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지금

우린 영원할 수 없겠지, 그래도

by 혜온

꿈은 이상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잊을 만하면 도착해 있다. 그래서 꿈꾸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대개 도착하고도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오래 원하던 것들은 원하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조금 다른 형태로, 조금 다른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문을 통해 들어온다. 그래서 알아보지 못한다. 이게 그거였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안다. 아, 그때 내가 거기 있었구나. 그토록 바라던 곳에 이미 서 있었구나.


조금 더 어릴 때 상상하던 어른의 하루가 있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조용히 책을 읽기도 하는. 대단한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는 시간. 그게 꿈이었을 시절.


지금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신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가끔은 저녁에 책을 읽는다. 어릴 때 그리던 그 장면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가 거기인 줄 모르고 살았다.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착은 늘 내일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 때 비로소 보인다. 이 아침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알 때, 이 아침이 보인다. 이 계절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 때, 이 계절의 빛이 보인다. 끝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을 선명하게 만든다.


즐긴다는 건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사라질 걸 알면서 거기 머무는 일. 끝을 알면서 시작하는 일. 떠날 것들에게 마음을 여는 일. 그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정직한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 여기 있기로 하는 것.


오래 꿈꿔왔던 순간은 보통 소박하다. 누군가와 나눈 식사. 해가 지는 걸 끝까지 본 저녁.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냥 보통의 오후. 그런 것들이 꿈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안다. 바라던 건 특별한 게 아니라 이런 것들이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이 언젠가의 그때가 된다. 미래의 내가 돌아보며 그리워할 시간 속에 지금 내가 서 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이미 도착인 것이다. 아직 더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기가 거기다. 오래 걸어온 길의 끝이 아니라 중간쯤, 어쩌면 가장 좋은 지점에 지금 서 있다.


영원할 수 없다는 말이 처음엔 슬펐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들린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순간이 이 순간인 것이다. 끝이 있기 때문에 형태가 생긴다.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에 지금 여기 있다는 게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영원하지 않다는 건 저주가 아니라 조건이다. 사랑할 수 있는 조건. 그리워할 수 있는 조건. 지금을 지금으로 느낄 수 있는 조건.


오래 꿈꿔왔던 순간을 즐긴다는 건, 지금 여기에 '나'로서 있기로 하는 것이다. 다음을 준비하느라 지금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 어제를 후회하느라 오늘을 놓치지 않을 것. 그냥 여기, 이 빛 안에, 이 공기 안에, 잠시 머무를것. 지금 순간이 사라질 줄 알면서도.


그게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끝을 알면서 끝까지 있는 것.


우린 영원할 수 없겠지, 그래도 오래 꿈꿔왔던 순간을, 즐겨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