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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Jan 21. 2024

12월 31일이 뭐 별거라고

어제와 같고 내일도 비슷할 그런 보통의 날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한 감동은 덜해진 지 오래다. 새로운 한 해가 오고 있다는 설렘을 안고 카운트 다운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번에도 억지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올해 오십 줄에 들어선 남편도 나와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12월 29, 30일은 가족이 함께 스키 여행을 다녀왔고 그 여파로 31일은 온 가족이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온 가족이 좁은 집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 보니 별 것 아닌 일로 아이들은 남편의 심기를 건드렸다. 여간해서는 아이들에게 크게 뭐라 하지 않는 남편인데 그날따라 버릇없는 아이들의 말투가 몹시 거슬렸는지 남편은 아이들을 혼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집안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하필 날씨마저 우중충한 것이 그날 우리 집에 흐르던 어둡고 무거운 기류와 닮아있었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럴 건 뭐람~‘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내심 남편과 아이들을 탓했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조용하게 각자의 방에서 자기 할 일들을 하며 오후를 보냈다. 정신없이 바빴던 12월의 스케줄 때문에 밀려있던 집안일을 하느라 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을 먹을 때도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남편은 말없이 식사를 했고 아이들은 분위기를 띄워보려 한 마디씩 건네 보았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이내 끊기고 말았다. 불편했던 식사를 마치고 식구들은 또 각자의 방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열 시가 넘어가자 아이들이 하나둘 내방으로 건너왔다. 마지막 날인데 집 안 분위기가 너무 썰렁하다며 불평하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이제라도 연말 분위기를 느껴보려 티브이를 켰다. 마침 큰 아이가 열광하는 어느 남자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딸들은 흥분, 아니 광분하며 벌떡 일어나 노래하며 춤추기 시작했다. 나는 애들은 애들이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밤중이라 층간 소음이 신경 쓰였지만 마지막 날이니 좀 봐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굳이 아이들을 말리지 않고 나도 바라보며 웃었다.

 

  드디어 제야의 종소리를 위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10,9,8쯤 외쳤을 때 흥분한 막내는 뛰어나가 아빠를 데려왔다. 남편은 마지못해 웃으며 다가와 함께 카운트 다운을 외쳐주었고 새해가 밝았음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아이들과 나를 차례대로 껴안으며 새해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아이들이 잠든 후 우리는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나도 갱년기인가? 요새 기분이 오락가락하네~“ 남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요새 감정이 널을 뛰는 남편을 보며 나도 같은 생각을 했던 터였다.

“남자들도 갱년기 다 겪는대. 오빠도 올 나이지~“


  문득 지금 우리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며 느끼는 신체적인 피로감과 정신적 부담감은 늘 스스로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나이. 그렇게 벌어도 돈은 늘 부족하기만 하고 한창 크는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의무감과 이제는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노후에 대한 책임감은 무겁기만 한데 이제는 우리의 몸까지 예전 같지 않게 자주 아파오는 그런 나이.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차릴 만큼 긴 세월을 함께한 부부라면 나이 들면서 서로에게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이 아닐까. 오늘따라 남편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유난히 눈에 뜨인다.


  2024년 새해가 밝았다. 간단히 떡국을 끓여 아침을 먹고 나니 남편이 오후에 만두를 빚자고 했다. 한창 요리가 재미있을 나이인 초등학생 막내는 신이 났다. 함께 나가 장을 봐오고 남편이 만두 속 재료를 준비하는 동안 보조 역할을 맡은 나는 남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최대한 재빠르고 부지런하게 손을 움직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만두를 빚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만두를 쪄냈다. 처음 쪄낸 만두는 몹시 싱거웠다. 눈치 없는 내가 “많이 싱거운데~” 하자 눈치 빠른 우리 집 애들은 “싱거운 게 좋은 거야 엄마~맛이 깔끔하잖아~”라며 아빠 만두가 역시 최고라고 엄지 척을 한다. 아이들은 쪄내어 나오는 만두마다 깔끔하게 해치웠다. 물론 간장을 듬뿍 찍어서.

  

 그날 나는 성실한 보조답게 종일 서서 만두를 쪄내고 어질러진 부엌을 치우면서도 얼굴에 표정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만두를 빚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귀찮은 일을 자처해서라도 새해 첫날을 가족과 함께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던 남편의 마음을 잘 알기에.


 주말 부부에 툭하면 열흘 넘게 해외 출장을 가는 남편과 나는 평소에도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힘들었던 그 부분이 이제는 우리 부부에게 익숙한 삶의 패턴이 되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의 일에 더 집중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해 재충전한다면 서로가 다시 만났을 때 내면의 성숙함을 가지고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부부가 나이 들어갈수록 가장 지켜야 하는 건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그러고 보면 남편은 늘 긴 출장을 떠나기 전, 우리에게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해주곤 했다. 며칠 전 라스베이거스 출장을 떠나기 전날에도 남편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탈리안 요리를 코스로 선보여 주고 떠났다. 아마 자신의 긴 부재가 혹시나 식구들에게 폐가 될까 걱정되고 미안한 남편의 마음이다. 요리에 취미가 없고 더구나 깊은 맛을 내야 하는 한국 요리에는 똥손인 나도 긴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는 늘 조촐하지만 한식 밥상으로 그 마음에 보답을 한다.


거창하게 결심하는 새해 다짐보다 어제와 같고 내일도 비슷할, 소란하지만 평범한 보통의 날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최대한 찰나의 행복을 느리며 살다 보면 우리 부부에게 찾아올 갱년기도 어느새 차례대로 지나가겠지. 좀 덜 소란한 날들과 더 소란한 날들을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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