 '샤또 라뚜르(Château Latour)'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곳의 와인은 묵직한 흙내음과 가죽 향, 그리고 가끔은 묘한 '야생의 냄새(Barnyard, 마굿간 향)'가 나기로 유명하다.
투어 도중 밭에서 쟁기질을 하던 말이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 장면을 목격한 지인분이 샤또 관계자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하! 라뚜르 특유의 그 구수한 향기가, 말이 밭에다 직접 거름을 줘서 나는 거였군요?"
그 말에 관계자는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고 한다. "Non! 절대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당신이 와인에서 맡는 그 '마굿간 냄새'는 말똥 냄새가 아니다.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브레타노마이세스(Brettanomyces)라는 효모의 흔적이거나, 환원적인 숙성 향일 뿐이다. 포도나무 뿌리는 말똥 냄새 분자를 빨아들여 포도알 속으로 배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뿌리는 생각보다 편식쟁이다.
우리는 와인에서 딸기, 제비꽃, 후추, 가죽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명심하자. 제대로 된 와인에는 포도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딸기 시럽도, 꽃잎도, 후추 가루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냄새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1. 뇌의 착각: 분자 공유 (Molecular Sharing)
신의 물방울 같은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와인을 마시고 "아아, 이것은 5월의 딸기밭!"이라며 환각(?)에 가까운 묘사를 한다. 과장이 심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포도즙이 발효되면서 알코올이 생길 때, 수백 가지의 휘발성 화합물이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 화합물의 분자 구조가 실제 과일이나 사물의 향 분자와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
딸기, 사과, 배 향: 주로 에스테르(Esters)라는 화합물이다. 발효 중 효모가 만들어낸다. 뇌는 이 분자를 감지하자마자 가장 익숙한 기억인 '딸기'를 소환한다. 와인엔 딸기가 없지만, 딸기 냄새 분자는 있는 셈이다.
장미, 제비꽃 향: 장미는 이탈리아의 네비올로(바롤로) 품종이나 게뷔르츠트라미너에서 나는 향으로 테르펜 계열 분자 때문이다. 제비꽃은 피노 누아에서 나는 우아한 꽃향기로 주로 베타-이오논 성분 때문이다.
피망, 풀 냄새: 소비뇽 블랑이나, 덜 익은 카베르네 소비뇽에서 나는 풋내다. 메톡시피라진이라는 화합물 때문인데, 실제로 피망에 들어있는 성분과 똑같다.
즉, 와인 향은 뇌가 화학 분자를 해석하며 벌이는 고도의 연상 게임인 셈이다.
2. 당신의 코가 고장 난 게 아니다 (유전자의 장난)
호주 쉬라즈(Shiraz)의 '통후추 향'이나, 피노 누아의 '제비꽃 향'은 와인 교과서에 나오는 정석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아무리 킁킁거려도 "난 그냥 포도 술 냄새밖에 안 나는데?"라며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책하지 말자. 당신의 코는 정상이다. 문제는 유전자에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특정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는 '특정 후각 상실(Specific Anosmia)'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Case 1. 후추 향 (로툰돈): 와인의 매콤한 후추 향을 만드는 물질은 로툰돈이다. 놀랍게도 이 분자는 실제 검은 통후추의 향 분자와 화학 구조가 100% 동일하다. 그런데 연구 결과, 전 세계 인구의 약 20~25%는 유전적으로 이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한다. 남들이 후추라고 할 때 이들에겐 그저 맹물 냄새일 뿐이다.
Case 2. 제비꽃 향 (베타-이오논): "피노 누아에서 우아한 제비꽃 향기가 나네요." 소믈리에가 이렇게 말할 때 공감하지 못했다해도 당신이 비정상은 아니다. 제비꽃 향을 내는 베타-이오논 성분은 인구의 약 50%가 냄새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매우 둔감하다. 즉, 세상의 절반의 사람은 피노 누아의 꽃향기를 영원히 못 느낀 채 평생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군가 와인에서 당신이 못 맡는 향을 묘사하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다. 그저 속으로 저 사람은 나한테 없는 후각 수용체가 있나 보네 하고 생각하면 된다.
3. 아로마(Aroma)와 부케(Bouquet): 족보 정리
와인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향을 그냥 향이라 안 하고, 아로마와 부케로 구분해서 부른다. 어차피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출신 성분과 나이가 다르다.
1차 아로마 (Primary Aroma): 포도 품종 자체가 가진 본연의 향이다. DNA의 영역이다. 과일, 꽃, 허브 향, 그리고 앞서 말한 후추나 피망이 여기에 속한다.
2차 아로마 (Secondary Aroma): 발효 과정에서 효모와 인간이 입힌 향이다. 빵, 비스킷 같은 효모 냄새나 오크통의 바닐라, 정향(Clove), 그리고 토스티(Toasty)한 냄새가 해당된다.
[Tip] 뫼르소의 참기름 향: 고급 화이트 와인에서 진동하는 '볶은 깨'나 '참기름 향'도 포도에서 나는 향이 아니다. 유산 발효(MLF)와 리(Lees, 효모 찌꺼기) 숙성, 그리고 오크통의 토스티한 냄새가 절묘하게 섞여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향이다.
3차 아로마 (Tertiary Aroma) a.k.a 부케: 세월이 만든 향이다. 병 속에서 산소와 와인이 천천히 반응하며 생긴다. 가죽, 흙, 버섯, 낙엽, 트러플 같은 쿰쿰하고 복합적인 냄새다.
우리가 와 이 와인 아로마가 터지네라고 하면 주로 과일 향이 좋다는 뜻이고, 부케가 훌륭하네라고 하면 이 녀석 곱게 잘 늙었구나라는 뜻이다.
4. 블라인드 테이스팅: 신기(神技)가 아니라 통계와 훈련
TV에서 소믈리에가 와인 냄새만 킁킁 맡고 "음, 이건 1995년산 보르도 좌안의 마고 마을 와인이군요"라고 맞히는 걸 본 적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거나 쇼다. 아무리 숙련된 전문가라도 향만 맡아서는 절대 맞힐 수 없다. 맛도 봐야 한다.
그들은 화학적 단서를 수집하는 탐정(Detective)이자 통계학자들이다. 색이 옅고 가장자리가 벽돌색이면 오래된 와인이라 판단하고, 피망 냄새가 나면 보르도 품종일 확률을 90%로 잡는다. 여기에 산도가 높고 타닌이 빡빡하면 서늘한 해(Cool Vintage)에 생산된 와인이라 추론한다.
이 단서들을 조합해 교집합(소거법)을 찾아내는 과정은 꽤나 흥미진진하다. 수많은 단서를 조합해 운 좋게 빈티지까지 딱 맞혔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여기에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지독한 반복 훈련이다. 전문가들은 수천, 수만 병 이상의 와인을 마시며 맛의 데이터를 뇌에 저장해 둔 사람들이다. 마치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학습하듯 훈련을 수없이 반복한 결과다.
물론 그래도 틀린다. 유명한 와인 메이커조차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자기가 만든 와인을 못 알아보고 혹평을 쏟아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틀렸다고 좌절할 필요 없다. 애초에 인간의 후각은 시각 정보나 유전자 등에 의해 쉽게 조작되는 불완전한 기관인 데다, 우리는 그들처럼 수만 병을 마셔볼 시간도 돈도 없다. 어차피 우리는 프로처럼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와인을 분석하기 위해 마시고, 우리는 즐기기 위해 마시니까. 굳이 내 돈 내고 마시는 술자리에서 시험 보는 수험생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영화 <타짜> 속 인물인 '빨치산'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사장님, 블라인드는 재미로 하셔야 합니다."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