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편지
엄마,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수업 준비로 마음이 흩어졌습니다. 챙길 자료가 많아지자 제 흔들림이 집 안으로 번졌고, 엄마의 걸음도 안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베란다로 가느다랗게 계속 왕복했습니다. 제가 산만해지면 엄마도 동시에 같은 흔들림으로 응답하는 장면—멀리 있는 두 입자가 하나의 연결로 함께 정해져 보이는, 양자얽힘의 동시성을 생활 속에서 목격한 셈이었습니다.
엄마와 저 사이에 오래전부터 양자얽힘 같은 것이 있었다고 느낍니다. 하나를 건드리면 멀리 있는 다른 하나가 동시에 응답하는 상태요. 당신은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라 “괜찮다”는 말로 표정을 덮고, 기척을 줄이고, 새벽에 혼자 일어나 서랍 속 약봉지를 정리하곤 하셨지요. 그즈음, 나는 이유를 모른 채 같은 시각에 깼고, 설명되지 않는 두근거림과 속 울렁임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한쪽의 진동이 다른 쪽을 울리던—그런 얽힘.
그 시절, 당신은 고통을 밖으로 보내지 않고 안으로 접어 넣었습니다. “말하면 걱정할까 봐”라며 혼자 감당하고, 울음이 오면 씻는 일로 덮고, 더 바쁘게 움직여 마음의 빈칸을 메우려 했지요. 그러다 어느 겨울, 기력이 크게 꺾이며 깊은 우울이 길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무게가 더 깊은 병으로 궤도에 오를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그 무렵부터 기억의 실이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니고, 이것을 인과로 단정할 수 없음을 압니다.)
다만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도 읽힙니다. 견딜 곳을 찾지 못한 과부하가, 몸의 더 깊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다른 경로—‘망각’의 회로를 열어 속도를 낮추었다고.
얽힘 상태의 현에서 한쪽의 과도한 진동을 완충하기 위해, 전체의 파형이 덜 아픈 모양으로 재배열된 것이라고.
그래서 저는 당신의 치매를 미화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언젠가 더 큰 붕괴를 불러왔을지도 모를 압력을, 기억의 후퇴라는 대가로 비켜간 선택. 몸과 마음이 협의해 만든, 마지막의 완충 장치. 이 해석이 정답일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견딜 언어가 되어 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대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지금 무엇을 도울 것인가”를 묻게 해 주었으니까요.
당신의 병에 대해 주변의 오래된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 깊은 상처와 우울을 다른 방식으로 버티려 했다면, 몸이 더 일찍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과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건론의 시각과 얽힘의 비유를 겹쳐 보면 이런 추정도 가능해집니다.
즉, 기억의 후퇴가 때로는 몸과 마음을 과부하에서 보호하는 장치처럼 작동했다는 직감. 우울과 결핍의 시간을 ‘망각’이라는 방식으로 건너왔을지 모른다는.
혹독했던 가족사의 압력 앞에서, 당신의 몸이 ‘망각’이라는 완충을 선택해 스스로의 속도를 낮춘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덜어 내어 파국을 미루는, 일종의 마지막 방어선.
당신 곁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모든 것은 동시에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기억은 모였다 흩어지고, 사라졌다가 불현듯 의미의 자리로 엮입니다.
어제의 엄마, 오늘의 엄마,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의 엄마가 같은 자리에 겹쳐 서 있는 느낌—양자물리의 말로는 중첩이라 하지요. 저는 그 겹침을 매일 목격합니다.
저는 배웠습니다. 늘 중첩 위에 있고, 내가 어디를 보느냐가 그중 하나의 얼굴을 잠시 고른다는 것을요. 제가 “엄마, 여기 앉으세요” 하고 의자를 살짝 당기는 순간, 떠돌던 시선이 ‘지금’이라는 자리에 붙습니다. “엄마, 저예요” 하고 이름을 들려드리면, 낯섦의 표정이 잠깐 익숙한 빛으로 가라앉습니다.
과학의 언어로는 파동함수의 수렴, 돌봄의 언어로는 ‘살핌의 태도가 구도를 정한다.’일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압니다. 그 정해짐이 잠깐뿐이어도 괜찮다고—파동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시 다른 모양으로 흐를 뿐이니까요.
그 관점에 서면 장면이 달라집니다. 불편은 본질이 아니라 조건들의 합처럼 보이고, 그 합을 바꾸면 사건의 표정도 달라집니다.
낯선 소리와 강한 조명, 서늘한 공기와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겹치면 초조가 커지고, 조도를 낮추고, 손의 온기를 얹고, 익숙한 촉감과 낮은 목소리를 먼저 건네면 표정이 풀립니다. 엄마와 저의 초조도 어딘가 여전히 잠재태로 떠돌고 있으며, 엄마와 제가 공명한 온기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파동의 중첩 상태로 물결치고 있겠지요.
기록하는 방식도 바꿨습니다. 진단명보다 조건과 신호의 일지를 쓰는 걸로요.
“오후 4시, 빛 강함 커튼 반, 잔잔한 음악 1곡 어깨 힘 이완.”
저는 이 일지를 낙인이 아니라 나침반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병을 사람과 등호로 묶지 않고, 사건의 연속으로 바라보면 요동치는 파동은 줄고 교감의 여지는 넓어집니다.
오늘의 요청에 맞춰 응답을 설계하고, 내일의 조건을 조금 미리 가볍게 정돈하는 일 - 그게 입자의 동시성과 남겨질 파동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치매 또한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 몸의 피로와 집안의 기후가 만나 나타난 하나의 응답—흐름 도중에 드나드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죄책감은 조금 옅어지고, 살핌의 여지가 넓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양자 중첩의 시선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가능성의 겹이고, 관찰이 그중 한 얼굴을 잠시 선택합니다.
동시에 드러난 한 얼굴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흐름 위에 드러났다 스치는 잠정적 형상일 뿐이니까요.
다만 이 비집중이 곧 무책임을 뜻하진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고른 관찰과 응답에 대해 존재적 책임이 따릅니다. 잘못 읽었으면 다시 읽고, 상처가 생기면 사과하고, 다음 장면을 위해 조건을 새로 배열합니다. 그렇게 매 순간을 책임 있게 통과시키는 일이, 가능성의 겹들 사이에서 의미를 선택하는 방식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신은 종종 묻습니다. “이래 놔둬도… 돼요?”
저는 답합니다. “네, 여기서는 괜찮아요.”
그러면 당신은 안도의 숨을 쉬고, 방 안의 공기가 한 톤 낮아집니다. 그 한마디에 제 마음도 함께 내려앉습니다.
걱정과 부끄러움, 얽매임과 예측 - 그 모든 것 역시 파동으로 다시 ‘흘러가는 것’이라는 사실.
저는 오늘도 그 파동의 흐름 속에서 떠오른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강물은 뒤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굽이마다 다른 무늬로 번질 뿐입니다. 엄마와 저의 삶도 그럴 것입니다—파동의 흘러감 속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며 출렁이다 다시 다른 입자의 실체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내일도 사라짐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드러남을 환대하고, 흘러감을 신뢰하겠습니다. 또 면밀하게 관찰하고, 책임 있게 응답하며, 천천히 동행하겠습니다.
중첩의 겹들 속에서 고르는 매 순간의 입체성이, 하루치 파동으로 이어지도록.
모든 일은 파동의 흐름 위에 잠시 머무를 뿐, 단단한 결론이 아니라 이어지는 파동의 연속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일 뿐이겠지요. 저는 엄마와의 나날을 붙잡아 고정하기보다, 방금 떠오른 순간으로 가볍게 받아 적어 건네렵니다.
오늘의 표정은 오늘을 비추고 지나갑니다. 내일이 오면 또 내일의 방식으로 마주 서겠습니다. 그렇게 흘러가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입자의 순간들을 다정히 통과하여 파동으로 돌려보내는 일—그것이 엄마와 제가 함께 만드는 삶의 방법이고, 고요히 출렁이는 오늘의 마무리입니다.
늘 제게로 흘러 오는 사람, 엄마께.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