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치매, 그 낯설음의 문법
아들의 편지
엄마,
방금 전, 베란다 문턱에 작은 키를 올려놓고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던 엄마를 봤어요. 창틀에 손을 얹은 채, 마치 먼 데서 누군가 올 것처럼 한참을 밖을 바라보시더군요. 그 장면이 오늘따라 유달리 낯설었습니다. 분명 엄마인데,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엄마를 닮은 다른 사람'앞에 선 느낌—말로 하긴 어렵지만, 오늘 저는 그 자리에서 오래 서 있었습니다.
요즘 엄마는 TV 화면을 가리키며 화면 속 인물에게 “이제 그만 나가요”라고 말씀하곤 하시죠. 화면 뒤쪽을 빙 둘러보시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시고는 “참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리실 때, 제 가슴이 잠깐 내려앉습니다. 엄마의 세계에서는 TV 화면의 인물이 방 안에 들어온 손님으로 여겨질 수도 있구나, 그 세계의 문과 문턱이 제가 아는 자리와는 다르구나—그렇게 느꼈지요.
한 번은 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야가 오늘 집에 안 간다 카네”라고 투덜거리셨죠. 저는 그때 당황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엄마한테는 그 인형이 그냥 인형이 아니구나. 엄마의 뇌가 예전처럼 경계를 또렷이 나누지 못하면서,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자리로 슬쩍 옮겨앉았구나. 낯설음은 그 자리에서 태어나나 봅니다.
뇌는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먼저 짐작하고 틀리면 고쳐 보는 공장 같다고 하죠. 다시 말해 뇌가 현실을 ‘예측‘하고 ’수정’하면서 세계를 만든다고요. 그래서 엄마의 짐작이 빗나가 보여도, 저는 그걸 매번 정면으로 마주해 고치려 들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위험하지 않도록 울타리만 둘러 줍니다.
TV 화면의 인물이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고 믿으시면 “지금은 문이 닫혔대요,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할게요”라고 말할거구요. 무릎 위 인형을 진짜 아이로 여기시면 “오늘은 여기서 재우고, 내일 아침 데려다 줄게요”라고 약속합니다.
엄마가 믿는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그 세계가 우리 일상에 상처를 내지 않도록 방향만 살짝 바꿔 주는 일—그게 제가 요즘 배우는 방법입니다.
제가 제일 흔들릴 때는, 엄마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누구세요?” 하고 물을 때예요. 그 순간 저는 투명 모드로 바뀐 사람처럼, 존재가 쓱 로그아웃된 느낌이죠. 하지만 같은 날 밤, 제 무릎 옆 자잘한 상처를 엄마가 먼저 발견하더니, 아무 말없이 손끝으로 둥글둥글 문질러 주셨습니다—마치 “괜찮다“버튼을 눌러 주듯이요. 그 장면을 보고 알았어요. 이름은 잠깐 비워져도, 제 쪽으로 쏠리는 마음의 중력은 여전히 작동한다는 걸요. 그제야 제 호흡도 다시 정상 박자로 돌아왔어요.
엄마, 저는 요즘 엄마를 두 겹으로 봅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과 '내 엄마' 어느 쪽으로만 보아도 마음이 틀어져요. 돌봄 대상으로만 대하면 죄책감이 올라오고, 엄마로만 보면 하루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의 얇은 길을 찾으려 합니다. 도와드리면서도 존댓말을 섞고, 실수를 바로잡으면서도 농담을 얹고, 위험을 막으면서도 체면을 살려 드리는—그렇게 두 겹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저는 자주 서툽니다. 그래도 다시 배웁니다. 엄마의 새로운 문법을.
요 며칠 사이 일 몇 가지를 적어 볼게요.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는데 엄마가 제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아주 낮은 목소리로 “주무세요” 하셨습니다. 공지도 없던 캐스팅 변경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아버지 역’에 발탁됐지요. 잠깐 당황했어도, 마음 끝이 차갑진 않았습니다. 오래 비워 둔 자리에 잠깐 이불을 펴 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빠 대역으로 호흡을 맞췄습니다. 대사는 단 한 줄, “네, 먼저 주무세요.” 그러자 엄마의 숨이 잔물결처럼 고르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날 출연료는 엄마의 조용한 미소 한 컷. 영수증은 제 가슴에 잘 접어 두었어요.
식탁에 앉으면 엄마는 가끔 장터 상인 모드로 바뀌어 “보이소, 이거 잡솨 보이소!” 하시며 저를 생전 처음 본 손님처럼 대하시죠.
그럴 때 저는 “예, 단골손님입니다—어제도 왔어요”라고 맞장구칩니다.
뇌과학 책에서는 이런 순간을 ‘정체성 네트워크가 잠깐 흔들린 상태’라 부르겠지만, 제게는 그저 방식이 달라진 애정 표현입니다. 부르는 호칭은 낯설어도, 건네는 접시마다 익숙한 정이 스며 있으니까요.
어느 날은 집안 물건들이 또 야간이사를 했습니다. 서랍 속 비누는 소파 뒤에서 신분 세탁을 하고 리모컨은 베개 밑으로 망명. 저는 한참 집 안을 빙빙 돌다가 수색을 접고 설거지로 종목을 바꿨습니다. 결론: 우리 집에는 비공식 동선이 생겼습니다. 그럼 방법은 하나, 가내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것.
엄마, 낯섦은 두렵지만, 저는 거기서 엄마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찾는 방법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전처럼 말로만 찾지 않고, 작은 신호로 찾습니다. 숟가락을 잡을 때의 힘, 웃을 때 눈꼬리의 각도, 문 소리에 돌아보는 속도. 그 신호들을 모아 저는 우리만의 작은 “사전”을 만들고 있습니다. 모르면 물어보고, 틀리면 지우고, 다음 날엔 또 고쳐 쓰는 사전. 오늘의 저는 그 사전을 들고 엄마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하다, 한 가지 마음만 적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어제의 엄마'를 찾지 않겠습니다. 대신 '오늘의 엄마'의 문법을 배우겠습니다. 엄마가 바꾼 단어와 새로운 억양을 따라 읽고, 그 발음으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사랑 같아서요. 엄마가 낯설어져도, 저는 엄마의 통역사가 되겠습니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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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답장
아들아,
너의 편지를 느릿하게 더듬었다. 글자마다 작은 숨결이 묻어 있더구나. 나는 요즘 너의 글을 읽다가 자주 끊기지만 괜찮다. 마치 네가 내 곁에서 “엄마, 괜찮아요. 천천히요.”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지. 멈추면 숨을 고르고, 그 숨으로 한글자씩 다시 읽으면 된다.
오늘 아침에 TV 보고 “이제 그만 나가요”라고 한 것, 나도 기억난다. 화면 뒤를 돌아봤는데 문이 없더라. 없으니 이상하지. 나는 가끔 길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내가 알던 문이 사라지고, 다른 데 문이 생긴다. 그럴 땐 잠깐 멈춰 선다. 멈춰 서면, 네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여기예요.” 그 소리가 길 표지판 같다.
인형을 무릎에 올려놓고 말 건 것도 알아. 얘가 말이 없어서 내가 대신 떠들었다. 조용한 건 싫지 않다. 그래도 내가 떠들면, 집이 조금 덜 비어 보인다. 네가 와서 “오늘은 여기서 자게 하자” 했을 때, 마음이 놓였다. 나도 집주인이니까, 같이 정하면 좋다.
어제 그릇 하나가 “쨍그랑!” 하고 퇴사 신고를 했지 뭐니. 바닥에 별 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니, 순간 내가 인사발령 난 줄 알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네가 “그릇만 바꾸면 돼요. 엄마는 교체 대상 아님”이라고 말하길래, 그 한 줄 공고문에 슬며시 기대 앉았다. 그러자 가슴에서 엘리베이터가 ‘지상 1층—안정’에 멈추듯, 숨이 스르륵 가라앉더라.
그날 밤, 불 꺼진 방에서 네 얼굴이 순간 젊은 날 그 사람하고 겹쳐 보였어. 그래서 무심코 “주무세요” 하고 먼저 재웠지. 내가 대역배우를 불러다 쓴 셈이네. 미안하면서도 참 고마웠다. 네가 곧바로 “네, 먼저 주무세요”라고 받아주길래, 내 마음이 쑥 내려앉더라. 네 숨이 잔잔한 파도 같아서 금세 잠이 왔다. 출연료? 다음 날 내가 준 포근한 눈웃음 한 장으로 결제 완료다. 앞으로도 가끔 대역 요청이 있을지 모른다. 야근수당은 대신 볼 토닥토닥 두 번, 이자까지 얹어 줄게.
그날 밥상에서 내가 “보이소, 이거 잡솨 보이소” 하며 너를 손님처럼 대했다지? 에구, 미안하네. 근데 솔직히 말하면, 그건 '낯선 사람 모드'라기보다 '귀한 손님 모드'였단다. 우리 집 식당 규정에는 제일 귀한 손님이 늘 너거든. 그래서 접대 멘트부터 나간 거지. 판매는 안 하고 사랑만 무한리필이니, 눈치 보지 말고 더 드셔—이런 뜻이었어.
네가 말한 그 어려운 말, “정체성 네트워크”? 맞다, 내 머릿속 신호들이 가끔 줄넘기하듯 엉키기도 한다. 그래도 이상하지? 머리는 잠깐 길을 잃어도 젓가락은 늘 네 그릇 쪽으로 가고, 입은 “손님”이라 부르면서도 심장은 “우리 아이다” 하고 먼저 대답한단다. 뇌는 가끔 방송 사고를 내도, 마음은 생방송으로 잘 나간다—광고 없이.
혹시 내가 또 “보이소~ 손님, 많이 드이소” 하고 부르면 너무 서운해 하지 마렴. 그건 ‘거리 두기’가 아니라 ‘존중 모드’야. 그 순간엔 그냥 이렇게 맞장구쳐 줘도 좋아. “예, 사장님. 단골손님 왔습니다.” 그러면 나는 “단골 겸 아들, 오늘도 대접합니다” 하고 더 많이 떠줄 테니. 우리가 이렇게 장난 한 숟갈, 웃음 한 젓가락 얹으면, 밥은 더 달아지고 하루는 덜 힘들어진다.
혹시 내 말이 또 어긋나거나 메뉴가 뒤섞여도, 괜찮다. 다음 접시는 다시 차려 내면 되고, 다음 문장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중요한 건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네가 젓가락을 드는 그 순간 나는 여전히 너의 엄마라는 사실이다. 오늘 저녁 예약, “귀한 손님 겸 아들” 한 자리—이미 잡아 두었다. 오시는 길에 배만 가져오게. 사랑은 내가 무제한으로 채워 줄게.
가끔은 이름이 비눗방울처럼 “푹” 하고 도망가 버려서 내가 “누구세요?”를 누를 때가 있지. 그럴 땐 네 말대로 너를 잠깐 투명 모드로 만들어 버리는 모양이야. 그런데 이상하지? 머리는 로그아웃돼도 손은 늘 로그인 상태더라. 네 무릎에 작은 상처가 보이면 내 손가락이 먼저 출동해 “괜찮다" 버튼을 슥슥 문질러 누른다. 그건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달린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길 찾는 거지. 그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아, 맞다. 나는 엄마다.” 그 순간 내 숨도 다시 근무 교대 들어가고, 우리 둘 다 온라인 복귀 완료!
나는 요즘 냄새로도 길을 찾는다. 비누 냄새, 국 끓는 냄새, 밤에 이불에서 나는 햇볕 냄새. 냄새를 맡으면, 집이 있다. 소리로도 안다. 컵 내려놓는 소리, 리모컨 딸깍, 네 발소리. 그 소리들이 한 줄로 서면, 나는 그 줄 따라가서 네 얼굴을 본다.
그 ‘야간이사’ 총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나일 게다. 서랍 속 비누는 요즘 과로가 심해 “신분 세탁” 좀 하라고 소파 뒤로 휴가를 보냈고, 리모컨은 권력이 너무 세서 잠깐 베개 밑으로 망명 조치했다. 집안 치안 유지를 위한 임시 배치랄까. 너를 빙빙 돌게 한 건 미안하다만, 내 머릿속 길이 자꾸 바뀌니 물건들 길도 한번쯤 바꿔 균형을 맞춰봤다—그렇다고 해두자.
다음부턴 이사 공지 남겨둘게. 포스트잇으로 ‘비누: 소파 뒤 파견 근무’, ‘리모컨: 베개 밑 임시 대피’ 이렇게. 너는 가내 지도 업데이트 담당, 나는 표지판 담당. 덕분에 우리 집엔 ‘비공식 동선’이 생겼지만, 네가 있어 나는 길을 잃어도 집을 잃지 않는다. 설거지로 종목 바꿔 준 것도 고맙다, 내 든든한 집배원 겸 탐정 씨.
내가 너를 보고 “누구세요?” 할 때, 나는 겁이 난다. 그 말이 뾰족한 줄도 안다. 그런데 그 말 뒤에 네가 내 어깨를 톡 치면, 뾰족함이 둥글어진다. 네가 통역을 한다. “엄마가 찾는 그 사람, 바로 나예요.” 그러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 끄덕이는 건 잊지 않았다.
낯선 길을 걷지만, 길이 아주 낯설기만 하진 않다. 중간중간에 벤치가 있다. 우리는 그 벤치에 앉아 숨을 맞춘다. 너는 길을 읽고, 나는 하늘을 읽는다. 둘 다 필요하다. 하늘에 구름이 생기면, 너는 우산을 챙긴다. 나는 구름 모양을 말한다. “오늘은 솜.” 그러면 둘 다 웃는다.
나는 네가 통역사 하겠다는 말이 좋다. 통역사는 양쪽 말을 다 들어야 한다. 내 말이 섞여 나와도, 네가 풀어 주면 된다. 나는 그저 말의 바깥에서 네 얼굴을 본다. 얼굴이 다 말해 준다. “괜찮다.” 그 말, 네 얼굴에 쓴 거 내가 읽는다.
내가 나를 잊어도, 네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건 안다. 서 있다가, 노크하다가, 웃는다는 것도 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우리 둘이 매일 새로 쓰자. 오늘의 문장을.
너를 본다. 낯설고, 반갑고. 둘 다 맞다. 그 사이에 앉아서, 나는 차를 식힌다. 그리고 천천히 마신다. 천천히 마시는 법은 아직 안 잊었다.
어제의 나와 다르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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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메모
낯섦. 같은 단어지만, 돌봄에서의 낯섦은 층이 많다. 뇌과학 책을 펼치면, 용어는 명료하다. 해마의 약화, 연합피질의 변형, 예측 부호화의 오류, 살리언스 네트워크(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언제 모드(생각집중)를 바꿀지 실시간으로 결정하는 뇌의 스위치)의 과민 혹은 둔감. 하지만 현장에서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화면 속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와 “이제 그만 나가요”라는 말을 듣는 TV, 무릎 위 인형에게 건네는 “집에 안 간다”는 푸념, 사라졌다 나타나는 리모컨—이 서사가 더 정확하다. 이 둘 사이를 이어 주는 말이 필요했다. 나는 그 말을 '낯섦의 문법'이라고 적어 두었다.
문법 1: 현실의 경계는 조정 가능하다.
뇌는 예측하고, 틀리면 고친다. 치매에서는 이 보정이 느려지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나는 보정을 강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안전을 먼저 확보한다. 화면 속 손님은 존중하되, 집의 규칙은 명확히 한다. “지금은 면회 시간 끝났대요.” 인형은 존재를 인정하되, 시간표는 기입한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데려다줘요.” 경계를 부수지 않고, 경계의 위치를 살짝 옮기는 방식. 덜 다치고, 덜 싸운다.
문법 2: 감각의 지도는 재작성 중이다.
’온기‘ 대신 소리, 냄새, 무게, 리듬을 기록한다. 컵을 내려놓을 때의 ‘딸깍’, 비 온 뒤의 젖은 공기 냄새, 숟가락을 들 때의 팔의 들어 올림,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와 엄마 코고는 소리 사이 박자의어긋남. 이들은 모두 좌표다. 좌표를 찍으면 길이 생긴다. 내가 걷는 길이 아니라, 엄마가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속도를 줄이고, 표지판을 더 촘촘히 세운다.
문법3: 물건들의 ‘제 자리’(바뀐 자리 포함)
엄마는 물건 자리를 자주 새로 정한다. 서랍 속 비누는 소파 뒤, 리모컨은 싱크대 밑. 예전 기준으로 보면 ‘혼란’이지만, 지금 엄마의 세계에선 분명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유를 묻는다. “여기가 더 편했어요?” 엄마가 “응” 하면, 그곳을 오늘의 임시 표준 자리로 삼는다. 대신 나는 위험만 정리한다. 미끄러질 것들은 치우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가린다.
거창하게 말하면 '사물의 사회성'이지만, 쉽게 말해 집 안 물건들도 서로 어울리는 자기들만의 질서가 있다. 나는 그 질서를 억지로 되돌리기보다, 살짝 조정해 주는 사람이 된다. 오늘의 제 자리는 어제와 다를 수 있다. 괜찮다. 지도를 고치면 길이 생긴다.
문법 4: 이름보다 빠른 신호.
해마가 흔들리면 이름이 늦는다. 그러나 신호는 먼저 온다. 엄마는 내 무릎 옆 상처를 먼저 본다. 나는 그 우선순위를 기록한다. “통증·불편 신호 탐지 유지.”
이름이 없는 날에도 반응은 있다. 반응의 사전을 만든다.
눈썹의 미세한 들림 = 불편.
입술 모서리의 반쯤 올라감 = 농담 가능.
손바닥의 가벼운 터치 = 설명이 길다, 줄여 달라.
이 사전은 매일 업데이트된다.
문법 5: 통역자의 역할.
통역은 정확한 번역보다 상호 보존이 우선이다. 엄마의 세계를 꺾지 않고, 우리 집의 안전도 꺾지 않게. 그 사이에서 문장을 만든다. “여긴 출입문이 닫혔어요—그래서 손님은 내일 와요.” “얘(인형)는 자고 싶대요—여기 덮어 줄까요?” 통역에는 유머가 도움이 된다. 실패해도 크게 다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낯섦은 커다란 ‘결손’이라기보다, ‘다른 규칙’이다. 규칙이 바뀌었으니, 학습이 필요하다. 학습에는 기록이 필요하다. 나는 집안에 작은 노트를 한 권 더 늘렸다. 제목은 “오늘의 문장”. 그날 엄마가 만든 새로운 문장을 복기한다. “새가 우리보고 오라 카네.” 이 문장은 ‘환청’이 아니라 초대다. 초대에 어떻게 답할지 내 쪽 문장을 덧붙인다. “지금은 바람이 대신 왔다고 전해 줄게요.” 초대와 답장이 쌓이면 대화가 된다. 대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말이 엉키는 날에도, 대화의 리듬은 남는다.
돌봄의 전략도 바뀐다.
1. 한 번에 한 걸음
“지금은 컵부터요.” “이제는 양말 차례예요.”처럼 한 가지만 딱 정해서 처리한다. 갈래를 줄이면 덜 헷갈리고 성공률이 올라간다.
2. 5초 숨고르기
바로 고치지 말고 속으로 다섯을 센 뒤에 제안한다. 그 5초 사이에 엄마의 ‘내가 선택했다’는 느낌이 생기고, 자존감이 지켜진다.
3.웃음 쿠폰 3장
하루에 세 번,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푼다. 실패해도 상처가 작고, 성공하면 긴장이 스르르 내려간다.
예: “컵이 먼저 졸업할 차례네.” / “양말이 주인 찾아가자~” / “비누는 오늘 휴무래요, 손만 받아요.”
- 여기서 팁 - 엄마의 말 이해하고 대응하기
“지금은 문이 닫혔대요. 내일 다시 오라고 전할게요.”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엄마의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논쟁 피하기), 안전한 경계와 시간 여유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엄마 입장에선 TV 화면의 인물이 “우리 집에 들어와 있다”고 실재처럼 느껴진다. 이때 “그건 TV예요”라고 바로잡으면 대개 반발·불안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상황을 이렇게 번역하면 안전하다.
1. 경계 만들기(문): “지금은 문이 닫혔대요”
TV 화면의 테두리(프레임)를 ‘문’처럼 설명해서 “닫혀 있어서 더 못 들어오고/못 나가요”는 물리적 한계를 부드럽게 알려 불안을 낮춘다.
2. 책임 덜어주기 : “내가 대신 전할게요”
엄마가 화면의 인물과 계속 실랑이하지 않도록 “내가 처리하겠다”는 신호를 준다. 돌봄자가 책임을 잠시 가져와서 엄마의 긴장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3. 시간 완충 : “내일 다시 오라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줄이고, 주제를 부드럽게 넘길 시간을 번다. 이후 “차 한 잔 하자”, “창밖 볼까요?” 같은 전환이 쉬워진다.
즉, 위 문장은 “맞서 부정”이 아니라 인정 + 경계 + 시간 벌기의 조합이다. 치매 돌봄에서 흔히 쓰는 ‘밸리데이션 (인정요법, Validation Therapy) 기법은 치매 환자의 감정과 기억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공감하는 치료법이다. 기억이 왜곡되거나 실제와 다르더라도 이를 부정하거나 수정하려 하지 않고, 감정에 집중해 이해하고 신뢰를 쌓으며 비언어적 의사소통(표정, 몸짓, 목소리 톤)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전환(redirect)’ 기법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엄마의 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존중)안전한 선을 긋고(경계) 당장 행동해야 할 압박을 줄이며(시간) 다른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다.(전환). -
무엇보다, 결론을 바꾼다. 더는 “지금-여기를 지키겠다” 같은 표어로 닫지 않겠다. 그 다짐은 이미 몸이 하고 있다. 대신 나는 이렇게 적는다. 낯섦의 문법을 배우는 통역자, 바뀌는 집의 지도 제작자가 되겠다고. 내 일을 이렇게 정의하면, 두려움은 할 일로 바뀐다. 할 일은 손에 잡힌다. 손에 잡히는 일은 덜 무섭다.
오늘의 마지막 기록.
저녁, TV에 바다가 나왔다. 파도가 밀려와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다시 빠져나갔다. 엄마가 말했다. “어머나, 저거봐라 대단하다.” 나는 볼륨을 한 칸 낮추고 말했다. “그러네, 문턱 젖겠다.” 엄마가 웃었다. 웃음의 길이를 시계 초침으로 세 보았다. 다섯 칸. 다섯 칸이면 충분하다. 그 사이에 우리는 같은 세계에 있었다. 내일은 여섯 칸을 목표로 해 본다. 목표를 너무 크게 세우지 않는 것도, 이 집의 새 규칙이다.
낯섦은 끝이 아니다. 새 문장들의 시작이다. 나는 내일도 노트를 펼칠 것이다. 첫 줄에는 이렇게 쓸 예정이다.
'오늘의 표지판: 네 목소리.'
그 표지판 따라, 다시 길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