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비워지는 언어 채워지는 대화(아들의 메모)

아들의 메모

by stone


처음 엄마의 말이 흐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게 한 사람에게서 사라져 갈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단순한 병리학적 현상만이 아니라 삶의 깊은 비밀을 드러내는 듯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처음에는 짧은 단어들을 잊었고, 그 다음에는 문장의 연결이 무너졌다. 그리고 마침내 2년 전부터는, 거의 모든 표현이 세 마디로 압축되었다.


‘어머나’ ‘우야꼬’

‘아이구야꾸나’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비극처럼 여겼다. 세계를 구성하던 언어의 집이 무너지고, 남은 세 개의 기둥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단순한 퇴행이나 소실이 아니라, 오히려 '응축'과 '정수'의 과정일 수도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또 나는 그 단순함 속에서 놀라운 유연함을 본다. 언어학적으로는 세 단어이지만, 억양과 표정, 맥락에 따라 수십 가지의 뜻이 펼쳐진다. 마치 시인이 짧은 구절 속에 우주를 담아내듯, 엄마는 이 세 단어로 모든 세계와 대화한다.


우리 집 긴급대응센터는 3버튼 체계다.

1. 어머나 = 감탄/수용(세계가 아직 나를 놀라게 한다)

2. 우야꼬 = 분기/선택(어느 쪽으로 갈지 묻는 손짓)

3. 아이고야꾸나 = 난처/요청(“아이고 나는 어쩔꺼나”의 압축—도움이 필요한 순간)


이 셋은 말의 축소가 아니라, 존재의 자세다. 병이 진행되어도 억양과 감탄은 비교적 오래 남는다. 복잡한 문장 회로가 무너져도, 열림–탐색–동행 요청의 패턴은 버틴다. 그러니까 세 마디가 켜지는 한, ‘여기에 반응하는 몸’은 여전히 있다.


뇌과학의 말로 옮기면 이렇다. 병이 깊어져도 억양과 감탄 같은 ‘감정의 소리’는 비교적 보존된다. 복잡한 문장은 끊겨도, ‘놀람-선택-요청’의 회로는 오래 버틴다. 그래서 세 마디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존의 패턴이다. 언어가 줄어들수록 남는 건 핵심 반응인데, 그 핵심이 아직도 세계를 향해 반짝인다면, 거기엔 누군가 ‘살아 있다’.


나는 또 철학자의 마음으로 생각한다. 언어가 사라지고도 여전히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일 것이다. ‘어머나’는 세계를 마주하는 놀람, ‘우야꼬’는 세계를 선택, ‘아이구야꾸나’는 그 세계를 향한 요청. 인간의 삶이란 결국 놀람과 선택 그리고 요청 사이를 오가는 여행이 아닐까.


나는 가끔 미래를 생각한다. 언젠가 엄마가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무엇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침묵 그 자체가 대화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세 단어가 중심이었던 것처럼, 그때는 숨결과 눈빛, 몸짓이 중심이 되겠지.


현장 프로토콜(실전용)은 아래와 같다.

‘어머나’가 울려 퍼지면 함께 키운다.

“그러게요, 오늘 소리 예쁘다.”

(감탄을 공유하면, 세계가 공동 소유가 된다.)

‘우야꼬’가 등장하면 선택을 하나로 줄인다.

“지금은 컵부터요.” / “이제는 양말 차례.”

(분기점을 줄이면 실패도 줄어든다.)

‘아이고야꾸나’로 주춤해지면 동행을 약속한다.

“그럼 같이해요. 엄마는 접시 대장, 나는 물 대장.”

(난처함을 역할놀이로 바꾸면 체면과 자존감이 남는다.)


무엇보다, ‘아이고야꾸나’의 철학. 이 말은 난감함을 고백하는 용기이자, 관계로 해결하자는 제안이다. 존재가 혼자 버티지 않으려 할 때 진동하는 소리. 돌봄은 그 제안에 답을 다는 일이다. 정정(“그건 아니에요”)보다 동행(“그럼 같이요”)으로.


오늘의 체크인 :

• 전기포트 울림 어머나 (감탄 공유, 분위기 상승)

• 현관 바람 흔들림 우야꼬 (대기 모드 선언, 불안 완화)

• 수건 산더미 아이고야꾸나 (역할 배당, 완료 후 하이파이브)


결론은 간단하다. 세 마디가 계속 돌아가는 동안, 세계는 살아있다. ‘나는 있다’는 말 대신, 놀람·질문·요청의 리듬으로 있음이 확인된다. 엄마의 세 마디는 심전도처럼 하루를 그린다. 말이 줄수록 리듬이 남고, 리듬이 남을수록 함께 있음이 선명해진다.


오늘의 기록: 아침 첫 ‘어머나’는 커튼을 젖힐 때, 낮의 ‘우야꼬’는 빈 의자 앞에서, 저녁의 ‘아이고야꾸나’는 국물 한 방울 사고 후에. 세 줄의 파형이 매끈하게 이어졌다. 그러니 적는다.


언어가 줄어들수록, 존재는 더 굵어진다.

세 마디로도 충분하다.

오늘 두 존재, 분명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