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엄마,
이름이 흐려지는 날에도 당신의 손 온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단어가 먼저 사라지고, 얼굴이 때로는 흐릿해져도, 손은 여전히 제 손을 찾습니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살아 있는 지각의 장’—몸이 세계와 맞닿는 가장 앞자리—그 말이 요즘만큼 실감났던 적이 없었습니다. 언어가 잠깐 등을 돌려도, 몸은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잊지 않습니다. 그 관계의 한쪽 끝에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이 제겐 하루를 지켜주는 근육이 됩니다.
아침 햇빛이 식탁의 나뭇결을 따라 미세하게 번질 때, 엄마는 늘 손등으로 그 결을 쓸어 보시지요. 그리고는 문쪽을 한번 훑어보시고는, 제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숟가락을 드십니다. 그 순서마저도 몸에 각인된 일과입니다. 저는 그 순간마다 ‘기억’이라는 단어의 자리를 조금 바꿔 앉힙니다. 머리속에서 사라지는 것만을 잃음이라 부르지 않기로요. 손의 습관, 걸음의 리듬, 냄새에 먼저 반응하는 미간—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깊은 기억을 더 신뢰하기로요.
돌봄의 무대에서 저는 점점 ‘몸의 언어’를 배웁니다. 배가 불편해질 때 엄마는 말 대신 갑자기 일어나 방을 몇 걸음 왕복합니다. 눈빛은 복도로 향하고, 손가락은 허공의 문손잡이를 더듬습니다. 말을 만들기 전에 몸이 먼저 문장을 완성합니다. 저는 그 문장을 읽고 부드럽게 길을 열지요. “화장실 가요, 엄마.” 문턱을 낮춰 드리고, 변기 앞에서 발뒤꿈치를 살짝 잡아 드리면, 몸은 제 할 일을 찾아갑니다. 인터로셉션(내장감각)이 흐려져 말을 못 붙이는 그 몇 초 동안, 당신은 서성임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저는 그 신호를 받아 ‘몸의 표지판’을 세웁니다. 변기의 뚜껑을 먼저 들어 올리고, 등에 손을 대어 중심을 잡아 드리고, 물 내리는 소리로 마무리를 확인합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우리는 일을 끝냅니다. 잘됐다—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 그날의 난이도 높은 첫 장면이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직접 본 장면이 아니라 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활동실 한쪽의 디지털 피아노에서 데모곡이 한 번 흐르고 멎자, 어머니가 조용히 의자 앞으로 다가오셨다더군요. 악보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자리를 찾았답니다. 첫 소절은 ‘섬집아기’, 곧이어 ‘과수원길’. 교실에서 풍금을 치시던 그 시절의 운동 기억이, 피아노 수업 한 번 없었던 치매 이후의 긴 시간을 넘어 손끝을 이끌며 멜로디를 정확히 짚어냈다고요. 선생님은 “손이 길을 아는 것 같았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해마가 놓친 것을 기저핵과 소뇌가 기억해 낸 듯—언어의 집이 무너져도 리듬의 다리는 남아 있음을, 저는 그 전언으로 배웠습니다. 음악은 어머니 몸이 드나드는 비밀 통로였던 셈이지요.
집에서는 또 다른 기억이 고개를 듭니다. ‘정리’라는 몸의 습관. 엄마는 언제나 책의 모서리를 맞추고, 수건의 결을 같은 방향으로 접어 쌓으며, 밥상 위 젓가락을 가장자리와 평행하게 놓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물건 숨기기와 겹치기도 하지요. 리모컨이 베개 아래, 안경이 화분 뒤. 예전 같으면 ‘왜 또 숨겼지?’가 먼저 나왔겠지만, 이제는 그 충동을 잠깐 눌러 둡니다. 정리는 당신의 평생 기술이고, 숨기기는 그 기술이 어긋난 변주입니다. 저는 그 변주를 안전한 곡으로 돌려놓습니다. “수건 접기 대회” 같은 이름을 붙여, 소파 옆에 접을 거리들을 한 무더기 놓아 드리면, 엄마는 눈빛이 반짝입니다. 접힌 수건이 쌓일수록 당신의 표정도 차분해집니다. 정리의 리듬—그게 엄마의 몸이 기억하는 안심이었습니다.
산책길에서도 몸의 문장은 명료합니다.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엄마 걸음은 반 박자 느려지고, 횡단보도의 흰 줄 위에서는 발끝이 그 선을 조심스레 따라갑니다. 학교로 저를 데려다주던 시절, 시장 골목을 통과하던 오후들—그때 제가 뒤에서 보던 바로 그 보폭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보폭을 따라섭니다. “여기 작은 그림자, 조심.” “여기는 햇살이 뜨거워요, 그늘로 돌아요.” 몸으로 주고받는 짧은 지문들이 두 사람을 안전하게 데려갑니다. 엄마가 알아듣지 못할 길고 좋은 말보다, 발목을 보호하는 한 문장이 훨씬 유용하다는 걸 요즘 저는 배웁니다.
저녁이 되면 당신은 슬리퍼를 문턱 앞에 가지런히 맞춰 둡니다. 그다음 제 방 문을 손바닥만큼만 열어 얼굴의 반쯤만 비추고, 잠깐 제쪽을 바라보시지요. 말 대신 코끝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한 번, 문고리를 위아래로 부드럽게 두 번 쓸어내리는 손짓이 한 번. 저는 낮은 목소리로 “응, 곧 잘게요. 엄마 먼저 누우세요” 하고 답합니다. 당신은 대꾸하지 않고 문을 반쯤 닫은 뒤, 거실을 지나며 쿠션을 톡톡 정리하고 커튼을 한 뼘 더 끌어내립니다. 침대에 누워 이불 모서리를 당겨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지요. 말은 없지만 그 작은 의식들이 오늘의 끝을 스스로 표시해 줍니다. 큰 다짐 하나 없이도 몸이 하루를 봉인하는 방식—그 고요한 마침표가 저는 참 좋습니다.
뇌과학 책에서는 말합니다. 해마가 약해져도 절차기억은 비교적 오래 남는다고. 냄새 같은 후각 정보는 편도체와 해마를 우회해 바로 정서에 닿는다고. 저는 그 문장을 생활에서 확인합니다. 된장국 한 숟갈에 당신의 어깨가 내려앉고, 비 온 뒤 흙냄새에 당신의 발이 현관턱을 넘습니다. 과학은 설명을 주고, 당신은 증명을 줍니다. 메를로-퐁티의 말대로, 우리는 지성보다 먼저 세계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몸이 곧 하나의 지평이 됩니다. 언어가 지평 밖으로 떨어지는 날에도, 손은 지평을 붙잡고 있습니다.
엄마, 오늘도 당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손금 사이로 잔주름이 더해졌지만, 온기는 어제와 같았습니다. 저는 그 온기에서 ‘나중에도 서로를 잇는 다리’를 만집니다. 언젠가 더 많은 것이 사라져도, 몸의 다리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다리를 따라 저는 당신에게로, 당신은 저에게로 걸어올 겁니다. 엄마와 제겐 아직 발이 있고, 손이 있으니까요.
늘 아들의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