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특별전을 다녀와서
'세한도' 특별전을 다녀와서
차를 매우 좋아한 김정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 선사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제주 지역에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왕가의 자손으로 남 부러 울 것 없이 살아가 던 추사의 인생이 한순간 고난의 삶으로 변한 땅이 제주였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머문 시간은 추사의 인품과 예술세계가 한층 원숙하고 깊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뛰어남에 취해 다른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던 강한 성품은 제주를 떠날 때 겸손하고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예술적으로는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되는 ‘세한도’를 남겼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마천십연(磨穿十硏) 즉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매진했던 추사. 19세기 이후 제주의 문화 · 예술 · 교육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추사 김정희.
추사는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심해지면서 김정희는 경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제주도의 낯선 환경과 초라한 생활로 김정희의 몸과 마음은 지쳐있었다. 8년 3개월이라는 세한의 시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남긴 작품과 편지들은 그의 유배생활을 잘 드러나는 자료로 남아있다. 특히 가족들과 주고받은 언간諺簡에는 처음 제주도에 도착해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차츰 적응해 나간 과정, 집안의 대소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면모, 유배지에서의 아내에 죽음과 손주의 탄생을 맞았을 때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은 한 가닥 모진 목숨뿐이다”
1849년 1월, 추사는 유배가 풀려 제주섬을 떠난다.
<세한도>는 추운 겨울에도 푸르른 송백松柏을 소재로, 시련 속에서도 신의를 굳게 지킨 변치 않는 마음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소중히 전해졌다. 2020년, 대를 이어 소장해 온 손창근 선생의 숭고한 기중으로 <세한도>는 우리 모두의 품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그 감동의 여운을 이어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와 제주”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세한도 두루마리 펼친 모습 특별전을 다녀온 후 김정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정희는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고, 이들 중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김정희와 함께 한 벗들이 있었다. 권돈인은 김정희가 속내를 털어놓는 평생지기였고, 초의선사는 김정희와 뜻을 같이하는 벗이었다. 이상적은 김정희를 김정희답게 지켜주었고, 허련은 김정희를 진심으로 따랐던 제자였다.
추사 김정희에게는 500여 개의 호가 있었다. 그중 ‘승설, 고다 노인, 다문’ 등 차와 관련된 호가 많다. 다음은 조선 제일의 차 마니아 추사 김정희가, 벗인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이다.
“... 차 시절은 아직 이른 게요? 아니면 따기 시작하였소? 몹시 기다리고 있다오. 햇차는 몇 근이나 따시었소? 남겨 두었다가 장차 내게 주시겠소? 우전차의 잎은 몇 근이나 따시었소? 언제 보내 주어 차에 대한 나의 욕심을 진정시켜 주시려오?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바란 다오.... 대사는 보고 싶지도 않고 대사의 편지 또한 보고 싶지 않소, 몽둥이 30방을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려….”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추사는 가장 절친한 벗에게 생떼 쓰는 것처럼 보이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차를 애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추사는 세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하여 6살에는 입춘첩을 써 붙일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이를 본 박제가가 어린 추사를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청나라의 대학자 옹방강 역시 추사를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 칭송하며 스승을 자처할 정도였다. 그의 나의 24세인 1809년 아버지 김노경과 중국 연경으로 갔다. 그곳에서 갖가지 종류의 중국 명차들을 맛보게 된 후 추사는 차를 즐기게 되었다. 차에 대한 대단한 상식을 갖게 되었다. 18세기만 해도 다도는 불가에서 스님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우리나라 다도 문화 3대 거성으로는 다산 정약용,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를 든다. 특히 정약용은 조선 초기의 거의 사라졌던 차 문화를 부흥시킨 우리 차의 중흥조로 통한다. 초의선사는 다산의 제자이다. 초의선사는 중국차밖에 몰랐던 양반들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로 조선 차를 발전시켰다. 초의의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선사의 차 예찬론자가 되어, 이를 널리 알렸다. 그러던 중 추사가 윤상도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 유배 오면서, 그의 다도 생활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추사가 유배할 당시인 1840년대에는 제주에서는 차를 구경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는 1900년 이후에 차가 재배되었다. 추사가 차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벗인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조르는 것뿐이었다. 초의선사가 유배지인 제주까지 추사를 찾아올 정도로 둘 사이의 우정은 각별했다. 차를 좋아하는 추사를 위해 초의선사를 비롯한 육지의 여러 지인들이 차를 보내왔다. 하지만 제주까지 오는 동안 상하기 일쑤였다. 결국 추사는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셔야 했다. 추사가 만든 차의 이름을 빈랑 잎 황차라 전한다. 추사가 차를 만들어 마셨다는 빈랑 잎은 열대 야자수다. 차 전문가들은 야자수와 흡사한 빈랑 잎은 처음에는 딱딱하나, 발효과정을 거치며 진한 찻물이 우러나고 향과 맛이 은은하고 달콤하면서 맑고 깨끗하다 한다.
김정희의 글씨는 본래 중국 고대의 비문 글씨와 옹방강의 글씨를 닮아 지나치게 기름졌으나, 유배 후에는 특정 글씨에 구속됨이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여러 번 변했는데 제주에서의 유배시절에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한다.
세한도 그림 뒤에는 줄을 쳐서 네모 칸을 만들고 굳세고 각진 글씨로 그림의 제작 배경을 썼다. 화면에 찍힌 인장 중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김정희와 이성적의 우정을 함축하고 있다. <세한도>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뜻을 그림과 글씨, 인장으로 표현한 최고의 문인화이다.
세한도 그림의 핵심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사의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소나무를 그리고 집을 그린 것을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뜻은 하나도 없었고 그 소나무와 집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뜻과 마음을 거기에 실어서 표현했다. 세한도를 보면서 무엇을 잘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성에 입각해서 보니까 안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서 울려 나오는 문자향 서권기(文子香 書卷氣)를 느낀다면 왜 그것이 국보고 천하의 명작이 되었는지 알 수가 있다.
제주 추사적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