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을 품다

26년 4월

by 양윤화


함덕해수욕장을 걷다 보면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의 결을 품은 공간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맑고 투명한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 너머에는 제주의 아픈 역사, 4·3의 흔적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이곳의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가볍지 않다. 바다의 색과 바람의 온도, 그리고 이 땅이 품어 온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감성이 되어 마음을 건드린다.


파도는 늘 같은 리듬으로 밀려오지만,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은 매번 다르다. 오늘의 바다는 유난히 깊고 넓어 보였다. 햇빛을 받은 수면 위로 윤슬이 반짝이며 퍼져 나갔고, 그 빛은 마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앞에 서 있으면 말이 필요 없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충분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채워 준다.


눈앞에 펼쳐진 서우봉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오르막길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고, 찬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건, 이 길 끝에 펼쳐질 풍경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여 분쯤 걸었을까. 작은 정자가 있는 휴식 공간에 다다라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풍경을 바라본다. 저 멀리 제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다는 여전히 웅장한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파도 소리는 귀에 들리기보다 몸으로 전해졌다. 바람에 실려 온 그 소리는 마음 깊은 곳까지 울림을 남겼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바람마저도 풍경의 일부였다. 그래서일까. 날씨가 아무리 차가워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연인, 가족, 혼자 걷는 여행자까지……… 각자의 사연과 시간을 안고 이 바다 앞에 서 있다. 그렇게 함덕해수욕장은 사람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이 된다.

이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휴대폰 메모장에 떠오르는 감정을 적어 내려갔다. 완성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느낌 그대로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 몇 컷의 장면을 영상으로도 담아 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바다, 언덕 위를 휘감는 거센 바닷바람, 방문객들의 웃음 섞인 수다와 환한 표정들. 그 모든 장면이 어쩐지 동심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순수한 기쁨의 조각 같았다.

함덕해수욕장은 내가 자주 찾는 곳이다. 하지만 서우봉은 오르막이 있는 오름이기에 편한 신발과 여유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늘 마음으로만 오르다 실제로는 자주 오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봄이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채꽃이 피는 계절의 서우봉은 꼭 걸어야 할 길이 된다. 노란 꽃들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이 건네는 인사를 온몸으로 받는 기분이 든다. 봄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산책길은 더할 나위 없는 자연의 선물이다.


서우봉 정상에 올라 벤치에 앉아 제주 동쪽 마을 풍경을 바라보았다. 숨이 차오른 만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맑게 불어오는 바람이 조용히 말려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저 앉아 바라보고, 느끼고, 마음속에 담아 두면 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함덕의 바다와 서우봉의 바람은 오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파도 소리가 들리고, 윤슬이 반짝이며 번져 간다. 그렇게 제주의 풍경은 나를 위로해 주며, 오늘도 나의 기억 한편에 조용히 머물고 있다. 삶이 흔들릴 때 돌아갈 수 있는 내면의 풍경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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