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책을 읽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늘의 일기

by 더티너디

어쩌다 보니 시간이 남았다.

온라인으로 예매할 때는 오후 1시부터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강연은 사전 예매를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공연은 오후 5시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전에 갔던 중국집을 갔다. 요리 이름이 사자성어처럼 생긴 중국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명칭이 생각나지 않아 중국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후엔 커피집으로 갔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이방인은 별점이 제일 높은 곳을 고를 수밖에 없다. 잘못된 후기에 여러 번 얻어맞았지만, 아직은 후기에 실려있는 그들의 진심을 믿는다. 돈도 안 받는 그들의 글에 실린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끓다 못해 터져 나온 분노로 인한 복수심이거나 뜻밖의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간증. 뭐가 되었든 간에 그 농도가 진하다.


커피집에 들어서자마자 후기 홍보가 보인다. 후기를 남기면 신선한 원두로 만든 드립백을 준다고 한다. 별점이 4.8점인 이유가 있었다. 누가 공짜 드립백을 받으며 3점을 주겠는가. 4점을 주는 것도 나를 비참한 냉혈한으로 만드는데. 하지만 카페는 좋았다. 어차피 나는 커피 맛은 모른다. 그곳에서 읽은 '파리의 부엌'이라는 책이 좋았다. 그런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준 그 장소가 좋았다.

오랜만에 독립 서점도 갔다. 여전히 수많은 책이 매대에 놓여있었다. 전국에 수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더는 책을 사면 안 되었다. 이사를 희망하고 있는데, 내 집에 적재물을 쌓으면 안 된다. 시집 한 권을 조심스럽게 들어 사진을 찍고, 손때를 지우고 돌려놓자. 감성을 충전하는데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었다. 간결하면서 강렬한 제목이다. 나는 왜 3D 프린팅이 연구 분야면서 평생 이런 제목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곧바로 시인 이름과 후기를 검색했다. 남의 이야기를 믿고 사는 게 편하다. 확고한 취향과 예리한 안목은 닳아 없어졌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믿음만 남았다. 하지만 내가 찾던 후기는 없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시집을 들고 왔을 때의 처참한 참여율, 글쓰기 피드백에서 동료의 시를 피드백할 때 느꼈던 난이도를 고려하면 후기가 많을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또 하나의 적재물을 샀다. 환경을 위해서라도 전자책으로 사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만화책도 종이책으로 읽어야만 이해하는 놈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공연장엔 오후 3시쯤 도착했다. 나는 곧장 공연장 옆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이 날씨엔 에어컨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곳엔 테이크아웃이 불가능한, 읽고 싶은 수많은 책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일기를 써야 했다. 강아지 훈련을 하듯, 먹음직스러운 책을 앞에 두고 손! 굴러! 같은 아무런 의미 없는 노동을 해야 했다.

1년 만에 전화한 친구가 나보고 일기를 쓰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알아챌 정도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대상 포진처럼 어렸을 적 척수를 따라 퍼져있는 바이러스는 내가 약해질 때마다 튀어나온다. 진통제를 먹으며 자연치유를 기대하는 것도 이젠 지쳐버렸다. 책 읽기를 그만뒀고, 글쓰기를 멈추고 밖을 나가지도 않았다. 고통이 유일한 감미료가 되어버린 내 삶은 겉만 새까맣게 타버려 이제 버석거릴 일만 남았다. 그렇게 살아도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최근엔 좋은 일이 많았다. 내가 작성한 논문이 운 좋게 좋은 저널에 실려 몇 번 작은 신문에 실렸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이직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그러기 위해선 이력서를 써야 했다. 온종일 이력서를 쓰니 소설을 쓰고 싶어진다. 그 둘이 같은 계열이어서 그런가 보다.


- 발전소가 있는 사막에서 파워슈트를 입은 소년이 좀비 떼 속에서 누나를 찾는 이야기

- 사물을 혼으로 가진 도깨비와 산에서 내려오길 바라던 무당이 벌인 전쟁 속에서,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소년 가장의 이야기

하지만 지금은 종일 이력서를 써야 할 때다. 어차피 이력서를 안 쓸 때도 글을 쓰지는 않았잖아. 한 사람이라도 울고 웃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내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빛나는 재능은 없었고, 노력하기엔 게을렀고, 경험은 부족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회에서 내 몫을 하기엔 충분했고, 취미치고는 과하지 않냐는 평을 들었다.

경력증명서에도 쓸 수 없고 아무도 읽지 않는 글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그 친구는 글을 써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공부하려고 책을 폈는데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더는 숙제를 미룰 수 없다. 그래서 우연히 남겨진 시간에 일기를 썼다. 내가 낼 수 있는 답이 이것밖에 없는 건, 지금까지 게을렀던 나의 탓이겠지.


쓰다 보니 공연이 시작하기 10분 전이다. 오늘도 도서관에 있는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한 바퀴 거닐었다. 어차피 책을 읽고 싶은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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