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의 글로벌 히치하이킹, 꿈을 좇아 5

5부. 말이 아닌, 보여주는 사람

by Coo Lee

2학년의 문이 열리자, 또 한 번의 생존 경쟁이 시작됐다.

MBA의 마지막 관문이자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건 구직 레이스였다.

10월까지 목표 기업에 레주메(이력서)를 제출하고,

11월부터 초청된 인터뷰(면접)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시기는 최악이었다.

9·11 사태 이후, 경제는 얼어붙고

취업 시장도 순식간에 빙하기로 굳어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선배들은 오퍼를 골라 받던 호황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받았던 오퍼마저 취소됐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캠퍼스 전체가 보이지 않는 불안의 안개에 휩싸였다.


그는 어렵게 몇 개의 면접 기회를 얻었다.

수많은 거절 끝에 잡은 기회였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밤마다 기업 정보를 분석하고,

면접 예상 질문을 수십 번 반복했다.

면접이 가까워지자 절박함은 더욱 커져갔다.


어느 날 오후, 수업을 마치고 긴장된 마음으로 면접실에 들어섰다.

면접은 시작부터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첫 질문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마케팅 경력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마케팅을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논리를 세워 설명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면접관이 짧게 응답했다.


“말로 하지 말고, 보여주세요.”


순간, 공기가 더욱 냉랭해졌다.

그가 두어 마디 설명을 덧붙이자,

면접관이 다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보여 달라구요.”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장이 요동쳤다.

‘여기서 뭘, 어떻게 보여주란 말인가.’

그때, 면접관의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보여주십시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머릿속은 미친 듯이 회전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한 생각이 스쳤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맡겨둔 가방을 열어 뒤적이는 손끝이 떨렸다.

손끝에 닿은 한 권의 보고서.

‘그래, 이거다.’


숨을 고르고 돌아와 보고서를 건넸다.


“마케팅 핵심 과목 프로젝트 리포트입니다.

맨 앞장에 오늘 나온 점수가 적혀 있습니다.

교수님이 90점을 넘긴 두 명만 칭찬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저였습니다.

수강생 중 아시아계는 저 혼자였고,

언어와 수학적 분석이 모두 중요한 과목에서

서툰 영어로 이 점수를 받았다는 건,

저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면접관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그제서야 면접관의 동양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묘한 공감의 기류가 스쳤다.


도서관에서 가시지 않은 여운을 진정시키고,

저녁이 깊어갈 무렵 집으로 향했다.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떴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자,

수화기 너머로 단 한마디가 들렸다.


“Congratulations.”


그 한마디가 전류처럼 온몸을 타고 번졌다.

1차 합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빠른 통보에 기쁨과 설렘이 뒤섞였다.

그는 멀리 차창 밖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그다음이었다.

바로 옆 주(州)의 본사 근처 호텔에서 2차 면접 일정이 잡혔다.

그런데 하필, 다른 회사의 2차 면접이 중서부 도시에 먼저 있었다.

하나는 비행기로, 다른 하나는 차로 이동해야 했다.

두 일정이 아슬아슬하게 겹쳐 있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두 번째 회사의 면접 일정을 몇 시간 늦춰 달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차가운 답장이 돌아왔다.

일정은 연기해 줬지만, 대신 2명이었던 면접관이 5명으로 늘었다.

메일 속 한 단어가 눈에 박혔다.


Commitment.


그의 진정성을 시험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중서부에서 열린 첫 번째 회사 면접에서 그는 벌써 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쉴 틈은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두 번째 회사 면접장으로 차를 몰았다.


토요일 늦은 오후, 첫 번째 면접은 무난히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두 번째 면접관이 면접 도중 전화를 걸었다.

“한국인 후보를 인터뷰 중인데, 한국 사장님이 명단에서 빠져 있네요.

잠깐 모실 수 있을까요?”

얼마 후, 미국에 와 있던 인도계 한국 지사장이 들어왔다.

지사장의 면접 일정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그가 말했다.

“이따 점심시간에 짧게 인터뷰합시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채,

다섯 명의 글로벌 리더와 연이어 면접을 치렀다.


마지막 면접이 끝난 저녁,

끼니도 잊은 채

지친 몸으로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온종일 이어진 긴장감 속에서

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핸드폰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였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긴장으로 조여왔다.

몇 번의 벨을 흘리고 나서야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appreciated… Congratulations!”


순간, 차창 밖 세상이 눈부시게 터져 나왔다.

가슴속 깊이 눌러뒀던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한순간, 차 안은 고요 속에 잠겼다.

모든 긴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날은 2001년 11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세상이 얼어붙은 그때,

그는 세계에서 마케팅으로 가장 유명한 기업 중 하나로부터

봄빛 같은 합격 소식을 받았다.


넘지 못할 산처럼 앞을 가로막았던 언어의 이중 장벽.

낙제의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일생일사의 순간들.

자존심을 짓밟아야 했던 인턴십의 기억.

그 모든 장면이

색 바랜 흑백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그는, 절망의 끝에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 전투에서 기적처럼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합격이 아니었다.

무너졌던 자존감이 다시 타오른 봉화였다.


그는 커리어뿐 아니라 성적에서도,

실패의 그림자를 완전히 넘어섰다.

1학년에는 재적 위기까지 몰렸지만,

2학년에는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자신을 무너뜨렸던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무대에서

그는 새로운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날의 승리는 한 번의 합격이나 학점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나’의 선언이었다.


그 선언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배움의 여정이 펼쳐지는 시작이었다.

그렇게, 글로벌 히치하이킹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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