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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두 발로 꿈을 청산하다  

꽃을 피우기 위해 담배를 피운 천경자  

나는 세 살 때부터 담배셔틀이었다. 담배 사 올 돈을 받아 들고 동네 슈퍼에 가서 ‘담배 하나 주세요’ 이러면 가게주인이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은 안 보였다’는 후문이다. 아빠는 골초였고 우리 형제들이 최초로 했던 경쟁은 담배 사러 가는 사람으로 뽑히기다. 나를 뽑아줄 확률이 불확실할수록 욕망은 부풀었다. 간택되지 않아도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유아기의 나는 할 수 없었다. ‘픽미픽미픽미업’의 막무가내 경쟁에는 비교적 평등한 기회는 있었으나 공정한 과정이나 정의로운 결과는 없었다. 다만 랜덤으로 주어지는 순간적 희열과 5분 안팎의 찰나적 열패감이 엄마를 웃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싶은 아빠의 열정은 담배를 사 오고 싶은 나의 열정을 능가한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모르핀 같은 것이었을까. 일곱 식구의 밥을 벌어와야만 하는 가장의 고충은 하얗고 구수한 연기로 치환되어 집안 가득 흰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꽃이 필 때나 꽃이 질 때나 아빠의 손가락에는 하얗고 이쁜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남자를 선택했던 엄마는 스스로 생명을 단축하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며 묵묵히 담뱃재를 치웠다. 손가락과 입술 사이에서 분주히 제 몸을 태운 담배는 창작의 고통을 위해 필요한 만큼 소진되었고 담배연기 버블이 클수록 가장 빨리 원고지는 메꿔졌다. 아빠라는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 담배라는 연료가 주입되는 밥벌이의 엄숙한 시스템에 한낱 셔틀로서 참여하며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중독적이었다. 서재의 원고지는 아빠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담배가 채우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나는 스스로의 담배셔틀을 하고 있었다. 일곱 식구가 아니라 오로지 내 걱정만 하는데도 담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자식들 중 하나쯤 담배를 피워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다. 끽연가 직장상사와 담배회의를 했고 비행기를 갈아탈 때도 상무님을 따라서 흡연구역까지 가는 동안 꽤 설레었다. 아빠와 나는 호방하지 않은 자가 취하기에 적당한 삶의 형식으로서 담배를 채택해서 삶이라는 음악을 정지했다가 재생해 가며 살았던 것 같다. 우리가 함께 담배를 피운 적은 없지만 내 손가락에 걸쳐져 있던 담배 한 자락은 아빠의 손가락 같았다. 아빠 같은 눈코입을 하고 아빠처럼 담배를 피웠던 나를 아빠의 지인들은 목격했고 함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본격적으로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며 아빠가 다녔던 광고회사에 ‘낙하’하면서부터다. 아빠가 다녔던 직장에서 같은 업을 하기 위해 감수할 것들이 내게 준 무게가 모두 담배연기로 피어올랐다. 셋째 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아빠 몰래 그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낮에는 담배, 저녁에는 술로 2년여의 하루를 꽉꽉 채우고 가족의 의견 등에 연연하지 않고 나만을 삶을 위해 영화업계로 옮겨갔다. 이때 아빠로부터는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와 아빠는 혈연관계에도 불구하고 각자 한 점으로 존재했을 뿐,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안타까운 관계임을 서로 분명하게 느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 살아낸 순간들에는 한 줄기 담배연기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흘렀고 아빠 없는 세상에서 딸은 담배연기를 맡을 때마다 그리움마저 어정쩡한 부녀관계의 냄새를 조심조심 맡는다.


박경리는 ‘천경자의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다’고 썼다. 아버지의 파산과 다복하다고 할 수 없는 두 번의 결혼 등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따라가다가 끊었던 담배를 한 갑 샀다. 그녀의 담배는 누가 봐도 멋들어진 주윤발의 담배도 아니고 잘 나가는 여자 부장님의 담배처럼 과시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인생을 투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담배가 아니었을까. 몸속에 안 좋은 기운을 한숨 불어넣음으로써 이미 자리하고 있던 더 독한 시름을 빼내는 것이 담배의 소임이었을 것이다.  



천경자라는 독특한 인물을 만나려면 사랑으로 인한 그녀의 고독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녀는 결코 계산이 맞지 않는 불리한 사랑만을 했다. 운명처럼 구애해 왔던 시크하고 창백한 사랑이 한국전쟁통에 실종되어 떠나갔고 받지 못한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대신에 눈앞에 현실을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홀로 남겨진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해야만 했고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고독을 담배와 그림으로 감당해 냈다. 아버지와 친정 식구들, 두 명의 남편과 낳은 네 명의 자식들을 모두 혼자서 부양했다는 사실과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 마음이 아련해진다. 근현대판 슈퍼우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인간 천경자에 대한 세간의 뾰족한 평가들은 적어도 내게는 무효다. 


아이들을 남기고 떠난 남자가 연달아 둘이나 되고 보면 세속의 계산상 엄청난 손해다. 사랑은 정확한 감정이지만 이처럼 헤게모니가 잔혹한 관계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배하는 둘만의 권력관계에 제삼자가 납득할 만한 지당한 이유는 종종 없다. 한쪽이 더 사랑한 채로 한계치에 도달하면 사랑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택일을 하게 마련이다. 많이 받았다고 해서 혹은 많은 걸 받을 수 있어서 그 사랑을 택해야 한다면 세계 평화를 위한 덤덤한 수용이거나 온정 어린 의리에 가깝겠지만 사랑의 알맹이 안에는 의리도 없고 종종 오답에 가까운 결과가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다.


사랑을 정량화하거나 객관화할 수 있다면 계산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받은 사랑의 총합과 준 사랑의 총합을 구한 후 누가 더 사랑한 지를 따진다면 말이다. 인간에게는 자기애라는 취약점이 있어서 내가 유리한 쪽으로 편집된 나의 기억은 동시간 타자의 관점으로 옮겨지면 늘 부정확하다.  상대방의 관점의 허술함을 파악해야만 내 기억에 대한 회의도 들게 마련이다. 사랑이라고 착각한 관계만큼 많은 편견과 억측을 소진하는 경우도 없다. 그가 그저 좋은 내 마음을 다른 이성적 이유로 대체해 가며 돌려 막다가 결국 같은 이유로 같은 사람을 싫어하기 마련인 아이러니가 통속적 사랑의 사이클인 것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으로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자격을 선사해 주어야 한다. 뻔한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감정의 소용돌이같은 것에 어찌 팩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당사자들은 의견을 사실처럼 말할 뿐이고 주관적 기준에서는 모두 각자의 관점과 계산이 가장 옳다.


그녀가 천성적으로 나르시시스트였는지 아니면 누가 들어도 드라마틱하고 들쭉날쭉한 인생사를 통하다 보니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영원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제목으로 천경자의 전시가 상설 중이다.  도슨트는 생애의 주요한 이력을 언급하며 개인사에 대해선 언급을 아낀다.  나르스시스트의 지옥은 바로 자기 자신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타인을 접수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여의치 않은 시스템으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천경자는 통속적 의미에서 더 많이 주었을 뿐 받는 건 없었던 사랑을 했던, 어쩌면 나르시시스트라기엔 너무나 대인배였던 사랑을 했다.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한 관계가 부실할 때는 혼자여서 느끼는 고독감보다 두 배쯤 더 무겁고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전답을 날린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어쩌면 경제능력이 부족한 이철식과 결혼해서 1남 1녀를 혼자 키운 일도 흔치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나마 젊은 에너지로 어찌어찌 충당해 갔을 것 같다. 하지만 일생일대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두 번째의 인연마저 자신에게 오롯이 주어지지 못했을 때 그녀의 삶은 연기자 욱한 긴 터널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유부남과 혼인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출산 후였다니 세상이 두세번 내려 앉는 고통과 배신감으로 컴컴했을 게 뻔하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개인의 한계치에 달할 때마다 조금씩 한계치를 넘어섰다는 증거가 그림으로 수두룩 빽빽하게 남아있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를 위해 나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편을 들어주고 싶다. 패배하고 버려지고 가슴이 갈가리 찢긴 맘으로 초점이 몽롱한 여인을 그리고 화관을 씌우고 작고 예쁜 담배를 그려 넣는 외로운 손을 떠올려본다.  미술계의 누구도 쉬이 믿지 못하게 된 두려워하는 눈빛에도 가슴이 탈 때마다 피웠던 담배에도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색적이고 화려하고 신나는 장면에도 마른 몸을 휘감은 호피무늬의 파격적 의상도 그림 속의 슬픈 눈동자만큼 진솔하게 그녀를 대변해 주지 않고 있다. 그림 속 고독한 그녀는 환한 웃음의 여인들보다 더 위로가 된다.


사랑에 패배할수록 인생에서는 한 발자국 나아갔던 천경자의 인생에 스티븐 호킹의 <만물의 법칙>이 연결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스티븐 호킹의 이론은 세상만사 모든 것들의 작동원리이기도 하다. 매 순간 만나는 아주 작은 한계치를 아주 조금 넘어보는 것, 그게 인간이 생을 돌파해 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 행위 속에 모든 에너지와 사랑이 존재한다. 천경자는 떠나가는 사랑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 자신을 택했다. 붓과 물감에 의지해 매일매일 조금씩 한계치를 경신했고 그 점들이 연결되어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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