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권력자, 혹은 해방자
와인 역사상 단 한 명의 평론가가 전 세계 양조장의 제조 방식을 뜯어고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 Jr.). 변호사 출신의 이 미국인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유럽식 와인 비평을 혐오했다. 그는 "지하실의 곰팡이 냄새", "우아한 뉘앙스" 따위의 시적인 표현 대신,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어를 들고나왔다. 바로 숫자다.
1. 100점 만점의 민주주의: 그가 소비자에게 준 무기
파커를 비난하기 전에 인정해야 할 것은, 그가 '와인의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파커 이전의 와인 세계는 '족보'가 전부였다. 소비자는 샤또의 역사, 복잡한 등급, 빈티지 차트를 달달 외워야만 실패하지 않았다.
파커는 이 권위를 박살 냈다. "이름값 필요 없다. 내 입에 맛있으면 장땡이다."
그는 유명하지 않은 생산자라도 맛이 좋으면 95점을 줬고, 1등급 샤또라도 맛이 없으면 가차 없이 점수를 깎았다. 덕분에 와인 초보자들은 복잡한 불어 공부 대신, 직관적인 숫자 하나만 보고도 맛있는 와인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소비자의 해방이었다.
2. 큰 삼각형과 작은 삼각형: 90점의 딜레마
하지만 숫자는 오해를 낳았다. 마트에서 파는 3만 원짜리 와인도 90점이고, 50만 원짜리 그랑 크뤼도 90점일 때, 소비자는 묻는다. "그럼 둘이 동급인가?"
이 딜레마는 흔히 '삼각형의 논리'로 설명된다. 점수는 '절대적인 맛의 크기'가 아니라 '균형(Balance)의 완성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작은 삼각형: 저가 와인이지만 가격 대비 흠잡을 데 없이 균형이 잘 잡혔다면 정삼각형이 완성된다. 이것이 90점이다.
큰 삼각형: 고가 와인이 보여줄 수 있는 압도적인 깊이와 복합미를 가졌지만, 어딘가 밸런스가 무너졌다면(찌그러진 삼각형)? 그것 역시 90점일 수 있다.
즉, 점수는 그 와인이 가진 포텐셜 안에서 얼마나 완벽한 균형을 이뤘느냐의 지표일 뿐이다. 하지만 시장은 이 미묘한 '삼각형의 크기' 차이를 무시하고, 오직 '90점'이라는 숫자만 기억했다.
3 . 파커라이제이션: MSG 효모와 미셸 롤랑의 레시피
문제는 자본이 이 숫자를 악용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신대륙과 보르도의 많은 와인 메이커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Terroir)이 주는 맛을 와인에 담지 않았다. 대신 파커가 좋아하는 맛을 담기 시작했다. 이를 '파커라이제이션(Parkerization)'이라 부른다.
파커의 취향은 '미국식'이었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과일 맛이 잼처럼 진하며(Fruit bomb), 오크통 향이 강렬하고, 산도가 낮아 목 넘김이 부드러운 와인.
이 공식을 완성하기 위해 '플라잉 와인메이커' 미셸 롤랑(Michel Rolland) 같은 컨설턴트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들이 전파한 '고득점 레시피'는 늦은 수확과 새 오크통 사용,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다루었던 '배양 효모'의 사용이었다. 떼루아의 개성을 반영하는 토착 효모 대신, 파커가 좋아하는 진한 과일 향과 바닐라 뉘앙스를 확실하게 뿜어내는 '실험실 효모(MSG)'를 처방하는 것이 핵심 전략 중 하나였다.
결국 칠레 와인이나 보르도 와인이나 맛이 비슷해졌다. 개성은 거세되고, 점수 따기 좋은 '모범 답안' 와인들만 양산됐다.
4. 샤또 파비 2003: 두 교황의 전쟁과 자본의 승리
이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샤또 파비(Château Pavie) 2003 논쟁'이다. 2003년 유럽을 강타한 살인적인 폭염으로 포도 당도가 치솟았던 그해, 샤또 파비는 극도로 농축된 와인을 내놓았다. 이를 두고 두 거물이 충돌했다.
영국의 '여제' 젠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은 혹평을 쏟아냈다.
"이것은 보르도 와인이 아니다. 미국 시장을 노린 포트 와인(Port Wine)처럼 무겁고 과숙했다. 보르도의 우아함을 잃어버린 터무니없는(Ridiculous) 와인이다. 20점 만점에 12점."
반면 미국의 '황제' 로버트 파커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내 생애 최고의 와인 중 하나다. 압도적인 농축미와 관능적인 질감을 가졌다. 젠시스 로빈슨의 평가는 끔찍하며,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팩트인 양 말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96-100점(잠재적 만점)."
이것은 단순한 미각 차이가 아니었다. 영국의 전통적 미학(섬세함, 균형, 숙성 능력)과 미국의 자본주의적 미학(힘, 임팩트, 즉각적 쾌락)의 이념 전쟁이었다.
승자는 누구였을까? 명백한 파커의 승리, 아니 자본의 승리였다.
파비 2003은 가격이 폭등했고, 파커의 비호 아래 파비는 계속해서 진하고 무거운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 결과 2012년 생테밀리옹 등급 조정에서 샤또 파비는 최고의 영예인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 A(1er Grand Cru Classé A)'로 승격했다. 파커 포인트가 시장 가격을 올리고, 그 가격이 다시 등급(신분)을 상승시키는 완벽한 카르텔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 파커가 은퇴한 지금, 시장은 다시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을 찾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제 파비의 2000년대 빈티지를 두고 "시대착오적", "너무 무거워서 마시기 부담스럽다"고 평하기도 한다. 파커는 은퇴 전 2015년 재시음에서 파비 2003의 점수를 슬그머니 96점으로 내렸다. "완벽하다"며 전쟁까지 불사했던 그조차 세월 앞에선 과한 농축미가 부담스러웠던 걸까.
다만, 젠시스 로빈슨의 20점 체계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12점대부터 실질적인 평가가 시작되고, 16점(Distinguished), 19점('험딩어', Humdinger) 같은 모호한 용어들이 직관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5. 부르고뉴의 굴욕: 페블레(Faiveley) 사건과 퇴장
하지만 천하의 파커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었으니, 바로 '부르고뉴(Bourgogne)'다. 보르도 와인처럼 힘(Power)이 아니라 섬세함(Delicacy)이 생명인 피노 누아의 세계에서, 파커의 미국식 혀는 길을 잃었다.
결정타는 1993년 빈티지 '페블레(Faiveley)' 사건이었다. 파커는 도멘 페블레의 와인을 시음한 후 "맛이 갔다. 마치 썩은 나무 같다"며 혹평을 쏟아냈다. 이에 격분한 프랑수아 페블레는 파커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법정 공방 끝에 밝혀진 사실은 파커가 보관 상태가 엉망인 샘플을 마셨거나, 부르고뉴 특유의 환원취를 결함으로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파커는 "부르고뉴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이라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결국 그는 자존심을 구기고 부르고뉴 평가 담당자 자리를 내려놓았다. 이후 부르고뉴 평가는 피에르 로바니, 닐 마틴 같은 다른 전문가들에게 넘어갔다. '절대 권력자'가 자신의 미각적 한계를 인정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권력자는 떠났지만 룰은 남았다.
로버트 파커는 2019년 은퇴했다. 파커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최근에는 다시 섬세하고 산도가 높은 와인, 내추럴 와인 등이 인기를 끌며 '탈(脫) 파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숫자 놀음'의 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하다. 와인 샵에는 여전히 "RP 98", "JS 95" 같은 딱지가 붙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혀보다 남이 매겨준 숫자를 더 신뢰한다. 파커는 우리에게 '실패하지 않을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스스로 맛을 판단할 능력'을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나도 샤또 파비 2003을 마신 적이 있다. 내 점수는요? 100점 만점에 93점!
본 연재글은 향후 도서 출판을 목적으로 기획/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