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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X 컨설턴트 전민수 Oct 07. 2017

UI의 역사 A-Z

UX 디자인 배우기 #122

Today UX 아티클


UI 역사 요약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 글은 개발자든 디자이너든 소비자든 누구든, 유저 인터페이스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과 이 산업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글입니다. 대화와 보다 깊이 있는 리서치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알고 있어야 할 용어


유저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합니다. 오퍼레이터와 기기가 상호작용하는 면(面)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저 인터페이스 디자인(user interface design)은 유저가 상호작용하는 기기에 보이는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사용성(인터페이스의 학습용이성과 편의성 측정)과 사용자 경험(인터페이스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사용자의 반응)을 극대화하는 것은 UI를 디자인할 때 가장 주요하게 고려하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계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혹은 GUI는 사용자가 오늘날 ‘코딩’이라고 부르는 명령어 인터페이스를 학습하는 대신, 아이콘이나 텍스트 입력란 등 보조적인 인터랙션을 통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독창적인 기술이 도입된 후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로 암호를 해독하고 대담한 도전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컴퓨터/유저 인터랙션 연구와 새로운 기술을 ‘인간-컴퓨터 인터랙션(human-computer interaction)’ 혹은 HCI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컴퓨터를 도끼나 펜치 같은 다른 간단한 도구들과는 다른 복잡한 도구로 구분 지어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간단한 도구는 하나의 기능을 가지는 반면, 컴퓨터는 다용도로 쓸 수 있는 교환식 대화를 사람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컴퓨터 인터랙션’을 ‘인간-인간 인터랙션’에 비유해서 보는 관점이 생기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별로 즐겁지만은 않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연구 분야는 ‘휴먼 팩터 및 인체공학(human factors and ergonomics, HF&E)’입니다. HF&E는 제품이나 시스템의 디자인을 할 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인간의 웰빙과 전반적인 시스템의 퍼포먼스를 최적화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오늘날과 같이 “발달된” 사회에서는 컴퓨터와 기기가 점점 더 인체의 확장판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이 특히나 중요합니다.


역사의 시작


유저 인터페이스의 혁신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려하고 적용하여 새로운 개념을 구축하고 보다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개발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역사상 있었던 많은 업적을 보면 – 예술, 정치, 사회적 풍토 등 어디서건 상관없이 – 그 각각의 진일보는 보통 앞서 있던 움직임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났었습니다. 수많은 뛰어난 지성인들의 도움을 통한 컴퓨팅 파워의 자연스러운 확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760-1869: 1차 산업 혁명


여러분 자신이 19세기 후반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시 세계의 선도 국가들은 첫 번째 산업혁명을 겪고 있었습니다. 대량생산 시스템은 영국, 서유럽, 북동 아메리카에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철로, 증기선, 운하, 포장도로 등이 도입되면서 상호 연결된 새로운 사회가 열렸으며, 결과적으로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이 발전하게 됩니다. 철도 건설은 전보 기술, 다시 전보 기술은 전화 기술에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이는 스티븐 컨(Stephen Kern)이 일명 “거리의 종말”이라고 묘사했던 것의 첫 핵심 사례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골든 스파이스 세레모니(Golden Spike Ceremony,1869)에서 최초의 대륙횡단 철로 완공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1870-1914: 2차 산업혁명


미국에서 거대한 철강 기업과 석유 기업이 등장하면서 전국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습니다. 작업 환경은 좋지 않았고 급여는 매우 부족했지만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술적 스킬은 가지는 것이 갑자기 필수가 되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 동안 이뤄진 잘못된 사업적 관행을 끝내기 위해 노동 조합이 함께 결속하는 모습을 그린 정치풍자 만화


1911: 테일러리즘


20세기 초반, 공장 노동력이 대두되면서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Taylor)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를 나중에 “테일러리즘(Taylorism)”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의 책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에서 테일러는 다음 네 가지 기준에 집중하여 조직 리더십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정의합니다:


1. 리더는 과학적인 방법을 개발하여 노동자가 경험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던 방법을 대체하게 한다.


2. 과거에는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선택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만 스스로를 훈련시켰던 것과는 달리, 리더가 노동자를 과학적으로 선택하고 훈련, 교육, 개발한다.


3. 리더는 이렇게 개발된 과학적 원칙에 따라 모든 업무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동자와 진정으로 협업한다.


4. 경영진과 노동자에게 업무와 책임을 거의 동등하게 배분한다. 과거에는 거의 모든 업무와 훨씬 더 많은 책임이 노동자에게 전가되었던 것과는 달리, 경영진은 노동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업무를 전부 담당한다.

테일러의 의도는 공장 시설의 운영을 능률화하고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흔들림 없는 기계처럼 여기게 되거나, 노동력의 인간성을 말살하게 되었으며, 노동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교한 기술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1939: 최초의 신시사이저가 등장하다


호머 더들리와 보조가 1939년도 뉴욕세계박람회에서 보더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보더(Voder)는 원조인 보코더(Vocoder)의 간소화된 버전으로, 엔지니어인 호머 더들리(Homer Durdely)가 개발하여 주로 군용 커뮤니케이션 목적으로 사용된 기계였습니다. 보코더는 최초의 전자 음성합성기(신시사이저)로 목소리를 주파수로 출력해줍니다. 반면 보더는 음성 인풋을 사용하지 않고 전기 자극만을 인풋으로 사용했습니다. 인간이 스피치를 할 때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이 기계가 처음이었습니다.


1945: 버니바부시, “우리가 생각한 대로”라는 글을 기고해


어떤 사람은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예언자적인 디자인 씽커(design thinker)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기술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가 생각한 대로(As We May Think)”라는 글에서 정리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전쟁과 관련된 기술 개선에 집중했었습니다. 부시는 전쟁의 시대가 끝나감을 보면서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 힘만 발전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도 강화해줄 흥미로운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그 기고글에서 부시는 사진 기술, 정보의 조직과 저장, 정보의 사용, 텔레비전, 사운드 신시사이저 등과 같은 토픽을 다뤘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만한 개념은 메멕스(Memex)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이 사용하게 될 미래의 디바이스를 생각해보자. 일종의 개인적인 파일과 라이브러리를 기계화한 것이다. 이를 부를 이름이 필요할 텐데, “메멕스(memex)”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메멕스는 개인이 자신의 모든 책, 기록물, 의사소통 등을 저장할 수 있는 기기로, 기계화되어 있어서 속도와 유연성이 굉장할 것이다. 인간의 기억력을 보강해주는 친숙한 보조장치가 되는 것이다.”




버니바 부시(좌)와 1945년 출판된 “우리가 생각한 대로”에 게재된 메멕스 다이어그램(우)


1945-1959: 애니악,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많은 여성들이 유능한 수학자로 활약하며 전쟁에 필요한 기술 개발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중대한 공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전문성은 핵심 컴퓨터 기능 개발에 반드시 필요했었습니다.


1945년, 진 제닝스 바틱(Jean Jennings Bartik)은 물리학자 존 모클리(John Mauchl)에게 애니악(Electronic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ENIAC)이라는 새로운 기기와 관련된 일자리를 제안받습니다. 애니악은 최초의 전자식 범용 디지털 컴퓨터였습니다. 바틱은 포탄의 탄도 추적 프로젝트에서 일했던 여섯 명의 여성 수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애니악으로 프로그래밍 중인 진 제닝스 바틱(좌)와 프란시스 빌라스 스펜스(우)



(왼쪽부터)애니악 보드를 들고 있는 팻시 시머스, 에드박 보드를 들고있는 게일 테일러, 오드박을 들고 있는 밀리 백, BRLESC-I 보드를 들고 있는 노마 스텍.


이 여섯 명의 여성은 나중에 바사 대학(Vassa College)의 교수인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와 함께 일하게 됩니다. 호퍼는 코블(Common Business Oriented Language, COBOL)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했습니다. 주로 과학 기술 계산용으로 사용되던 포트란(FORTRAN)과 다르게, 코블은 주로 사업적인 목적으로, 많은 양의 데이터와 리포트를 관리하기 위해 숫자 대신 문자를 사용합니다.



1950년, 메인 프레임룸에 있는 그레이스 호퍼


코블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흉내내면서도 판독하기 쉬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1955: 헨리 드레이퍼스와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


헨리 드레이퍼스(Henry Dreyfuss)는 미국인 산업디자이너이자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Designing for People)>의 저자입니다.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은 사람과 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책입니다. 여기서 그는 “사람을 기계에 맞추지 말고 기계를 사람에게 맞춰라”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앨빈 틸리(AlvinR. Tilley)의 도움으로 드레이퍼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됩니다.



앨빈 틸리가 그린 평균적인 미국인. 후에 출간된  에 실림.

드레이퍼스의 글과 틸리의 그림으로 인해 유니버설 디자인 무브먼트, 휴먼 스케일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인체공학 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실무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새롭게 등장한 인체공학적 디자이너들은 인간과 기계가 만다는 공간을 “인터페이스”라고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드레이퍼스의 업적은 오늘날 인터랙션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1963: 더글라스 엥겔바트와 최초의 마우스 발명


더글라스 엥겔바트는 컴퓨터의 태동기에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컴퓨터는 가장 작은 컴퓨터고 방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크기가 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레이더 기술자로 활동했던 엥겔바트는 필리핀의 도서관에서 한 글을 우연히 마주치고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 글은 바로 메멕스에 대한 얘기가 나왔던 버니바 부시의 “우리가 생각한 대로”였습니다. 이 글을 보고 엥겔바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게 될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바로 컴퓨터 마우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죠.



1968년 출시된 최초의 마우스 프로토타입을 들고 있는 더글라스 엥겔바트(좌)와 마우스 상세 이미지(우)


엥겔바트는 컴퓨터 디스플레이에 보이는 커서를 움직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구상해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마스터하지 못했던 것이었죠. 그는 마침내 프로토타입을 개발했고, 1968년 “Mother of All Demos” 에서 선보이게 됩니다. 이 마우스는 유저와 기술자가 코드를 전혀 쓰지 않고도 메뉴나 기타 인터페이스 툴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엥겔바트는 타고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획기적인 발명 외에도 다른 선구적인 아이디어도 내놓았습니다. 1960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고체회로 학회에서 그는 피할 수 없는 기술적 혁신을 통해 물리적으로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때까지 컴퓨터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5년 후, 이 아이디어는 엥겔바트의 이름이 아닌 인텔의 공동창업자였던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따서 “무어의 법칙(Moore’s Law)”으로 불리게 됩니다. 4


1965-1969: 최초의 터치스크린


<Touch Display — A Novel Input/Output Device for Computers>라는 논문에서 E.A. 존슨(E.A. Johnson)이 처음 소개한 터치 스크린 기술은 점차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람들이 컴퓨터 스크린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존슨은 오늘날 정전식 스크린이라고 부르는 유형의 터치스크린을 제시했었습니다. 그는 1969년 이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를 냈으며, 이는 후에 1973년 영국의 RRE(RoyalRadar Establishment)에서 레이더 스크린을 개발하는 데 사용됩니다.



존슨의 터치 디스플레이 특허에 들어간 그림


이런 유형의 터치스크린 기술은 저항 접촉식 터치스크린이 유행하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사용됩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에 애플의 제품이 유명해지면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1973: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와 최초의 GUI


프린터와 종이 생산 선두 업체였던 제록스는 기술 혁명에 합류하게 되면서 새로운 컴퓨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팔로알토 리서치 센터(Palo Alto Research Center, PARC)를 설립하게 됩니다. 1973년 이곳에서 뛰어난 과학자들이 모여 최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인 제록스 알토를 디자인하고 만들게 됩니다.

알토는 상업적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대당 생산하는 데 대략 $12,000 정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했지만 최첨단 마우스 기술을 활용하여 보이는 대로 출력된다는 위지윅(WYSIWYG) 스타일의 직관적인 편집 기능을 제공하여 유저가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제록스 알토


알토는 컴퓨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극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명확한 프로세스 덕분에 유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스크린에서 보인 그대로 프린트할 수 있게 됩니다. 삭제 가능 데이터 저장 기능과 이메일 기능 등도 제공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해준 것이죠.


제록스의 발명은 업계 전체가 ‘누가 물리적인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컴퓨터를 더 빠르고, 더 작고, 더 사용하기 쉬운 기계로 만들 것인가’ 경쟁하는 경주에 뛰어들게 하는 신호탄이 됩니다.


1979: 제록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보며 제록스는 자신들의 사업이 구식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미 그 해결책을 만들어 놓고도 말입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인해 제록스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천재들을 고용하는 데 열을 올리게 됩니다.


PARC는 전국의 뛰어난 과학자와 수학자의 절반 이상을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기술이 나아가고 있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알토는 경영진의 승인을 받기엔 너무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제록스의 리더들은 이 기술이 얼마나 혁신적인지에 대한 이해나 비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였습니다. 애플은 제록스와 1백만 달러의 애플 주식을 주고 제록스의 GUI 프로토타입 기술을 사들이는 거래를 하게 됩니다.


1979: 빌모그릿지가 최초의 노트북 컴퓨터의 프로토타입을 만들다

 

최초의 노트북, 그리드 콤파스


1979년, 빌 모그릿지(Bill Moggridge)는 그리드 시스템즈(GRiD Systems Corporation)라는 회사에게 새로운 유형의 이동식 컴퓨터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게 됩니다. 2년 후 ‘그리드 콤파스(GRiD Compass)’라는 프로토타입이 출시됩니다. 생산하기에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처음엔 정부, 상류층, 우주 탐사 프로그램에서 예약해서 사용하게 됩니다. 모그리지는 후에 디자인 커뮤니티에선 누구나 아는 디자인 회사인 IDEO의 공동 창업자가 됩니다.

1981: IBM PC, 최초로 업계 전반으로 퍼진 개인용 컴퓨터가 되다


1981년 IBM은 컴퓨터 업계에서 “빅 브라더”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개인용 컴퓨터를 출시했을 당시, 찰리 채플린을 고용하여 “이해하기 쉬운” 면을 홍보합니다.



IBM은 신제품 IBM 5150을 찰리 채플린의 도움을 받아 홍보했다


IBM의 마케팅 전략이 똑똑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출시했던 제품은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가격도 적절했으며, 작고, 접근하기 쉬운 “IBM PC는 업계 전반에서 널리 수용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가 되면서 비즈니스 컴퓨팅을 혁신”하게 됩니다.


IBM PC는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운영체제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두 거대 기업 사이의 지배적인 관계를 낳게 됩니다.


1982: 컴팩 포터블


컴팩(Compaq)이라는 당시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경쟁사가 있었는데, IBM의 PC에 영감을 받은 컴팩은 이동식 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이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IBM PC의 “운반할 수 있는” 버전이었습니다. 이 28파운드짜리 섬세하게 디자인된 컴퓨터서 빠르게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회사 역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됩니다.



컴팩의 포터블


1984: 매킨토시(OS 시스템 1.0)


1984년도 매킨토시 128k 광고(좌), 최초의 맥 컴퓨터와 스티브 잡스(우)


이전에도 많은 개인용 컴퓨터 모델이 나왔었지만, 매킨토시의 출시는 사람들이 가진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잡스는 IBM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게 두지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했을 때, 대중은 환호를 보내게 됩니다. 상징적인 “hello”  스크린은 애플의 “For the rest of us”라는 제품 슬로건과 함께 소비자들 사이에서 신뢰와 믿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애플은 컴퓨터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이나 위협을 받거나 냉소하지 않고도 환영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죠.


1988: 9개의 대형 제조사와 EISA


IBM 호환 제품을 만들던 제조사의 경쟁이 심해지자 IBM은 MCA(MicroChannel Architecture)라는 규격을 만들어 저작권을 등록합니다.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이전 버전의 PC와는 더 이상 호환되지도 않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전의 기준을 중심으로 사업해 오던 많은 업체에게 문제를 안겨주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고, 결국 IBM이 도입한 새로운 기준은 실패하게 됩니다. IBM의 결정에 대항하여, IBM 호환 컴퓨터를 만들던 9개의 제조사는 함께 단합하여 자신들만의 기준인 EISA(Extended Industry Standard Architecture)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EISA는 이전 버전과 호환이 될 뿐만 아니라 업체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1993: 애플 뉴튼 실패


1992년, IBM은 씽크패드(ThinkPad)를 출시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애플도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애플의 뉴튼(Newton)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팩스를 보내고, 필기를 저장하고, 연락처를 저장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주머니 속에 딱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기능이 많았는데, 여기다가 애플은 ‘필기 인식’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추가하게 됩니다. 사용자가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스타일러스 펜도 제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콘셉트는 큰 가능성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불행하게도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 자체가 너무 일관적이지 못해 이 프로젝트는 중단됩니다. 좋지 않게 끝났지만, 진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이 용감한 실패로, 뉴튼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됩니다.



뉴튼을 조롱했던 둔즈베리 만화


1995: “사용자 경험 건축가” 돈 노먼


돈 노먼(Don Norman)은 거의 5년가량 애플에서 일을 했습니다. 재직기간 동안, 노먼은 “사용자 경험 건축가”라는 직책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먼은 인간 중심 디자인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충분히 숙련된 기술의 지원 하에서 말이죠. 노먼은 사용자 경험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는 당신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자, 당신의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며, 서비스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사용자 경험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기술과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과 필요에 부합한 기술을 맞드는데 관심을 두게 됩니다.


1998: 첫 번째 아이맥과 그 후의 진화


미래지향적이고, 컬러풀하고, 독창적이다. 최초의 아이맥(iMac) 디자인은 그 이전까지 출시되었던 어떤 컴퓨터와도 같지 않았습니다. 반투명에 컬러풀한 플라스틱은 “숨길 것이 없다”는 격언을 소비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신뢰와 이해라는 성숙한 관계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출시되고 20년가량 지났는데, 미래지향적이었던 첫 번째 아이맥 디자인은 얇고 매끄러운 오늘날의 아이맥 디자인에 비해 투박하고 묵직해 보입니다.


2000: 초창기 카메라폰, J폰, 그리고 “줄이기”


생산업체에서 계속해서 추가적인 기능을 작은 제품 안에 밀어 넣으면서, 폰은 새로운 생활필수품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J폰(J-Phone)은 모든 사람들이 주머니 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었는데, 이후 수많은 업체에서 보자 콤팩트하면서도 스크린이 넒으면서 더 많은 기능(앱, 비디오 챗, 게임, 무선 인터넷 등)을 담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위 사진은 재미있는 사진이긴 하지만, 동시에 테크 제품의 “줄어드는” 트렌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도 ‘물리적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미니멀하고, 가볍고, 빠른 제품’을 만들려고 하는 트렌드는 계속되고 있어, 이젠 이런 얘기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할 겁니다.


2001: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XP와 애플 맥 OSX


세기의 전환기에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제품의 운영체제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합니다. 애플은 맥 OSX를, 마이크로소프트의 XP를 출시한 것이죠. 당시 제품의 디자인은 오늘날 운영체제 업그레이드의 기본이 됩니다.





각 운영체제는 각자의 방식대로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일한 정보에 접근하는 경로가 매우 달랐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후로 지금까지 유저들은 스스로에게 “나는 Mac파인가? PC 파인가?”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2010: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도입


2010년 애플은 새로운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소개합니다. 인치 당 두 배 많은 CSS 픽셀을 담아내는 고밀도 디스플레이로, 스크린 상의 서체와 이미지를 더 깔끔하게 보여줍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우리가 사용할 기회가 있는 스크린들 – 데스크톱, 태블릿, 폰, 스마트와치, 글라스 등 - 과 소통하시는 방식을 혁신시켜 왔습니다. 인터페이스 관점에서 물리적인 디바이스가 발전할 수 있는 끝까지 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유저 인터페이스 발전의 중요성이 소비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중요함을 강조해줍니다.


현재: 무어 법칙의 정점에서


우리는 점점 무어가 예측한 ‘기술 발전’의 정점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스크린과 프로세서는 발전할 수 있는 데까지 발전했으며, 이제 스크린이 없는 가상 디스플레이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시의 “우리가 생각한 대로”(1945)라는글에서 발췌한 아래 글을 보면, 당시에는 거의 도달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이러한 필연적인 발전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기록 장치를 만들거나 흡수하는 단계가 점점 발전하여 열쇠를 만질 때 느끼는 촉각처럼, 말하거나 들을 때 쓰는 입과 귀처럼, 읽을 때 쓰는 시각처럼, 하나의 감각이 될 것이다. 언젠가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컴퓨터와 소통하기 위해 컨트롤러와 터치 스크린 외의 다른 프로세스를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초기 단계로 들어가게 되면서, “제로 UI”나 “머신 러닝”, “터치리스 테크” 등과 같은 용어가 점점 더 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디바이스는 유저의 지속적인 인풋 없이도 우리의 선호도를 학습하고 피드백을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기술적 성취와의 관계를 재평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무리


유저 인터페이스의 미래를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겠습니다. 이 주제 자체로 새로운 글 하나게 될 테니까요. 대신 한 가지를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엥겔바트의 법칙

인간의 퍼포먼스는 본질적으로 기하급수적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고 계속해서 그것을 뛰어넘어왔습니다. 이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유저 인터페이스 발전의 미래에 있어서 많은 잠재적인 부분은 우리의 열망과 그에 따른 우리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전민수 UX 컨설턴트 소개
(UX 실무 경력: 27년차 UX 전문가: LG전자, 서울시청 등 약 300회 이상 UX 컨설팅 수행)
(UX 강사 경력: 23년차: 삼성, SK, KT 등 약 1,000회 이상 UX 강의 진행)

https://brunch.co.kr/@ebprux/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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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피알유엑스 라이브클래스에서 매월 최소 1개에서 최대 4개 강좌 (온라인) 줌 Live 강좌 진행) (PM/PO/UI/UX/리서치/UX 방법론&프로세스 프레임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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