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아주 많이 만들었다.
남편은 경력이 40년 된 요리사고 식자재를 조금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더러는 그냥 생기는 식자재도 있어서 우리 집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도 먹거리를 걱정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김장 때나 볼 수 있는 커다란 대형 볼에 고기와 빵가루 양념 등을 넣고 고기 반죽을 만들어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만들어진 버섯이 잔뜩 들어간 스테이크 소스도 만들었다.
아이들이 함께 동참하고 만들다 보니 잔칫집 같았다.
많이 만들어서 가까이 살고 계시는, 아들 녀석에게 영어문법 과외를 해주시는 선생님 댁에 먼저 연락을 드리고 나눠 드렸다. 때마침 연락이 온 교회언니 것도 담았다. 몇 개 통에 소분을 해서 담고 정리를 하는데 웃음이 났다.
매일 날아오는 독촉 고지서에 월급날이 되면 3일도 안돼서 바닥이 나는 통장 잔고를 보며 하루하루가 버겁게 느껴졌던 날들....
잘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호기롭게 사업을 시작했는데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게 되었다.
장례절차는 오롯이 남편의 몫이었다. 이후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다.
결국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고 나는 아이들과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한국에 들어와 기독교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냈지만 더 이상 학교를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일반학교 입학을 원하지 않은 아이들과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나의 처음 포부와 달리 아이들과 외부 활동으로 여행을 많이 하자 계획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작년 여름 홈스쿨링을 시작하며 여행을 다녀오고 몇 번의 캠핑이 전부 지만 그래도 다시 새 학기를 시작하며
돌아보니 알게 모르게 우리는 궁핍함속에 풍요로웠고 슬픔 가운데 기쁨이 있었다.
아이들과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올해 15살 되는 아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더욱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올해 10살이 되는 딸아이는 그동안 어렵게 생각하는 수학 과목을 재촉하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성과도 있었다.
2024년 그렇게 가정 경제 위기 속에서 우리는 잘 버티며 2025년을 맞이하고 아이들과 힘차게 시작한다.
우리 가정은 광야의 삶을 잘 적응하고 있다.
매일 주시는 만나와 불기둥 구름기둥을 경험한다. 자녀들은 학교 다닐 때 보다 살도 찌고 키도 쑥쑥 커서 또래보다 크고 살도 쪘다.
남편이 아이들과 만든 함박 스테이크는 아이들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었고 나와 남편은 나눔을 하며 가난 중에 풍요를 맛보았다.
일용할 양식의 기쁨과 감사는 광야에서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당장 아이들이 아프다고 해도 병원에게 갈 엄두가 나지 않은 게 지금 우리 가정의 형편이지만 아이들은 이번겨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보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은 은혜가 우리 가정에도 있었다.
난 아이들 옷을 사준 적이 몇 번 되지 않지만 늘 아이들은 좋은 옷과 신발이 있다. 예전에 주변에서 아이들 옷 입는 거나 신발은 다 좋은 거만 입히고 신기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다.
친정 식구들이 사주시기도 했고 주변에서 작아진 옷을 나눔 해주셔서 입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성경말씀처럼 가난 중에 풍요를 맛보았고 슬픔 중에 기쁨을 누렸다.
남편의 요리는 오늘도 우리 가족의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