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

시평 - 김정식 교수(경북과학대 뮤직프로덕션과)

by 사윤수


사윤수 시인의 『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 뒤표지에는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에서 가져온, '피에르 마티외'의 다음 문장이 적혀 있다.


“삶이란 여럿이 모여 노는 노름판이다. 노름꾼 넷이 보인다. 상석에 앉은 시간이 말한다. 패스! 사랑은 가진 돈을 몽땅 걸고 부들부들 떤다. 인간은 포커페이스를 짓고 있고, 죽음이 판돈을 몽땅 쓸어 담는다.”


삶의 판에서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시간과 죽음에 있다. 그런 구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포커페이스”를 짓듯 자신의 불안·두려움·욕망을 감추고 어떻게든 게임을 계속하는 것, 곧 감추면서 버티는 행위가 곧 삶이라고 해도 억울해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윤수의 시는 바로 그 포커페이스 뒤의 인간을 들춘다. 키냐르식으로 말하자면, 그 감춤 속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뜻밖의 낱말이나 이미지, 불시에 번지는 위트가 우리 자신을 드러내 버린다. 권투의 잽처럼 날아드는 시어 하나가 우리에게 애써 숨겨 두었던 얼굴을 그대로 자각하게 만든다.


그런 시인의 작은 농담과 기묘한 비유들은 시간과 죽음이 이미 판돈을 쓸어 담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테이블에서, 그래도 계속 앉아 있을 이유를 제공한다.


「겨울은 상여처럼」(p.95)에서 노름판은 ‘겨울’이다. 겨울이라는 폐쇄된 계절을 통해 화자의 고립감과 삶의 막막함이 드러난다. 겨울은 그대로 굳어 버린 상여 같고, 상여는 계절과 무관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의 형상이며, 그 밑바닥에는 얼어붙은 죽은 자의 슬픔이다.


이 상여 같은 겨울 속에서 화자는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옛날보다는 낫다”는 말을 되뇌며 판 위에 버티고 있는 노름꾼이 된다.


시 속에서, 그런 위안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상여 같은 겨울에 대항하는 포커페이스의 미세한 떨림을 만들어낸다. “검은 구름 겨울에서 나가는 문이 없”고 “어디에도 손잡이가 없”다는 진술은, 이미 게임의 규칙이 인간의 힘을 넘어섰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규칙을 끝까지 응시하려는 기묘한 각성의 태도를 보여 준다.


그 인간은 시간과 죽음이 상석에서 판을 굴리는 동안, 그는 상여를 닮은 겨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래도 아직은”이라고 중얼거린다. 사윤수의 시가 포착하는 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바로 그 “아직은”의 표정, 얼어붙은 계절 속에서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버티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시간’은, 「내일은 말이 없고」(p.20), 「검은 두부」(p.39), 「새가 돌아오다」(p.66) 같은 시들에서 계속해서 “패스!”를 외친다.


「내일은 말이 없고」에서 내일의 주소도, 내일로 가는 방법도 알 수 없고, “내일은 오늘의 이 모든 일을 알까요”라고 묻는 화자는, 내일에 대한 비전문가요, 기다림의 불구자다. 내일은 오직 상석의 시간만이 알고 움직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리라. “오늘로 건너올 수 없는 내일이 무지개 너머에서 꽃다발을 들고 서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거나 두려워하는 환영이요, 또는 신념에 취한 신앙이다.


「검은 두부」의 검은 두부(잠·주기적 어둠)는 “밤마다” 와서 “아침이 올 때” 사라진다. 밤과 아침의 리듬, 곧 시간의 사이클이 두부의 등장과 퇴장을 지휘하고, 사람들은 그 이유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그 몫을 나눠 먹는다. 검은 두부가 잠이거나 휴식이라면, 왜 우리는 매일같이 잠깐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야 하는지, 그 어떤 논리로도 끝내 설명할 수 없다. 그것 말고는 그 반복에 대한 다른 이유를 우리는 영원히 알지 못하리라.


「새가 돌아오다」에서 환조당(還鳥當)에 새가 돌아오고, 열매와 새소리를 병에 담아 봉인해 두어도 계절과 생멸의 순환은 인간의 의지 밖에서 계속된다. 의지 밖에 있다는 말은 그 순환이 우리의 논리까지 함께 먹어 치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연은 지지고 볶는 우리의 삶이다.


“숲속에 드니 새소리가 푸르렀다


나는 열매를 땄고 그는 새소리에 대해


풀을 베고 난 뒤에 얘기해주겠다고 했다


높이 달린 큰 열매를 따려고 나무에 올라


새처럼 노래하며 나는 둥지 하나도 지어보는데


꿈은 공중에서 흩어지는 새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열매를 따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새가 돌아오는 곳’, 환조당은 우리 삶의 우연으로 읽힌다. 우연은 다름 아닌 상석에 앉은 ‘시간’이다. 우리는 그 우연의 장난질에 널뛰듯 스스로 희비를 만든다.


“환조당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깜빡 새소리를 잊고 헤어졌을까”


우리는 순간순간 대단한 것을 깨달은 양 뿌듯해하지만 새가 돌아오는 이유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그 깨달음이 얼마나 허약한 발판 위에 서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환조당의 상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시간’은, 그저 묵묵히 우리를 맞이할 뿐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마치 알지도 못하는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서둘러 말을 덧붙이고 해석을 꾸미고 깨달음의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새는 돌아와도 자기 귀환의 이유를 말하지 않고, 시간은 흘러가면서도 자기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 그래서 환조당의 장면은, 어쩌면 우리가 이해했다고 믿는 모든 깨달음이 사실은 “깜빡 잊고 헤어졌을” 새소리 위에 세워져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마지막 연에서, 이 짧은 생에서 얻은 모든 것을 밀봉해 어딘가에 남긴다. 그것은 얼어붙은 ‘겨울 상여’ 같기도 하고, 버즘나무 아래 전해오던 전설의 '작은 왕국' 같기도 하다.


시들 중에서 비루한 우리를 가장 신랄하게 비웃는 듯한 「속도의 후예」(p.16)가 있다. 시간과 운동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속도의 계보 속에서 자기 몫의 속도를 가늠해 보려다 끝내 규칙을 장악하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가 드러난다.


“이 가계는 족보가 없다 그 자체로 기원이거나 후손이다 길짐승의 암수 빈모(牝牡) 날짐승의 암수 자웅(雌雄), 속도에도 이 염색체가 있을까. 삼억 구천오백만 년 전 마침내 물고기 한 마리가 밀짚모자를 쓰고 비칠거리며 걸어온 속도 (중략) 부서지고 깨지고 불타버린 속도가 있다 어떤 속도는 주저앉았고 어떤 속도는 앞서갔다 속도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밀짚모자를 쓰고 돌개바람 속에서 쇠잔한 숨을 헐떡이는 한 마리 물고기, 나는”


족보도 없는 이 ‘속도’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던가? 빅뱅 이후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고, “삼억 구천오백만 년 전 마침내 물고기 한 마리가 밀짚모자를 쓰고 비칠거리며 걸어온 속도”처럼 그때야 겨우 뭍으로 올라와 양서류가 된다. 그 후, 인간이 되려 해도 삼억 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존재가 바로 우리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속도를 쥐고 흔드는 주체인 양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시는 가볍게 비틀어 웃는다.


「웃는 먼지」(p.14)는 “10⁻⁴ 사(絲)는 가는 실이다 10⁻⁷ 섬(纖)은 실보다 가늘다”로 시작해 지수 표기와 한자어를 겹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실과 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과학적 단위와 불교·우주 이미지를 끌어와 인간을 거대한 시간 속을 떠다니는 자요, ‘웃는 먼지’로 제시하면서, 그 티끌에조차 “이목구비”와 “회로애락”을 부여해 우주적으로는 하찮지만, 여전히 기쁨과 슬픔을 겪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드러낸다.


지구에서 자신을 의식하며 웃을 수 있는 존재는, 앞서 말한 ‘포커페이스’를 한 인간뿐일 것이다. 통렬한 위트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10⁻⁹의 티끌에도 못 미치는 규모에 불과한 존재가 스스로를 “울거나 웃는 먼지”라고 명명하고 그 하찮음을 비껴가려 하지 않고 끝까지 받아들이는 태도. 숫자와 불교어, 과학과 신비를 한데 엮다가 마지막에 이 고백으로 내려앉는 순간, 시간의 노름판 위에서 표정을 짓는 유일한 플레이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그 표정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자기 보잘것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웃음을 놓지 않는 인간 특유의 기묘한 포커페이스다.


「수국은 누구의 눈매라고 해야 할까」(p.13)는 몇 개의 다른 시처럼 모든 문장이 한 호흡으로 이어져 있고 오직 쉼표 하나만 찍혀 있어, 마치 수국 꽃잎들이 촘촘히 모여 있는 모양을 닮았다. “수국은 누구의 눈매라고 해야 할까?” 여러 번 읽다 보면 그 눈매가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모든 존재들의 얼굴을 가리킴을 느낀다.




“내게 잠시 맺혔다가 떠난 일들은 모두 수국(물의 나라)에서 온 꿈결이라, 수국(꽃)은 질 때 거품처럼 사라지곤 했다”


물, 꿈, 나비, 거품의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애틋하게 배웅하면서도 그 덧없음까지 사랑하려는 조용한 정조가 스며 있다. “순한 개가 새끼를 낳은 거 같고 몽실몽실 흰둥이 열댓 마리쯤 낳은 거 같고 수국은 젖이 퉁퉁 불은 포유류 같다”와 같은 구절은 꽃에 동물적인 생동감을 부여하며, 가장 오래 피어 있다가 말라비틀어진 뒤에도 한동안 형체를 간직하는 수국의 특성까지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시에서의 수국은 잠깐 스쳐 가는 꿈결 같은 인연이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얼굴을 닮았다. 흩어지고, 날아오르고, 거품처럼 사라지지만 한 번 눈에 배인 눈매는 쉽게 희미해지지 않는다. “수국은 누구의 눈매라고 해야 할까”라는 물음은,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얼굴들, 한때 곁에 머물렀다가 떠난 존재들의 총체를 향한 질문으로 읽힌다.




「고독한 대출」(p.40)과 「버즘나무 아래서」(p.42)는, 나무 곁에 선 한 사람의 일상을 통해 이 사회 개인 자영업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비춘다. 두 편은 이렇게 “사회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취급되는 개인이, 실은 자기만의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서 있는 사람임을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낸다. 두 시의 공간은 산비탈의 산벚나무, 동네 길목의 버즘나무처럼 작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 나무 아래에는 화물차 대출 이자, 가게 임대료, 직원 한 명 쓰지 못하는 현실 같은 거대한 구조의 그림자가 포개져 있다. 겉으로는 “목줄 짧은 개처럼”, “버즘나무 아래 CEO” 같은 익살스러운 표현을 쓰지만, 그 안에는 빚에 매인 몸, 비를 맞으면서도 문을 닫지 못하는 가게의 피로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두 시가 특별한 지점은 이 고단함을 통곡이 아니라 위트와 자연 이미지로 밀어 올린다는 데 있다. 산벚나무와 산비탈, 바람과 비, 버즘나무의 껍질 같은 장면들이 개인의 경제적 곤궁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그 곤궁을 감싸안는 배경으로 작동한다. 여기서는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는 인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얼굴을 굳게 숨길 틈도 없이 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몸과 시간이 드러난다.


키냐르가 말하듯 이들은 ‘자영업자’라는 사회적 호칭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빚과 공포, 사랑과 책임이 뒤엉킨 하나의 세계다. 출근 도장을 찍고, 대출 이자를 갚고, 비에 젖은 채 문을 닫지 못하는 이 단독자의 일상은 통계표의 숫자가 아니라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서 있는 고독한 우주다. 산벚나무와 버즘나무는 그들을 대신해 표정을 지어 주는 얼굴이 되고, 시는 그 얼굴을 끝까지 바라봐 주는 드문 기록이 된다.


사윤수의 시 세계는 피에르 마티외가 말한 노름판의 은유를 한국적 풍경과 일상의 장면 속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시간과 죽음이 상석에 앉아 “패스!”를 외치는 판에서, 시 속 인물들은 상여 같은 겨울과, 속도의 계보와, 웃는 먼지와, 수국과, 산벚나무와 버즘나무 곁에서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버틴다. 그들은 패배를 뒤집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미묘한 위트와 기묘한 비유, 작은 농담과 버티는 몸짓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끝까지 지키려 한다. 놀랍도록 독특한 시인의 시어가 바로 그 순간들에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자각하고 거기서 기쁨을 찾고자 하는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둔 음흉한 우리의 얼굴을 들추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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