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해 교수님 시평
<인내의 미학으로 시어를 발효시킨 영혼의 진주 꾸러미> / 임재해교수님 서평
사윤수 시집, <<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 시인동네, 2026
1. 시는 독특한 구조의 안경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세상을 다르게 보여주는 까닭이다. 때로는 돋보기이거나 현미경이기도 하고 때로는 만화경이거나 망원경이기도 하다. 예사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면을 특별히 조명하거나 낯설게 보여주는 것이 시이다. 따라서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를 통해서 알지 못했던 새 세상을 발견하고, 무심하게 보아넘겼던 대상을 새로운 의미로 재인식하게 된다.
시인에게 언어는 외바퀴 자전거와 같다. 하나의 바퀴이지만 앞뒤 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기도 한다. 고착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언어를 함축과 상징으로 수많은 의미를 띠도록 만든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보여주고 감각되지 않는 감정을 실체화한다. 시인은 언어를 조탁(彫琢)함으로써 시적 형상성의 수준을 높이고,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시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의 곡예사라 할 만하다.
시인의 두 가지 면모를 아우르면, 시인은 독특한 구조의 안경을 끼고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곡예사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언어는 낯설면서도 신선한 새로움이 있고 일탈적이면서도 신기한 놀라움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인 사윤수는 세 번째 시집 <<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를 발표했다. 이 시집을 펼쳐드는 순간, 시인과 시에 대해서 위와 같은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어의 조탁이 탁월하고 때로는 조어까지 과감하게 실천한 까닭이다.
2. 시집 <<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를 열고 설레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시편을 읽어 나가는 동안 앞이 점점 캄캄해져 왔다. 작품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시인이 외바퀴 자전거를 멈추고 안경 너머로 정색을 한 채, ‘아이들은 저리 가라!’ 하고 나무라는 듯했다. 왜냐하면 시인의 시어뿐만 아니라 시적 문장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의 무딘 역량으로는 쉽게 범접할 수 없게 만든 까닭이다. 한마디로 내가 휘어잡기에는 벅찬 시편들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이 시집의 첫 작품이자 산문시 <수국은 누구의 눈매라고 해야 할까>는 내가 좋아하는 꽃에 관한 시인데다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시여서 흥미롭게 포착되었다. “현무암 담장 곁에 만발한 파도는 수국(水國)에서 수국(水菊)으로 건너온 유월”이라고 했다. 유월에 만발한 꽃 ‘수국’을 바다 ‘수국’에서 건너온 파도로 그렸다. 무성하게 피어 있는 수국의 흰 꽃숭어리들을 파도의 흰 포말로 은유한 것이다. 수국을 파도로 읽은 것은 수국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형상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수국이 바다라는 뜻의 ‘수국’이라는 말과 공교롭게 일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동음이의어가 의성어와 만나면 더 흥미롭다. “오종종 쑤국쑤국 부풀어 제주어를 발음하고 저희들끼리 둥근 귓속말을 한다.” 오종종은 수국의 낱꽃이 한 떨기를 이루는 의태어라면, 쑤국쑤국은 저희들끼리 ‘수군수군’ 또는 ‘숙덕숙덕’ 귓속말을 하는 의성어라 할 수 있다. 수군수군이 표준말이지만 수국과 같은 소리값의 의성어를 조어하려면 ‘쑤국쑤국’ 제주토박이말을 써야 제격이다.
동음이의어의 경계를 넘어서면 “수국은 나비의 씨앗까지 품고 있었는지 저리 흰나비 떼 피웠다”고 한다. 수국 떨기가 무거워서 휘어지면, “흰 꽃숭어리들은 순한 개가 새끼를 낳은 거 같고” “수국은 젖이 통통 불은 포유류 같다”고도 했다. 시인의 시선에는 수국이 흰 포말의 파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흰 나비 떼이자, “흰둥이 열댓 마리쯤”이기도 하고, 젖이 통통 불은 어미 젖가슴이기도 하다. 수국의 다양한 재발견이다.
“다정히 안아보려 하자 나비 떼 화르르르 날아오르는데 내게 잠시 맺혔다 떠난 일들은 모두 수국(水國)에서 온 꿈결이라, 수국(水菊)은 질 때 거품처럼 사라지곤 했다”
시의 마지막 대목이다. 마지막 대목답게 앞에서 길게 펼쳐놓았던 이미지를 수미일관되게 마무리한다. 몽실몽실 흰둥이들이 귀여워서 안아보려 하자, 흰 나비 떼는 날아오르고 포말을 이루던 파도는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시인의 시선은 수국을 파도로 나비 떼로 흰둥이로 읽지만 그것을 접촉하는 순간 시각적 상상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은 시각에 머물 뿐 실체로서 체감되지 않는 까닭이다.
3.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시편들이 뜻밖에 많다. 시 <밤이면 소리 내어 우는 물고기>에서는 ‘성대’라는 시어를 여러 의미로 사용한다. 김성대, 박성대처럼 뉘집 아들 이름 같은 ‘성대’가 바다 생선의 이름 ‘성대’로 호명되는가 하면, 주인이 수족관의 ‘성대’를 건져내 목을 따며는 “성대가 성대(聲帶)를 잃는다”고 하여 성대의 또 다른 의미를 소환한다. 목을 딴 성대를 “성대하게 회 떠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한다. 따라서 성대는 사람 이름이면서 생선 이름이기도 하고, 소리를 내는 목의 성대이기도 하며, ‘성대하게’ 잘 차린 상차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대는 사실상 동음 4의어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고무 대야의 수심은/ 수심(愁心)이 까무룩 깊다”고 하여, 물의 깊이를 뜻하는 ‘수심’과 근심 걱정의 ‘수심’을 의도적으로 가져와 동음이의어로 사용했다. 시 <해>에서는 이름씨 ‘해’와 지시어 ‘해’를, 시 <숙다방>에서는 ‘숙’이 두음으로 들어간 ‘숙다방’, ‘숙녀’가 있는가 하면, ‘숙’이 말음으로 들어간 경숙, 남숙, 명숙, 영숙, 현숙 등의 이름을 길게 열거하기도 한다.
시 <자작나무의 세계>에서는 “자작자작 타오르는 자작나무의 세계/ 우리의 경배가 열렬(熱烈)하고 열열(咽咽)했으므로”라고 하여, 의성어 ‘자작자작’을 ‘자작나무’와 연결 짓고, 한자말 ‘열렬’과 ‘열열’은 서로 다른 뜻이지만 반복함으로써 강조를 나타낸다. 시 <불로고분군(不老古墳群)>에서는 “고분(古墳)은 고분(孤墳) 같아서”라고 하여 한자말 동음이의어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강화한다. 특히 ‘열열(咽咽)’과 ‘고분(孤墳)’은 시인이 새로 조어한 동음이의어이다.
시 <이별에 대하여>에서는 “이 별에서 이별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여, 이별을 ‘이 별’로 분해하여 동음이의어를 만들어냈다. 같은 방식으로 <흔들 그네>에서는 ‘나그네’를 ‘나’와 ‘그’, ‘그네’로 분해하여 “그네는 ‘그’이기도 하고 ‘그니’이기도 하고” “그네, 나 그네, 나그네”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어를 의도적으로 분해하고 결합함으로써 새 언어를 만들어내고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길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을 언어의 곡예사라 하는 것이다.
4. 불교시 <수보리>는 동음이의어를 더 묘미 있게 조탁한 불교시이다. ‘수보리’를 뒤집어 ‘보리수’라 하는가 하면, 두 시어에 공통으로 들어간 ‘보리’까지 동음이의어로 끌어들였는데, 불교 세계를 훤히 꿰고 있는 시인의 역량이 발휘된 작품이라 하겠다. <수보리>의 첫 연을 옮겨보자.
수보리라는 글자는 쉽게 읽힌다
글자 속에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난다
흘러가다 다 닳고 떨어졌을까
세 음절에 받침이 하나도 없다
시인은 ‘수보리’를 읽으면서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물은 ‘졸졸’ 흐르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쫄쫄, 찰찰, 콸콸, 쏴아, 찰랑찰랑 흐르기도 한다. 시냇물이 ‘수보리 수보리’ 소리를 내며 흐르느라 닳고 닳아서 글자의 받침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수보리의 세 음절에 받침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착상한 시각적 이미지이다.
수보리에는 물소리만 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물과 존재들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먼저 여름철의 푸른 ‘보리’가 떠오르는가 하면, 친정에 혼자 남아 울었던 동생 이름이 있고, 팔려간 강아지 이름 ‘보리’도 있으며, “수보리 속에는 보리수가 있고”라고 하여,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로서 ‘수보리’에 대한 다의적 인식이 탁월하다.
수보리는 원래 물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가 아니라 불교사에 등장하는 성자의 인명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과 대화를 나눈 제자의 이름이 수보리이다. 따라서 “어진 스승이 수보리야, 하고 부를 때면/ 기수급고독원숲의/ 보리수 잎들이 은총처럼 아롱아롱 빛났을까” 상상한다.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를 부를 때, 불법을 전하던 숲의 보리수들이 아롱아롱 빛나며 응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리수들은 제 이름을 부르는 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 부처의 제자이고, 보리수는 부처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신성한 나무이다. 두 말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보리(菩提, Bodhi)’는 불교에서 핵심을 이루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특히 수보리는 부처의 10대 제자이면서 불교의 ‘공(空)’ 사상을 가장 깊이 이해한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자, 불교의 주요 경전인 <<금강경>>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수보리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야 ‘공’을 말하고 ‘경전’을 말할 수 있다. 시 <수보리>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공(空)을 모르기에
잔물결처럼 내내 불러보고 싶다
받침도 탁음도 없이 텅 비고 맑아서
이름 하나로 경전이 되는
수보리시여!
시인은 ‘공’을 모른다고 했지만, 성자 수보리의 사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까닭에 그 이름에서 ‘공’ 사상을 읽는다. 수보리 이름에는 “받침도 탁음도 없이 텅 비고 맑아서” ‘공’이고, 그래서 수보리라는 이름 하나로 경전 ‘금강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보리시여!”라는 시어에는 거룩한 우러름이 경건하게 배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불교의 ‘공’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수보리의 금강경을 특히 탁월한 경전으로 포착한다고 하겠다.
5. 불교 세계에 대한 시인의 내공이 만만찮다. ‘공’ 사상을 담고 있는 수보리의 금강경을 포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가 이모이자 유모였던 ‘대애도 비구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직접 상여까지 맨 사실을 알고 있다. 시 <부처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에서는 이 특별한 장례를 상기시키면서 시인의 처지를 돌이켜 보고 있다.
부처는 이모이자 유모인 대애도 비구니의 장례를 손수 치렀다
장례 치를 평상과 기름과 꽃과 향과 수레를 구해
교외의 화장터로 향하였고
찬다나 섶나무에 불을 붙여 이모를 화장했다
(‘부처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 일부)
부처가 이모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직접 상여를 매고 화장터까지 운구한 사실은 당시 인도사회와 불교 교단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자 감동적인 일로 해석된다. ‘부처님도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례로서 불교가 인륜이나 효도를 저버리는 종교가 아님을 입증하는 근거 구실을 한다. 따라서 이 장례식은 불교 경전에서 대효(大孝)를 실행한 대표적 일화로 손꼽힌다.
나는 다만, 아무 뜻 없이
부처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 라고 썼고
그 문장에 기대어 견디는 나날이다
남의 이모 장례식을 핑계로 얼마나 울어서
상조 국밥에 콧물을 빠뜨리는 겨울날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시인이 “아무 뜻 없이” “언젠가 써둔 문장”이 “부처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고”이다. 왜 이 문장을 언젠가 아무 뜻 없이 써두었을까. 그리고 앞에서 이 “문장이 느닷없이 불쑥불쑥 떠오른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또 “그 문장에 기대어 견디는 나날”이라고 했다. 왜일까. 이 문장에는 3가지 주제어가 있다. 부처와 부처의 이모, 장례식이 그것이다. 그러면 부처 때문일까, 부처의 이모 때문일까, 장례식 때문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 때문일까.
“남의 이모 장례식을 핑계로” 울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처도 이모도 아닌 장례식인 것 같다. 부처나 부처의 이모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한갓 ‘남의 이모’라 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장례식’이 원인이다. 시인은 어떤 장례식을 잊지 못한 까닭에 불쑥불쑥 이 장례식을 떠올렸을까.
우리는 누구든 장례식을 경험한다. 그러나 가까운 피붙이의 장례식은 다르다. 죽음을 지켜봐야 할 뿐 아니라, 주검을 처리하는 과정도 장례식의 처음과 끝도 직접 겪어야 한다. 가족 가운데도 위로 조부모나 부모가 아니라, 시인처럼 아래로 청춘의 동생이 요절하는 죽음과 주검, 장례식을 경험한다면 그 참혹한 슬픔은 감당하기 어렵다.
시 앞부분에서 “나는 지옥을 치르며/ 겨울이라는 질병을 앓는다”고 했고, 여기서는 장례식을 핑계로 울어서 “상조 국밥에 콧물을 빠뜨리는 겨울날”이라고 했다. 참상을 당해 겪는 장례식은 사실상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냥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수준이 아니다. 눈물과 함께 콧물까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줄 흘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계절적으로 겨울이라 하겠다.
겨울의 질병은 감기이고 콧물은 지독한 감기 증세이다. 시적 자아는 감기 환자처럼 슬픔을 앓는다. 따라서 서러운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상조 국밥에조차 콧물을 빠뜨린다. 밥상을 앞에 두고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이모의 장례를 치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시인은 동생의 죽음을 겪은 참상의 트라우마로 지옥을 치르며, 겨울 감기를 앓듯 하염없이 울고 주책없이 콧물까지 흘린 것이 아닌가 한다.
6. 시인의 시에서는 웃음과 기쁨보다 울음과 슬픔의 정서가 단연 압도한다. “남의 장례식을 핑계”로 펑펑 울만큼 늘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슬픔을 노래한 것이 산문시 <슬픔 한 포대>이다.
“배운 것이 슬픔이고 기껏 주워온 것도 슬픔 한 포대, 어디 내다 팔 곳 없어 가슴 마루에 던져놓고는, 불쌍해 다 버리기에도 아까워 이리저리 슬픔을 흩어놓고 쓸만한 것들을 골라 보는데 그중에 귀한 슬픔, 다듬으면 더 이상 울지 않을 슬픔들은 골라 널어 말린 뒤 차곡차곡 싸서 깊이 넣어두고”
시인은 배운 것도 주워 온 것도 슬픔이다. 보이지 않는 슬픔의 양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슬픔 한 포대”라고 했다. 한 조각 슬픔이 아니라 한 포대의 슬픔이다. 슬픔은 추상적인 것이지만 한 포대라고 함으로써 구체적인 실물로 바뀌었다. 아픈 슬픔을 포대째로 품고 지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어디 내다 팔아버리거나 내다 버리고 싶다. 그러나 슬픔을 살 사람도 없지만 버리기에는 너무 불쌍하고 아깝기도 한 슬픔이 있다. 그러므로 가슴을 마루 삼아 슬픔을 이리저리 흩어놓는다.
슬픔도 가지가지이다. 슬픔 가운데도 귀한 슬픔이 있고,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될 슬픔들이 있다. 이런 슬픔들은 쓸만한 슬픔이라 생각하여, 따로 골라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싸서 깊이 넣어”둔다. 다시 챙겨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는 어디에 넣어두었는지도 몰라 잊어버릴 때까지, 잊는 날도 오겠지 하면서” 갈무리한다. 언젠가는 마침내 잊어버리기 위해서 기억하려는 슬픔, 그것은 예사 슬픔이 아니라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심연’의 슬픔이다.
심연 속의 슬픔은 수시로 일상 속에서 나투어지기 마련이다. 산문시 <단골과 목어>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 슬픔이 먼저 출근해 복무하고 있다”고 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그래도 슬픔을 이겨보려고 “기쁨을 가불하고”, 행복은 외상으로 먹어 보지만, 만기가 돌아오고 이자는 눈덩이로 불어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비애의 단골이나 전문가이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참혹이 참혹하게 웃기 시작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비애의 단골이자 비애의 전문가이니 참혹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슬픔의 문외한이 되어 모른 체 하기가 슬퍼하지 않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적 자아로서는 슬픔을 결코 모른 체 외면할 수 없다. 슬픔을 모른 체 하느니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더 편한 까닭이다. 슬픔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시적 자아에게 슬픔은 ‘단골’이기 마련이다.
그 단골 슬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별에서 비롯되고 장례식에서 더욱 부추겨진다. 부처의 이모 장례식뿐 아니라 고종 ‘이희(李喜)’의 장례식도 한 근거이다. 고종의 장례는 구한말에 치른 유일한 국장이자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장례이다. 시인은 그 장례식을 상여소리 앞소리꾼의 선소리처럼 구성지게 노래한다.
“정월 설산으로 이희(李喜)가 간다”로 시작해서 “이희를 싣고 간다/ 이희, 이희가 왔다 간다”로 마무리 지었다. 왜 ‘고종’이라 칭하지 않고 굳이 ‘이희’라고 했을까. 낯설게 하기일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을까. 내가 읽기에는 ‘이희’가 상여소리 후렴처럼 들린다. ‘어하 어하 어하 넘차 어하’라고 하는 상여소리 후렴이 “이희, 이희가 왔다 간다”와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두 행이어서 더욱 후렴구답게 읽힌다.
고종은 “뿌리도 꽃도 열매도 아닌/ 낙엽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한 나라의 시조도 아니고 전성기의 왕도 아니며, 대단하게 이룬 것도 없는 데다가 국운이 기울어진 망국의 상황에서 왕이 되었으니 한갓 ‘낙엽’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레 승하한 까닭에 당시 일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주검의 상태가 비정상적이어서 ‘식혜 독살설’이 파다했다. 3.1절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확대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북풍한설 독살설/ 이리 설설 저리 쓸쓸해라”. 역동적 운율이 느껴지는 ‘설’의 되풀이는 상여 앞소리를 방불케 한다. 때는 3월 초여서 북풍한설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독살설’과 ‘이리 설설’과 말운이 조응하는 데다가 계절을 넘어서는 국민적 고난을 나타내는 데는 ‘북풍한설’이 제격이다. 특히 “이리 설설 저리 쓸쓸”은 운율의 묘미가 넘치는 표현이다.
슬픔이 녹슬지 않고
슬픔이 썩지 않고
슬픔이 슬픔을 잃지 않고 꽉 잡고 있어서
내가 슬픔을 부르면
늙은 슬픔이 오래 몸을 일으켜 앉는다
슬픔의 황제가 거기에 있다.(‘이희(李喜)’ 일부)
국민적 슬픔의 부피와 무게와 신산함을 ‘슬픔’이라는 말을 거듭 쓰고 또 쓰고 자꾸 씀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뼛속까지 슬픔의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고종황제를 줄곧 ‘이희’라는 이름으로 일컬었는데, 여기서는 ‘슬픔의 황제’라고 일컬음으로써 고종의 왕호와 함께 ‘최고봉의 슬픔’을 나타내는 이중성을 띠게 했다. 그러므로 ‘설’, ‘이희’, ‘슬픔’이라는 시어를 반복함으로써 시적 운율과 후렴구의 묘미, 정서적 강조 등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인 슬픔은 죽음에서 오고 장례식에서 증폭된다. “슬픔이 녹슬지 않고” 썩지 않는 것은 죽음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는 한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고 죽음이 이어지는 한 슬픔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죽음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처럼 슬픔에서도 결코 해방될 수 없다. 슬픔의 원천인 죽음의 공포를 노래한 산문시가 <검은 두부>이다.
"검은 두부가 온다 밤마다 온다/..../ 검은두부는 다음 날 아침이 올 때 사라진다 그것은 재고가 없다 해가 뜨고 기우는 동안 어디선가 검은 두부는 다시 생겨난다 누가 검은 두부를 만드는지 낳는지, 어디서 검은 두부가 자라는지 누구도 모를 일/ .../ 누구든 검은 두부를 먹지 않을 수 없다 잠든 것들의 눈으로 콧구멍 속으로 검은 두부가 들어간다 죽은 것들의 입속에도 검은 두부가 가득 차 있다 누가 적게 먹든 많이 먹든 검은 두부는 남거나 모자라는 일이 없다 아무도 자기가 검은 두부를 먹은 줄 모르고, 서로 묻지 않는다" (‘검은 두부’ 일부)
검은 두부는 두부이면서 두부가 아니다. 검은 두부가 밤마다 왔다가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잠’이다. 잠은 생명 활동이지만 죽음의 잠재적 양상이이기도 하다. 따라서 “누구든 검은 두부를 먹지 않을 수 없다”고 했을 뿐 아니라, “죽은 것들의 입속에도 검은 두부가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검은 두부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죽음은 검은 두부처럼 누구든 피할 수 없다. 죽은 것들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든 검은 두부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우리는 살아가는가 죽어가는가? 살아가면서 죽어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죽어가는 일이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의 과정이다.
그러나 누구든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고 생각할 뿐 죽어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기가 검은 두부를 먹은 줄 모르고, 서로 묻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모두들 죽어가고 있지만 죽어가고 있는 줄 모를 뿐 아니라 서로 죽어가는 것을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검은 두부로 죽음을 은유하며,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절감하도록 하는 죽비 같은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 여기까지 보면 시인은 죽음과 장례식을 매개로 슬픔의 시를 주로 쓰는 시인으로 여길 수 있다. 슬픔의 시인이 분명하지만 슬픔에 갇혀 있는 시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시가 수국을 노래한 것처럼 꽃에 관한 시도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다. 산문시 <참꽃의 까닭>은 비슬산 자락을 강물처럼 물들인 참꽃의 향연을 화사하게 노래한다.
"온새미로 비밀 한 아름이 왔다 암호는 사월이었다가 비슬이었다가, 압축 파일을 여니까 꽃의 탯줄이 풀려나오고 분홍 서책들이 화락화락 펼쳐진다 무슨 까닭이냐며 내가 화전 문장을 살짝 깨물었을 때 아, 달콤 쌉싸름한 형용사의 맛 먹을 수 있는 꽃 참꽃이라 한다 진달래라 쓰고 두견화라 부르기도 한다 분홍 무리가 아늘아늘 산자락을 번져간다. 산 능선마다 분홍 해일이 인다 통째로 먹어도 되는 문장이 범람하니 저 꽃불 사태도 불멸의 고전이라 해야겠다" (‘참꽃의 까닭’ 전문)
봄소식이 암호처럼 왔다. 암호의 열쇠말은 ‘사월’과 ‘비슬’이다. 비슬산의 4월은 참꽃 바다를 이룬다. 비슬산의 완만하고 평평한 산자락은 온통 참꽃 물결로 넘실댄다. 따라서 해마다 4월 중순이면 참꽃축제를 벌일 만큼 비슬산 참꽃 군락지는 꽃불바다를 이룬다. 시인은 이 광경을 두고 “분홍 서책들이 화락화락 펼쳐진다”고 했다.
요즘은 참꽃밭에서 참꽃축제를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부녀들이 화전놀이를 하며 화전가를 불렀다. 화덕 위에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찹쌀가루 반죽에 참꽃을 얹어 구운 부침개가 ‘화전(花煎)’이다. 부녀들은 화전을 부쳐 먹으며 화전가를 지어서 백일장을 열었다. 따라서 화전놀이를 할 때마다 화전가들이 분홍 서책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며 노래된다.
시적 자아는 “무슨 까닭이냐며” “화전 문장을 살짝 깨물었을 때” “달콤 쌉싸름한 형용사의 맛”을 느낀다고 했다. ‘화전 문장’은 이중성을 지닌다. ‘부침개 화전’이기도 하고 ‘화전가’ 노래이기도 하다. 부침개 화전에서는 “달콤 쌉싸름한” 맛을 보고, 화전가 노래의 문장에서는 “형용사”의 맛을 느낀다. 따라서 화전놀이를 할 때는 화전가의 문장이 범람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꽃불 사태”를 이루는 비슬산의 참꽃 군락지는 “불멸의 고전이라” 할 만하다.
위의 시에서는 비슬산의 참꽃 군락지를 거시적으로 화사하게 보았다면, 시 <꽃의 행로>에서는 꽃을 미시적으로 분해하여 읽고 있다. “꽃의 간과 쓸개는 어디에 있습니까/ 꽃이 꽃의 간과 쓸개일까요” 묻는다. 꽃을 식물로 보지 않고 동물로 간주하여 오장육부의 행방을 묻는 것이다. 간과 쓸개를 찾는다는 것은 해부학적 관심이다. 꽃을 해부학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낭만은 없고 수술과 암술의 구성만 도드라진다.
나는 아직 꽃의 이름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수분하지 못했습니다
맺기 전에 떨어질 거 같아요, 나는(‘꽃의 행로’ 말미)
꽃의 생물학적 존재 이유는 ‘수분’에 있다.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로 떨어져야 수분이 이루어지고 씨앗을 맺어 후손을 퍼뜨린다. 따라서 꽃의 이름에 값하려면 당연히 수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수분하지 못했으므로 “아직 꽃의 이름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수분을 해야 열매를 맺는데 수분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기 전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면 꽃의 생명활동은 무위로 돌아간다. 꽃의 비극이다.
꽃을 멀리서 거시적으로 보면 보기에 곱고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러나 꽃의 내부를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생명활동과 생존경쟁이 구조화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이 암술과 수술의 꽃가루받이이다. 열매를 맺느냐 마느냐, 씨앗을 남기느냐 마느냐, 후손을 잇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그럼에도 꽃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수분을 하는 주체는 벌과 나비와 같은 곤충이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꽃의 행로’는 수동적이고 타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꽃을 멀리서 풍경으로 보면 화사하고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깊이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면 여느 사람들이 겪는 위기의 삶처럼 꽃의 숙명도 위기의 경계에 이르러 있기 마련이다.
인간을 해부학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꼭 같은 것처럼, 꽃을 미시적으로 보면 무슨 꽃인가 문제되지 않는다. 꽃의 해부학적 구성만 문제된다. 그러나 가시적 수준에서 꽃을 보면 저마다 서로 다른 꽃의 개성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산문시 <태초의 봄날>은 꽃을 가시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미움이나 다툼이거나 모든 것은 서로의 일부다 겉으로 화를 내지만 안으로 이기지 못할 때, 당신이 고전적인 방식으로 나를 찾았기에 나는 유물을 발견한 듯 경이로웠다”. ‘태초의 봄날’에 관한 상황을 나타낸다. 서로의 일부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티격태격하다가 삐쳐서 돌아서면 찬 바람이 불고 마음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돌아섰던 사람이 속마음을 이기지 못해 나를 찾아 돌아오면, 얼었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고,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견한 듯 경이로울 만큼 반갑다. 이런 상황이 바로 ‘태초의 봄날’이다.
"우리는 복사꽃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했다 첫 봄 첫 복사꽃 공동체가 결성된 것 당신이 그러하듯 복사꽃은 멀리에서 어디에서 봐도 복사꽃, 속이거나 감출 수 없다 둥근 낮달이 높이 뜬 날 우리는 도원이 펼쳐진 윗마을까지 오래 순례했다 묵묵히 천국을 배웠다" (‘태초의 봄날’ 일부)
서로 사귀던 이가 삐쳐서 떠났다가 제 발로 다시 찾아와 만나게 되면, 그 만남은 더욱 단단한 결속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복사꽃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했”으니, 마치 �삼국지�의 도원결의(桃園結義)처럼 장엄한 ‘결사’가 이루어진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결사를 일러 “복사꽃 공동체”라고 했다. 복사꽃은 태초의 봄날을 은유할 뿐 아니라 당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복사꽃은 어디서 보든 복사꽃이어서 “속이거나 감출 수 없다”. 한결같이 투명한 당신과 함께 복사꽃 마을을 오래 거닐며 ‘태초의 봄날’을 누리는가 하면, “묵묵히 천국을 배웠다”고 한다. 천국이 따로 없다. 복사꽃 같은 당신과 복사꽃 길을 마음껏 거니는 상황이 곧 천국인 까닭이다.
복사꽃도 꽃인 한 열흘을 가지 못한다. 언젠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복사꽃이 지면 끝인가. 아니다. “복사꽃이 지고 나면 나는 당신의 복숭아 당신은 나의 통조림 당신은 나의 잼 나는 당신의 꽃잠”으로 변화 발전하게 된다. 복사꽃 → 복숭아 → 통조림 → 잼으로 변화는 물질적 변화이다. 그러나 “꽃잠”은 물질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변화이다. 나와 당신의 ‘복사꽃 공동체’가 일심동체의 정점에 이른 것이 ‘꽃잠’이니, 이 또한 ‘천국’이자 ‘태초의 봄날’이라 할 수 있다.
꽃이 지듯이 공동체도 영원하지 않다.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도 관계도 없다. 따라서 “꽃잠” 이후의 뒷날을 미루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후일 여기 어디쯤 꽃나무 아래 먼저 재가 된 사람이 묻혀 뒷사람을 기다리는 낭만도 있으려니” 하고 미래를 아름답게 유추한다. 도원결의에서는 ‘비록 태어난 날은 서로 다르나 죽는 날은 한날한시이기를 바란다’고 비장하게 맹세한다. 그러나 시적 자아의 복사꽃 공동체는 그런 부질없는 맹세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죽어 재가 된 사람이 복사꽃 아래 묻혀서 뒷사람을 기다리는 낭만을 기대한다. 가당찮은 맹세 따위는 하지 않으면서 죽음의 선후를 오히려 더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있다. ‘태초의 봄날’이기에 가능한 공동체의 결사와 해체의 상상력은 복사꽃에서 비롯된다. 복사꽃이 지면서 복숭아가 열리고 복숭아가 통조림과 잼으로 맛을 내는 식품으로 발전하듯, 죽음의 재도 절망이 아니라 뒷사람을 기다리는 낭만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시 <검은 두부>의 죽음이 먹고 먹히는 어둠이라면, 이 시에서 죽음은 피고 지는 복사꽃의 화사함이라 하겠다.
8.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시인마다 시가 모두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결국 시인이 쓰는 시 작품이 그가 인식하는 시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 시에 관해 발언하는 시가 있다. <시가 너에게>는 시에 관한 시이니 일종의 메타 시라 하겠다.
“시가 네 더운 이마를 짚어주네/ 시가 네 마른 입술을 적셔주네”라고 했는데, 아프고 열이 날 때 이마를 짚어줄 뿐 아니라 갈증으로 목이 마를 때 마른 입술을 적셔주는 것이 시이다. 시가 사람을 살리는 구원자 구실을 한다. 시가 사람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너의 시”는 이처럼 구원자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는 엄청난 고통과 수련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눈물 석 동이가 너의 시였지”
“돌아오지 못할 2월이 너의 시였지”
“고래 핏물 같은 저 노을을 닮아 너의 시였지”
“귀 농사 삼백 섬이 이제 너의 시인가”
눈물 석 동이나 될 만큼 큰 슬픔이 시이고, 떠나서 돌아오지 못할 이별이 시이고, 깨지고 찢어진 상처로 핏물 같은 노을이 시이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를 만들어내듯 상처와 이별과 슬픔이 오래 숙성되어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이 시가 되기까지는 “귀 농사 삼백 섬”과 같은 오랜 수련과 공력으로 얻은 든든한 밑천이 있어야 가능하다.
안개와 구름과 달과
불꽃의 살을 바르고 뼈를 고아
시가 네게 밥상을 차려주네
('시가 너에게' 일부)
시가 밥상을 차려주기까지 오랜 단련으로 터득한 고수의 역량이 필요하다. 아무나 안개의 살을 바르고 구름의 뼈를 고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고통의 경험이 더 이상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되려면, 오랫동안 밤을 지새우며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수련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시는 읽는 이들의 이마를 짚어주고 마른 입술을 적셔주는가 하면, “영혼의 양말”을 기워주고 “언어의 시루에 물”을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시는 통증의 산물이지만, 읽는이에게 시는 영혼을 온전하게 일구어주고 언어적 사유를 쑥쑥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를 상당히 귀중한 것으로 주관화하는 반면에 산문시 <식용의 시>에서는 시를 대수롭잖은 것으로 객관화한다. 이 시의 앞부분을 옮겨보자.
"파닥거리는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리고 박박 치대서 끓인 추어탕을 먹고 시를 쓰고, 부화한 지 석 달 된 병아리 통닭을 먹고 시를 쓰고, 꾸물거리는 미끄러운 대가리에 못을 박아 껍질을 벗겨 구운 장어를 먹고 시를 쓰고, 토막난 채 아우성치며 기어 나오려는 산 낙지를 먹고 시를 쓰고/.../ 사육장 틀에 갇혀 초원을 모르는 가축들의 살점을 삶고 지지고 볶고 구워 먹고 시를 쓴다"
제목이 <식용의 시>답게 먹는 상황이 요란하다. 더 거칠게 말하면 먹는 행위가 살벌하고 잔인하다. 추어탕도 먹고 통닭, 장어, 산 낙지, 생선회, 각종 가축들의 고기들도 거침없이 잡아먹는다. 살아 있는 다른 생명을 참혹하게 잡아 구미에 맞게 요리해 먹고 시를 쓴다는 사실을 반복법으로 길게 열거하고 있다. 결국 시는 온갖 살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시가 무엇인가 말하기 전에 시가 어떤 사람에게서 생산되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시를 쓰는 시인의 행태를 일관된 논리로 서술하는데, 한결같이 생명을 잔인하게 요리해 먹는 존재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먹는 행태는 시인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더 일반화하면 모든 육식동물이 한결같다. 결국 시인도 시를 쓴다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다른 모든 인간처럼 그렇게 먹고 산다는 점에서는 예사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간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든,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살아간다는 점을 재인식하게 만든다. 이 사실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른바 먹이사슬이 하나의 자연법칙처럼 인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잡아먹히는 생명의 처지에서 보면 이처럼 참담한 비극이 없다. 만약 인간이 미꾸라지나 닭이나 장어나, 낙지처럼 그렇게 다른 생명에게 잡혀서 온갖 방법으로 요리되어 먹힌다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일까.
천만다행히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상에 있는 덕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살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일찍이 다석 유영모 선생은 “식사는 장사(葬事)”라고 하며 “입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다. 먹는 행위가 곧 다른 생명의 장례 행위이자 사실상 살생 행위라는 것이다. 일반화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육식동물은 살생으로 살아가며, 먹고 먹히는 정글의 감옥에서 갇혀 살고 있다. 살아서는 이 감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만일 하느님이 삼라만상을 창조한 조물주라면 세상을 잘못 창조했다.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아비규환의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는 사실상 지옥이다. 사랑의 하느님이 이렇게 잔혹한 지옥 세상을 창조할 까닭이 없다. 그런 뜻에서 나는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자연히 창조설도 받아들일 수 없다.
먹는 문제에 관해서는 시인 사윤수라 해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게장을 좋아하는 시인은 “발버둥치는 게가 돌아눕지 못하도록 거꾸로 쟁이고 어둠 같은 간장을 들이부어 만든 간장게장 특히 알을 가득 품은 암꽃게장을” 만들어 먹는다. 가능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목표로 생명을 고르고 죽이고 처리하고 간을 맞추고 양념한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는 생명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다만 먹는 사람의 입맛이 중요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맛난 게장을 먹고 맛난 시를 쓰게 된다면 그건 누구 덕분일까. “게가 게거품을 물고 웃을” 일이다.
“초식동물을 닮은 시인들”이라 하여 풀만 먹고 살지 않는다. 시인들이 모여서 “우물우물 시의 가시를 뱉어낸다”. 시인들이 고기를 먹고 가시를 뱉어내는 것이 시이다. “왁자지껄한 주점 테이블 위에 시의 뼈다귀가 수북이 쌓인다”. 육식동물을 닮은 시인들은 육류를 잔뜩 먹고 뼈다귀를 수북이 쌓아놓은 것이 시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시란 고기를 잔뜩 먹고 뱉어낸 가시나 뼈다귀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시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뭘 먹고 뭔가를 뱉어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항문으로 배설한 오물이 아니라 입으로 뱉어낸 언어라는 점이다.
시집 표제인 <<앵두가 쥐여준 씨앗 한 되>>는 시인의 시적 관점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앵두와 같은 사물을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능동적 주체로 인식한 까닭이다. 달리 말하면 씨앗 한 되를 쥐여준 앵두와 인간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둘을 애써 분별하지 않고 하나로 조화롭게 인식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불이법(不二法)’이라 한다. 따라서 시인과 예사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등하게 인식하는 것이나, 시인 자신과 다른 시인들을 분별하지 않고 대등하게 인식하는 것도 불이법이다. 시로 기껏 뱉어내는 것이 ‘가시’ 아니면 ‘뼈다귀’여서 이 또한 불이법이라 할 수 있다.
“앵두가 쥐여준 씨앗”은 결국 삶의 달달한 열매를 다 먹고 난 뒤에 찌꺼기처럼 남은 생명의 핵심이자 고통의 결실이다. 심으면 생명의 씨앗이지만 버리면 한갓 찌꺼기일 따름이다. 찌꺼기이기 때문에 먹히지 않았고 씨앗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 꽃을 피워 앵두를 맺으려면 오랜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시인의 시에는 고통을 서둘러 터뜨리지 않고, 조개가 진주를 빚듯이 안으로 삭여내는 인내의 미학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연금술사답게 오랜 시간 마음의 옹기에 언어를 담아 발효시켜 마침내 한 됫박의 씨앗으로 추출한 영혼의 진주 꾸러미가 시인 사윤수의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