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메모
저녁 바람이 창틈을 스치며 거실을 얇게 지나갔다. 엄마는 그 스침의 끝에서 발끝을 세우고 잠깐 섰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파동은 이유 없이도 아름답다.
나는 주방에서 물을 데우며 오늘의 장면을 정리했다. 오늘의 당신은 세 번 웃었고, 두 번 놀랐고, 한 번 길을 잃었다. 그리고 매번 돌아왔다. 중첩이 관측에 닿을 때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듯, 당신의 하루도 나의 부름과 당신의 고갯짓에 따라 잠깐 모양을 갖췄다가 다시 흘렀다.
아침, 머릿속에서 강의안·기저귀·식사준비·세탁 버튼까지 한꺼번에 켜 두자 집안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맞은편의 엄마는 두세 걸음 옮겼다가 문턱에서 멈추고, 창틀을 한 번 쓰다듬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어섰다. 그 움직임이 내 속도가 만든 잔광처럼 따라붙는 걸 보며,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같은 회선에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자 얽힘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서로 다른 방의 두 전등이 밝기 조절 손잡이 하나에 함께 묶여 있는 상태. 내가 밝기를 급히 올리면 저쪽도 함께 눈부셔지고, 내가 손잡이를 미세하게 낮추면 그쪽 불빛도 함께 누그러진다. 신호를 따로 보내는 게 아니라 애초에 같은 회로에 연결돼 있어서, 한쪽의 조정이 곧 다른 쪽의 상태가 되는 것.
같은 장(場)을 공유하는 두 존재. 내가 속도를 올리면 공간이 불룩해지고, 내가 숨을 낮추면 방 안의 소음도 따라 내려앉는다.
그래서 나는 답을 밀어붙이기보다 세팅을 고치는 일을 택한다—알람을 진동으로 바꾸고, 수도꼭지 수압을 한 칸 낮추고, 문을 닫을 때 손바닥으로 소리를 눌러 준다. 이런 사소한 조정이 엄마의 몸짓에 잔물결처럼 번진다는 걸 배웠다.
남는 다짐은 단순하다. 설명으로 서로를 붙잡지 않고 결과를 서둘러 재단하지 않는다. 내가 보낸 입력에는 내가 책임을 진다. 소음이 커졌다면 내 손부터 낮추고, 동작이 거칠어졌다면 속도를 반 칸 줄인다. 눈앞의 반응이 잠시여도, 같은 회선에 얽힌 둘이 덜 아프게 켜지고 꺼질 수 있도록 오늘의 밝기를 다시 맞춘다.
내가 택한 작은 선택들이 엄마의 하루에 파문처럼 번진다는 사실—그 깨달음을 잊지 않겠다. 나와 엄마, 둘이 아니라 한 장(場) 위에서 동시에 방향을 바꾸고 함께 숨을 고른다.
나는 실체의 언어보다 사건의 언어로 기록하려 한다. ‘치매’라는 단어를 사람의 전부로 삼지 않고, 일어난 일들의 연결로 본다. 아침의 빛살, 오후의 의자, 저녁의 한 그릇, 밤의 숨. 사건들은 이어지며 나를 안내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과 존재에 머물러야 할까. 나는 답을 ‘실체’가 아니라 ‘사건’에서 찾는다. 시공의 단단한 덩어리도, 자아의 변치 않는 핵도 없다. 대신 관계와 조건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흐름만 있다. 그러니 ‘나’는 고정된 점이 아니라, 만남과 감촉, 말과 침묵이 매 순간 얽혀 드러내는 임시의 모양이다.
치매도 그렇게 본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무너졌다는 판정이 아니라, 인연의 고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이어져 나타난 사건들의 연속. 특정 조건(피로, 소음, 추위, 낯섦)이 겹치면 말이 흐려지고, 다른 조건(온기, 리듬, 익숙함)이 모이면 표정이 맑아지는—원인과 결과가 오가며 만드는 파동.
실체로 굳히는 대신 흐름으로 관찰하면, 우리는 ‘왜 이러실까’에서 ‘지금 무엇이 작동하는가’로 관점을 옮길 수 있다.
걱정과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정된 덩어리로 상상하면 거기에 갇힌다. 그러나 사건의 흐름으로 보면, 그것들은 일시적 상승과 하강을 가진 파형일 뿐이다.
지금 이 파형이 무엇을 요청하는지—소리를 낮추기인지, 조명을 부드럽게 하기인지, 잠깐의 멈춤인지—그 요청에 응답하고, 다시 흘려보낸다. 사라질 것을 실체로 만들지 않는 태도, 그것이 나를 덜 상하게 하고 우리를 오래 가게 한다.
엄마가 뜬금없이 묻는 한마디가 있다. “이래 놔둬도 돼요?” 문맥에 따라 그 말은 불안의 질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래 놔둬도 괜찮다’는 반어의 허락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을 작은 수행문처럼 쓴다.
저녁, 부엌에 서 있을 때 세계가 두 겹으로 움직인다는 걸 다시 살펴보았다. 손에 잡히는 것들은 칼과 물, 불과 소금 사이에서 모양이 바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김과 향으로 방 안에 퍼졌다. 흙내가 옅게 나는 감자, 껍질 속에 시간을 품은 계란, 비늘이 따끔하게 스치는 생선—이들은 한 냄비에서 서로의 경계를 풀고 온도로 섞였다. 접시에 담긴 건 덩어리가 줄어든 음식이었지만, 식탁 주변에는 따뜻함이 넓어졌다.
손에 잡히던 것은 모양을 잃었지만, 몸 안과 기억 속으로 번져 든 무언가는 남았다. 잡히는 순간은 입자 같고, 번져 남는 것은 물결 같다.
그 장면을 오래 들여다보니, 사라짐은 없어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등장임을 이해하게 된다. 뼈와 껍질, 뿌리만 남은 자리에서도 맛은 남고, 배 안의 온도가 남고, 기억 속의 냄새는 남는다. 입자처럼 분명했던 것들이 물결처럼 스며드는 순간, 세계는 층을 바꾸어 계속 이어졌다. 엄마가 말하던 그 감각—붙잡히던 손끝의 세계와 퍼져 남는 온기의 세계—가 오늘 식탁 위에서 조용히 겹쳤다.
그래서 돌봄에도 조리의 법을 옮겨 보려 한다. 급히 끓이는 대신 한 번 덮어 두고, 모자란 간을 소금으로만 채우기보다 이미 우러난 맛을 믿어 본다. 소리가 커지면 내 동작을 낮추고, 마음이 거칠어지면 속도를 반 템포 늦춘다. 손을 얹어야 할 때와 그대로 두어야 할 때의 비율을 매번 새로 가늠하겠다. 과하게 움켜쥐면 흩어지고, 가만 두면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우리도 언젠가 모양을 바꾸어 다른 자리로 건너가겠지만, 오늘 남길 수 있는 건 지금 펼쳐진 그 결과의 파동이다.
나는 오래전 이야기를 떠올렸다.
언제부터인지 내 안에 쌓여 온 압력이 한꺼번에 벽을 밀어 올렸다. 나는 엄마가 더 깊은 병으로 기울까 마음이 서늘했다. 그때부터 엄마의 기억은 장부의 글씨처럼 서서히 번져 몇 줄씩 비어 갔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짐작한다.
더 큰 붕괴를 막으려 몸과 마음이 브레이크를 밟고, 기억의 밝기를 줄여 희미한 빛으로 버티는 길을 택했을지 모른다.
의식적으로 고른 선택이라기보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본능이 내린 결정. 그래서 이 일을 어떤 이름으로 고정하기는 어렵다. 그 시절 엄마를 간신히 건너가게 한 작은 비상계단으로만 조용히 적어 둔다.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네 어머니는 기억을 잃음으로써 버텨낸 거야.”
나는 그 말을 사실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통찰로 받아들인다.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게를 나른다. 어떤 이는 말로, 어떤 이는 침묵으로, 또 어떤 이는 잊음으로. 그 가능성들을 나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지나가게 둔다. 실체를 묻기보다 사건을 기록한다. 사건은 서로를 비추며 길을 연다.
밤이 깊어질 무렵, 엄마가 방에서 나와 거실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말은 없었지만, 몸이 사인을 보냈다. 나는 불을 켜고 길을 비웠다. 선(先) 행동, 후(後) 설명. 절차가 언어를 돕는다. 물 내리는 소리가 작게 끝나고, 쳐다보던 눈이 부드러워졌다. 나는 알았다. 오늘도 하나의 파동이 아름답게 진정되었다는 것을.
내일을 더 예측하기보다, 지금의 결을 더 보듬어 안겠다. 접힌 수건의 방향, 컵의 높이, 부르는 음절의 길이.
자아는 떠다니는 배와 같다. 배가 물길을 고집하지 않는다. 물길이 배를 데려간다. 그 물길이 바로 맞닿은 시공의 인연이다.
엄마의 병도, 나의 선택도, 우리의 웃음도 그 물길 위에 있다. 나는 물길을 거슬러 헤엄치기보다, 함께 가는 법을 배우려 한다. 흘러가며 잃는 것도 있고, 흘러가며 얻는 것도 있다. 잃음과 얻음이 서로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오늘의 장면들이 가르쳐 준다.
기록을 덮는다. 창밖에 바람이 한 번 더 지난다. 벽에 얇은 그림자가 흔들린다. 나는 마음으로만 묻는다. 지금, 여기는 괜찮은가.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 응, 괜찮다.
내일도 우리 모두는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흘러가며 이어지고 매 순간 드러나며 또 그렇게 흘러간다.
흘러감과 관찰, 공감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 모두 서로를 다시 알아보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