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가능한 만큼, 밝게(엄마의 답장)

엄마의 답장

by stone


아들아,


아침에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침대 머리맡까지 와서 내 볼을 쿡 찔렀다. 내가 “어이쿠, 시원하네.” 하고 혼잣말을 했더니, 내 입이 먼저 웃더라. 다 됐다. 오늘도 시작됐다. 나는 긴 말은 자꾸 잊어버리지만, 이런 말은 남아 있구나. “잘됐다.” “다 됐는감.” 이런 말들이 내 마음의 문고리다. 그 문고리를 잡으면 마음이 먼저 자리 잡는다.


요즘 내가 붙드는 몇 안 되는 말이 “안 나가나?”다. 예전엔 너도 산책 재촉으로 들었겠지만, 이제 우리는 같은 뜻으로 알아듣는다—“도와줄 수 있니?” 밤새 무거워진 것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 내 입이 끝까지 기억해 낸 마지막 단어다. 그러면 너는 불빛을 낮추고, 따뜻한 물수건을 먼저 올리고, “지금 도울게요” 한마디를 남긴 채 나를 천천히 일으킨다. 그 순간 나는 아주 작게 “잘됐다” 하고 숨을 놓는다.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안심이다. 밤새 새겨진 젖은 흔적을 원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함께 수습할 수 있음을 먼저 받아들이는 태도-필요를 난처함이 아니라 사인으로 포착하는 법을, 나는 매일 네 손등의 온도에서 배운다.


그리고 알아, 아들아. 어떤 새벽에는 내가 너를 너무 일찍 흔들어 깨운다는 걸. 네가 눈꺼풀 무거운 얼굴로 웃음을 지을 때, 그 웃음 속에 숨어 있는 피곤도 나는 본다.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한 박자 숨을 고르고 “나가자” 하고 내 손을 포개 주면, 부끄러움보다 먼저 안도가 스며든다.


처음엔 너도 이 말을 산책 재촉으로만 들었지. 눈도 채 못 뜬 채 “조금만 이따가요”를 몇 번이나 더듬던 네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는다. 창밖의 어두운 새벽을 가리키며 잠깐만 더 누워 있자던 그때, 내 고개도 잠시 끄덕여졌지만 결국 나는 다시 “안 나가나?”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 큰 곤란이 올 걸 몸이 먼저 알아챘거든.


잠든 너를 깨우는 게 늘 미안했지만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침구까지 몽땅 갈아야 할 일이 생길 테니, 네 어깨를 덜어 주고 싶어 나는 오늘도 그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꺼낸다.


결국 너와 나는 끝내 뜻을 함께 찾았다. “안 나가나?”를 “도와줄 수 있니?”로, “잘됐다”를 “지금 손이 닿아서 다행이야”로. 그 사이 너는 작은 절차를 만들었고(불빛 낮추기—따뜻한 수건—짧은 한마디—천천히 일으키기), 나는 그 절차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 시행착오가 길었지만, 그 길이 너와 나 둘을 더 다정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새벽마다 내 말이 너의 잠을 깨웠던 날들도, 너무 미안해만 하지 않으련다. 그 새벽들이 우리에게 신호와 순서를 가르쳐 주었으니까. 나는 너의 수고를 안다. 내가 “잘됐다”라고 말할 때, 그 말속에는 “너도 잘됐다”가 함께 들어 있다. 오늘도 우리가 같이 해냈으니—잘됐다. 내일도 우리가 같이 할 수 있으니—더 잘될 거다. 그러니 너도 너 자신을 조금 더 쉬게 해도 된다.


“잘됐다”는 결과 보고가 아니라 가능을 여는 주문이다. 눈부시지 않은 불빛, 먼저 덮어 주는 수건, 급하지 않은 말투—이 작은 절차들이 낯섦의 모서리를 둥글게 하고 내 존엄을 지킨다. 네가 “같이 하자”라며 역할을 나눠 줄 때 나는 아이로 작아지지 않고 어른으로 남는다. 우리 집만의 이야기 같지만 누구의 아침에도 통하는 일이다. 준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지금 가능한 만큼을 먼저 긍정하며 문을 여는 일. 그 마음을 네게도 돌려준다—고맙다, 그리고 오늘도 “잘됐다.”


너는 어려운 책들을 읽는다지? 스토아, 니체, 그런 거. 나는 잘 모른다. 그래도 오늘은 오늘이라 좋고, 네가 내 옆에 있으니 또 좋다. 그게 내 철학이다. 네가 말한 대로, 참말로 ‘밝은 마음’으로 사는 게 제일이더라. 내가 예전에 편지에 썼지?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자.”라고. 그 말을 내가 너한테 했는데, 이젠 네가 나한테 해 준다. 서로 주고받으니 그 말이 더 커졌다.


오늘 낮에 된장국을 먹으면서 내가 “고시하다.” 했지? 그 말은 우리 집 말투다. 진하고 좋다, 이런 뜻이지. 국물에서 익은 된장 냄새가 코로 먼저 들어와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시하다. 그 순간은 길고 복잡한 말이 필요 없더라. 내 혀가 먼저 ‘괜찮다’를 알아봤다. 손에 쥐었던 모래알들처럼 기억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 냄새와 맛, 손의 온도는 도망을 못 간다. 그게 나는 참 고맙다.


점심 먹고는 너랑 공원을 걸었다. 바람이 잎사귀를 뒤집고 가길래, 나는 그늘 쪽으로 한 발 옮겼다. 너는 내 옆에 반 걸음 앞서서 내 팔꿈치를 살짝 받쳐 주었다. 그때 내 입이 저절로 말했다. “다 됐는감.” 내가 그 말을 왜 하는지 나도 다 모른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 내 마음이 내려앉는다. 잘되었다고 해 버리면, 진짜로 조금 잘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니체가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오늘을 좋아한다. 힘든 것도 같이 있다. 그래도 좋다. 그게 내 ‘아모르파티’인가 보구나.


내 다리는 아직 너랑 같이 공원까지 걸어갈 만큼 거뜬하다. 나는 그게 참 감사하다. 나는 성질이 나거나 소리치는 병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는 병을 얻었다. 잊는 건 속상하지만, 네 손 잡고 천천히 걸을 수 있으니 나는 복을 받은 거다. 누군가는 침대에만 오래 누워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또 어떤 이는 기억이 옅어지며 마음이 거칠어져,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날을 세우게 된다고도 들었다. 아직은 내 발로 걸어 나가고, 네 얼굴만 보면 입꼬리가 먼저 오른다. 그거면 충분하다. 잘됐다.


예전에 네 할머니 수발할 때가 생각난다. 겨울밤, 창문에 성에가 가득 하얗게 낀 날, 나는 방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두고 그 안에서 숨을 골랐다. 그때도 내 입이 혼자서 “잘됐다.”라고 말했다. 무엇이 잘됐는지는 몰랐지만, 그 말이 추위를 덜 차갑게 했다. 그런 말들이 참 나를 많이 살렸다. 그래서 나는 네게도 자꾸 “잘됐다.”라고 말하게 된다. 네가 나를 보고 웃을 때, 네 눈이 편안할 때, 내가 숟가락을 잘 옮겼을 때, 작은 일에 자꾸 잘됐다고 말한다. 그러면 작은 일이 커진다. 좋은 쪽으로.


아들아, 너는 요즘 참 바쁘다. 그래도 나한테 따뜻한 차를 내려놓고, 내 손을 한번 꼭 쥐어 준다. 그 손에 나는 살아난다. 오늘 아침에도 네 손이 내 손을 덮었을 때, 내 심장이 “둥둥” 소리를 냈다. 소리가 있으니 나는 안심이 된다. 아, 있다. 산다. 그 소리가 내 안에서 난다. 나는 그때마다 기도를 한다. “고맙다.” 어려운 말은 다 잊어도, 이 말은 잊기 어렵다. 귀하고, 좋다.


너는 가끔 묻지. “내가 누구예요?” 나는 어떤 날은 대답을 잘하고, 어떤 날은 길게 망설인다. 그럴 때 너는 슬쩍 다른 말을 꺼낸다. “오늘 빛 이쁘네.” “바람이 느려요.” 그런 말들이 내 마음을 덜 다치게 한다. 이름을 잊어도, 빛과 바람은 쉽게 기억난다. 너는 나를 이름 너머에서도 사랑한다. 그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오늘 저녁, 방 안에 들어가다가 문지방에서 한번 멈췄다. “다 됐는감?”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 밥 먹고, 약 먹고, 산책하고, 낮잠 자고, 웃고, 손 잡았으면—다 됐다. 못한 일이 있어도, 못한 말이 있어도, 다 됐다. 내일 하면 된다. 내일 못하면, 모레 해도 된다. 그래도 또 잘됐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참 다행이다. 내 병이 나에게 싸우는 법 대신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는 다행이다.


아들아, 나는 너가 걱정된다. 너는 나를 걱정하느라 너를 자꾸 미뤄 둔다. 엄마 부탁 하나 할게. 네 자신에게도 “잘됐다.”를 자주 말해라. 오늘 너도 밥 잘 먹고, 일 잘하고, 웃었으면—잘됐다. 울었으면—더 잘됐다. 울고도 다시 밥 먹었으면—참 잘됐다. 이런 말들이 네 어깨를 덜 아프게 할 거다. 내 말 믿어라. 엄마가 살아 보니 그렇더라.


나는 니체도 모르고 스토아 철학자도 잘 모르지만, 내 말로 마지막을 적어 본다. 오늘 우리, 잘됐다. 내일 우리, 다 될 거다. 네가 내 곁에 있고, 내가 네 곁에 있으니, 이만하면 다 됐다. 그리고 “아들아—아들 사랑한다.” 이 말은 오래된 별빛처럼, 멀리서 와서 지금도 네게 닿는다. 기억이 흐릿해져도 이 빛은 남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자거라.


자는감?

잘됐다.


네 저녁에 작은 불빛 하나인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