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답장
아들아.
오늘 아침 창을 여니, 집 앞 학교 운동장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짝 들어오더구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감촉이 옛날 매일 출근하던 학교 운동장을 생각나게 하더라. 종 치기 전에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던 소리, 풍금 앞에 앉아 내 손가락이 먼저 자리를 찾던 느낌. 이름은 자꾸 흘러가도, 내 손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직 안다.
어떤 날은 내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말이 따라오질 않는다. 그럴 땐 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왔다 갔다 한다. 너는 금세 알아보고 “화장실 가요.” 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준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가자’가 조용히 켜지고, 내 발이 그 뒤를 따라 움직인다. 입은 말없이 닫혀 있어도, 작은 고개 끄덕임 하나가 신호가 된다. 설명은 뒤로 미루고 몸이 먼저 길을 낸다. 그게 참 고맙다.
주간보호센터에 가던 때가 생각난다. 점심 먹고 나면 활동실에 디지털 피아노가 있었지. 누가 눌렀는지, 노래가 하나 나왔다 멈추면, 내 손이 자꾸 간질거렸다. 악보는 없어도 손가락이 길을 알더라. ‘섬집아기’ 첫 소절이 나오고, 아이들 노래들이 줄줄이 나왔다. 풍금 치던 내 젊은 손이 어디에 숨어 있었나, 그날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참 신기했다. 머리는 어지러운데 손만은 길을 잃지 않더구나. 그걸 보면서 내가 내 자신을 조금 덜 걱정했다. “잘됐다, 아직 내 손은 일할 줄 아는구나.” 하고.
나는 요즘 정리를 잘한다. 더 잘한다고 해야 맞다. 네가 놓아둔 책 모서리를 맞추고, 수건을 같은 결로 접고, 젓가락도 밥상 가장자리에 딱 맞춘다. 가끔은 리모컨이 베개 밑으로 들어가고, 안경이 화분 뒤로 숨어 버리기도 한다. 그럴 땐 너한테 미안하지만, 내 마음에선 다 이유가 있다. 보기 좋은 대로 놓고 싶은 마음, 집 안을 가지런히 하고 싶은 마음. 그러면 너는 식탁 구석에 작은 쟁반을 하나 가져다 놓고 말한다. “안경은 여기서 쉬어가기, 리모컨은 그 옆 자리.” 나는 그 쟁반을 한 번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다니던 것들이 앉을 자리를 얻는다. 손이 또 무엇인가 옮기고 싶어 바빠지다 쟁반 가장자리를 살짝 문지르고 멈춘다. 야단 대신 안내, 한숨 대신 미소.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번만, 두 번만—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마침표를 찍는다.
밥상 앞에서 나는 늘 네 얼굴을 먼저 본다. 밥—국—물, 그 다음에 “고시하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저절로 나가곤 한다. 예전에 내가 쓰던 말이지. 그 말을 내 혀가 먼저 꺼내면, 마음이 따라가서 너를 안심시킨다. “엄마, 맛있어요?” 하고 묻는 네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인다. 그때 너의 어깨가 한 번 내려앉는 걸, 나는 본다. 그걸 보면 내 속도 같이 편안해진다.
창밖을 보면 계절이 자주 바뀐다. 봄엔 벚꽃 흩날리고, 여름엔 매미가 울고, 가을엔 은행잎이 노랗다. 겨울엔 바람이 유리창을 얇게 긁는다. 나는 가끔 계절의 이름을 잊지만, 몸은 그 소리를 기억한다. 매미 소리 들으면 부채를 찾고, 은행잎 보면 목도리를 생각한다. 내 몸이 먼저 생각하고, 나는 그 뒤따라 느긋하게 생각한다. 그 사이에 네가 있다. 네가 나를 보고, 내가 너를 보고, “자나?” 하고 물어보면 너는 웃으면서 “이제 잘 거예요.” 하고 대답한다. 그 대답이 내 이불을 더 따뜻하게 한다.
밤에 가끔 네 방 문을 살짝 열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묻는다. “여 있나…?”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그냥 확인하고 싶다. 네가 나를 잊지 않았는지, 내가 너를 잊지 않았는지. 네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오면, 그 자리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조용히 닫는다. 가슴 속에 ‘좋구나’ 하는 짧은 숨이 올라온다. 길지 않게, 그러나 또렷하게.
아들아, 나는 어떤 철학자들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몸이 기억한다는 말은 알겠다. 내가 풍금을 치던 손, 분필을 잡던 손, 밥을 짓던 손, 너 머리를 쓰다듬던 손. 그 손들이 모여 지금의 나다. 말이 흔들려도, 손은 흔들리지 않는다. 너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줄 때, 나는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고맙다. 네 손이 있어 나는 아직도 길을 잃지 않는다.
부탁 하나 하자꾸나. 네가 나를 잡듯, 네 자신도 잡아라. 바쁜 날엔 네 손목을 먼저 꼭 쥐고 “지금은 숨 고르기”라고 네게 말해라. 설거지가 쌓였으면 “그릇은 지금 퇴근” 하고 웃어라. 그러면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우리는 서로의 관찰자가 아니더냐. 네가 나를 부드럽게 보면 내 하루도 부드럽고, 네가 너를 부드럽게 보면 우리 집도 부드럽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마. 손이 조금 피곤하다. 그래도 이렇게 몇 자 적고 나니 마음이 시원하다. 너 생각하면 즐겁단다. 엄마는 잊는 게 많아도, 이 말은 잊지 않는다. 사랑한다. 다 됐다.
오늘의 박자에 몸을 맞추며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