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메모
아들의 메모
오늘의 기록.
07:10,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식탁 위 유리컵에 부딪혀 바닥에 작은 타원을 만들었다. 타원의 경계가 분마다 일렁였다. 나는 스토아 철학의‘이분법’을 가만히 꺼내 놓는다. 빛의 모양—내 통제 밖. 그 빛을 바라보는 시선—내 통제 안. 그래서 나는 ‘쳐다본다’를 선택했다. “고마운 빛.” 작은 인사로 하루를 연다.
08:00, 집은 늘 비슷한 방법으로 깨어난다. 이불 끝을 살짝 당기듯 다가온 “안 나가나?”는 산책 약속이 아니라 도움의 호출이고, 이어지는 “잘됐다.”는 결과 보고가 아니라 시작을 허락하는 도장이다. 나는 그 신호를 절차로 번역한다. 불을 낮추고, 따뜻한 물수건을 올리고, 손을 맞잡아 일으킨다. 젖은 밤을 탓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차례를 세우면, 낯섦의 모서리가 둥글어진다. 말이 줄어든 자리에서는 순서가 말을 대신한다. 그때 “잘됐다”는 서로의 체면을 덜어 주는 가장 짧은 합의가 된다.
이 짧은 합의는 누군가의 완벽함이 아니라 태도의 선택에서 나온다. 필요를 낭패가 아닌 신호로 듣고, 가능을 과장하지 않되 가능한 만큼은 승인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한 수용의 힘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이런 작은 승인에서 커진다. 오늘도 나는 같은 연습을 반복한다. “도와줄 수 있니?”를 “지금 도울게”로, “잘됐다”를 “이만하면 충분해”로 받아 적는다. 한마디의 윤활이 하루 전체의 마찰을 줄인다. 아주 작은 시작마다 고마움을 덧붙이면, 남은 시간은 놀랄 만큼 가벼워진다. 오늘도 도장을 찍는다. 잘됐다.
09:40, 된장국을 끓였다. 끓는 면 위로 떠오르는 기포가 터질 때마다 ‘지금’이 갱신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첫 숟가락 후 “고시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감사가 찾은 첫자리. 감각은 기억의 마지막 방. 엄마의 병이 깊어져도 그 방은 비교적 오래 남는다. 그러니 나는 감각을 자주 두드린다. 냄새·온도·소리·촉감—감사할 고리들이 거기에 있다.
11:10, 엄마가 방석을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이유는 모른다. 대신 결과를 정리한다. ‘일광 좋음 방석의 해바라기 잘됐다.’ 장난처럼 보이던 일도 ‘잘됐다’로 받아들이면 풍경이 된다. 스토아식 재구성, 내식 번역. 사건을 바꿀 수 없다면 설명을 바꾼다. 설명을 바꾸면 얼굴이 바뀐다. 얼굴이 바뀌면 그다음의 사건도 자주 바뀐다.
14:00, 공원 산책. 바람이 세게 불어 모자를 눌러쓰게 했다. 갈림길에서 두 가능성이 겹쳤다. ‘햇볕’과 ‘그늘’. 나는 니체의 질문을 소리 없이 불렀다. “이 선택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까?” 그럼에도 그늘을 택했다. 반복해도 좋을 선택—그늘, 물, 벤치, 두 사람의 숨. 영원회귀는 내게 거대 철학이 아니라 실전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내일도 똑같이 고를 수 있는 것, 내일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고른 것. 그게 답이었다.
15:20, 엄마가 갑자기 멈춰 서서 풀잎 하나를 손가락으로 흔들었다. “이거 봐라.” 그 말에 나는 웃었다. 그 제안(봐 달라)을 나는 좋게 들었다—“풀잎이 인사하네.” 그렇게 해석하자 우리 표정이 먼저 풀리고, 바람도 뒤에서 살짝 힘을 덜어 주었다. 사유가 길어지면 이 작은 선물은 금세 도망간다. 그래서 감사로 짧게 붙잡는다.
한 줄 메모 : ‘풀잎 하나가 오늘을 인사했다—잘됐다.’ 이 한 줄의 긍정이 저녁까지 등을 떠민다.
17:30, 엄마가 부엌으로 와서 “다 됐는감?” 물었다. 밥은 아직 뜸이 덜 들었다. 스토아의 연습, ‘지연(遲延)과 수용’. 나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면 잘돼요.” 말을 뱉는 순간, 내 마음부터 안정됐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을 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빛이 바닥 타원을 길게 늘였다. ‘아직 아님이 곧 잘됨으로 가는 길목’—그 길목을 엄마와 나는 함께 서 있었고, 나는 덜 초조했다.
19:50, 엄마가 제 방 문을 열고 “자는감?” 물었다. 나는 “조금 있다가요.” 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잘됐다.”라고 말하더니 천천히 돌아갔다. 문틈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내가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는다. ‘잘됐다’에는 점수표가 없다. 결과 대신 존재를 확인한다. 있음을 승인한다. 그러니 나는 이 말을 자주 흉내 낼 것이다. 나한테도, 설거지에도, 실패한 계획에도. 점수가 아닌 승인, 채점이 아닌 인사.
21:10, 스토아의 ‘부정적 상상’을 짧게 돌렸다. 내일 엄마가 내 이름을 잊을 수도 있다. 밤사이 아플 수도 있다. 나도 갑자기 기운이 떨어질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뒤, 지금 살아 있는 것을 하나씩 만졌다. 벽의 온기, 팔에 닿은 이불의 무게, 엄마 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 상상의 끝에서 현실을 만지면, 현실은 더 가까워진다. 고통의 예행연습이 아니라 감사의 확대복사. 내 마음이 넓어진다.
그리고 적는다. 오늘의 감사 3가지, 니체식으로 ‘또 반복해도 좋을 것들’ 3가지.
감사 3
— “고시하다”라는 엄마의 형용사.
— 공원 벤치 아래로 굴러간 햇빛 한 줌.
— “자는감?”으로 시작해 “잘됐다.”로 끝난 대화.
또 반복해도 좋을 것 3
— 갈림길에서 그늘을 택한 일.
— 뜸을 기다리며 미지근한 물을 마신 일.
— 실패한 계획에 점수가 아닌 인사를 건넨 일.
밤 22:40, 창밖 별이 희미하다. 별빛은 오래된 기억의 다른 이름. 오늘의 작은 친절이 내일의 나에게 도착하리라는 믿음을 별빛에서 배웠다. 오늘 엄마가 건넨 “잘됐다”가 내일의 나를 살릴 것이다. 오늘 내가 스스로에게 건넨 “괜찮다”가 모레의 나를 부드럽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내가 훈련하는 낙관이다.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라, 작은 증거를 반복해 쌓는 기술로서의 낙관.
부록 메모—‘착한 치매’의 감사 목록.
— 걸음이 남아 있어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풍경의 언어를 공유할 수 있다.
— 화가 크지 않아 작은 농담이 길을 만든다 설명 대신 미소로도 조율이 된다.
— 밤의 리듬이 비교적 안정적이다 둘의 체력이 덜 무너진다.
다만 ‘착함’이라는 말 뒤에 고통을 숨기지 않기.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이 같은 방에 산다. 그래서 우리는 ‘잘됐다’와 ‘힘들다’를 같이 말한다. 둘 다 말해야 오래간다.
끝으로, 니체에게 보내는 사적인 대답.
“이 삶을 다시 살아도 좋겠는가?”
— 네. 오늘의 대답은 ‘네’다. 이유가 대단한 건 아니다. 된장국의 온도, 공원 바람의 결, 아침 공기와 함께 들어온 “잘됐다”한마디를 다시 받고 싶어서다. 그 작은 이유들이 반복을 견디게 한다. 작지만 분명한 이유가 큰 철학을 이긴다.
내일의 장비—세 줄만.
— 사건은(통제하기 어려운 바깥의 일들은) 흐르고 (계속 변하고 지나가지만) 태도는(그때 내가 취할 마음의 자세와 반응은) 선다.(스스로 세워둘 수 있다.)
— 점수 대신 승인, 평가 대신 인사.
— 가능한 모든 순간에, 낙관과 감사.
그리고 마지막 줄.
오늘도, 숨고르고 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