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이야기가 될게

by 안나

1.

그때 생각나? 유난히 비가 많이 온 날 밤이었어.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너라는 장소를 떠나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던 날 말이야. 너 정말 오래 고민했잖아. 나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지. 마음이라는 장소 한구석에서 지내는 동안 언제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걸까 많이 궁금했었어. 그 속에서 오랫동안 키워지는 것도 좋았지만 나도 먼저 떠난 다른 친구들처럼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날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만들어냈던, 그리고 떨리는 숨소리와 함께 나의 마무리를 빚었던 손 끝과 행복함으로 빛났던 너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해.


2.

아, 말 걸기 전에 소개부터 할걸. 난 너랑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너의 상념이야. 네 속에서 창조되었고, 너를 통해 작품이라는 존재로 만들어져서 세상을 만나는 중이야. 너한테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을 걸었는데, 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3.

난 정해진 장소에서 독자들을 만나. 그리고 너에게 귀속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났대. 네가 날 만들었으니까. 독자들은 날 만나기 위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그것들이 네가 다시 다른 작품들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도 난 알고 있어. 그래서 난 세상에 나가는 걸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 널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예술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4.

있잖아, 저번 달 다녀온 곳 먼저 말해줄까? 사실 너한테 이야기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어. 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퍼할 것 같아서. 그래도 너는 날 만들어낸, 나의 주인이니까 알았으면 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처음 가는 곳이었는데 어딘지는 모르겠더라. 그 순간 한 손짓이 느껴졌어. 정말 음산하고 기분 나쁜 손짓.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손짓으로 나는 끊임없이 분별없이 복사되고 있었어. 복사되는 것들의 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들은 내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아니었어. 나의 모습을 한 공허한 껍데기였던 거지. 그것들을 마주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내 의지와 다르게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럽고 무서웠어. 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렇게 복제되고 흩뿌려지길 원하지 않았는데. 그저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날 복사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모두 나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이었어. 아니, 소비라는 단어도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소비에는 아무런 대가도 따르지 않았으니까. 이들은 너의 가치를 몰랐기에, 내 복사본이 뿌려지는 동안 너의 이름도 기억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아픔을 속에서 참아낼 수밖에 없었어.


5.

사실 말이야, 그때 네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고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퍼하고 무너지는 너가 보였거든. 네 손 끝에서 또 다른 나 같은 친구가 태어났을 때 세상이 다시 그 아이를 함부로 대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느껴졌어.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길까 봐 많이 무서웠을거야.

근데 나는 더 겁났던 게 있어. 네가 다시는 어떤 감정으로도 세상에 우리를 내어놓지 않을 것 같았거든.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꽁꽁 숨겨지고 너는 세상에서 등 돌릴까 봐 무서웠어. 내가 보는 넌 이렇게 반짝반짝하고 소중한 존재인데, 그 빛이 세상에 비치지 않으면 너무 슬프잖아. 그래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


6.

왜냐하면 날 지켜주는 존재도 있었거든.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법률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중에 날 보호하는 법률도 있더라고! 이 친구가 날 나타나서 도와줬는데, 이름이 어려웠는데 뭐였더라... 아! 저작권법이라는 이름이었어. 나와 같은 작품이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였어. 그거 알고 있었어? 나한테도 저작권이라는 것이 붙어있대. 그래서 이 친구가 너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날 지킬 수 있었더라고.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그래서 날 무단으로 복제한 이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즐겼던 이들이 혼나는 것도 봤어. 누구는 몰랐다고 했고, 누구는 그냥 공유한 것뿐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뻔뻔하기도 했어. 하지만 결국 그건 누군가의 시간을 훔치는 일이란 걸 그들도 알게 되었지. 그 사람들, 앞으로 다시 그러지 않겠지? 부디 그러면 좋겠다.


7.

너의 작품으로 태어나서 행복한 순간도 많았어. 수많은 독자와 관객을 만나고 너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과정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시간이야. 그들의 눈빛과 표정이 어떤 다채로움을 띄고 있을지 너는 잘 모르겠지? 어떤 사람은 날 보며 울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기도 해. 한껏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도 보았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법을 준수했던, 너의 예술적 시선들에 대한 가치를 알고 나라는 작품에 대한 존중을 보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 이들의 마음은 내 몸에 하나하나 새겨져 있는데, 너한테도 정말 보여주고 싶다.


8.

내가 이제부터 떠나는 길이 어떨지 잘 모르겠어. 근데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다녀오는 길목에서 너의 이름이 담긴 발자국만 남기고 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전할 열매도 가져오고 싶어. 너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다른 생각들도 세상을 만날 수 있는 힘이 되도록 말이야.

이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왔나 봐. 저기, 날 만들어줘서 고마워. 너에게서 태어난 작품으로서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했어. 앞으로도 날 만든 너의 손길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이 잊지 않게 할게. 그 과정에서 저작권이 나와 너를 지켜줬다는 사실을,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야해,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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