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00시 00분.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조용히 새장 문을 연다.
컴퓨터를 켜고, 해오라기를 찾아 딸깍딸깍,
두 번의 클릭으로 녀석을 깨운다.
고3 가을.
완벽한 이과형 인간이었던 내가 처음 치른 논술 시험에서 1등을 해버렸다. 물론 한 번뿐인 영광이었지만. 그 후로는 글을 쓴다는 것이 그냥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전공은 물리학이지만 인문대학의 교양수업을 혼자서 찾아들었다. 강의실 안에 자연대 학생은 나뿐, 그래도 씩씩한 아웃사이더로 잘 버텼다.
모두가 월드컵에 빠져있던 2002년에 나는 다른 곳에 홀렸다. 우연히 TV에서 본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한 줄의 광고 카피가 순식간에 화면에서 튀어나오더니 내 머리에 꽂혀 버렸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듯이 말이다. 나는 그대로 사랑에 빠지듯 광고카피에 매료되었다. 사람들의 잔잔한 마음에 회오리를 만드는 짧고 강력한 한 문장, 그 심플하면서도 심오한 한 줄을 나도 만들고 싶었다.
대학 시절의 내 안에 반짝이던 꿈, 카피라이터다. 느닷없이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신문방송학을 부전공하고 각종 공모전에 출품을 하며 바쁜 3, 4학년을 보 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는 행운이 나에겐 없었다. 공모전에서는 줄줄이 떨어졌고, 수학 강사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의 학생 수는 점점 늘어나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현실과 타협하고 잘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덧 나이 사십이 훌쩍이다. 풋풋한 시절의 나의 꿈은 빛을 잃었지만 좋아하던 글쓰기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 고이 모셔 두었다. 지금은 들지 않지만 언젠가는 다시 쓸 것 같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유행 지난 값비싼 명품백처럼.
스물아홉,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대학 1학년때부터 강사 일을 했기 때문에 나의 대학 시간표는 늘 1교시부터 줄줄이 연강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오후 3시가 되면 학교 근처의 수학학원으로 출근, 그리곤 밤늦게까지 강의를 했다. 졸업 후에는 수성구로 학원을 옮겨 더 늦게까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을 쉰 적도 제대로 된 휴가를 간 적도 없었다. 20대의 마지막 해에 결혼과 함께 얻은 일주일의 휴가, 그렇게 첫 여행을 가게 되었다. 허니문 비용이 공양미삼백석이었던가. 여행의 재미에 눈을 떠버린 나는 해마다 여행을 다니며 반짝이는 꿈 하나를 다시 품게 되었다. 아줌마와 할머니 사이, 할줌마 정도의 포지션이 되었을 때 모든 일을 정리하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 지구별을 마실 다니는 여행작가, 이것이 내 안에서 빛을 내고 있는 두 번째 꿈이다.
'나를 찾아가는 인생 글쓰기' 도서관 문화강좌의 이름이 이리 낭만적이라니, 반칙이다. 지금 운영하는 수학 학원의 일도 많아 선뜻 수강하지 못하는 나에게 '나를 찾아가는'이 뒷덜미를 잡더니 ‘인생 글쓰기'가 다리를 걸어 버린다. 보기 좋게 엎어진 나는 결국 수강신청을 했다. 수선화 같은 선생님은 훌륭한 작가의 글을 소개해 주시고 글쓰기의 방법도 알려 주신다. 그리고 다음 수업까지 글쓰기의 잔향을 품고 있도록 매시간 과제를 내주신다. 짧은 에세이 쓰기가 그것이다. 수업은 목요일, 데드라인에 임박해야 추진력이 살아나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 나는 수요일 밤이 되면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곤 일주일 동안 머릿속에 떠돌던 생각들을 써 내려간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내 안에 잠들어있던 꿈에 전류가 흐른다.
스위치 온. 잠잠하던 녀석이 반짝반짝 기분 좋은 신호를 보낸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의 최선을 다한 후 저장하기를 누른다.
내 에세이가 저장되는 곳, 해오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