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억의 소실과 존재 사이에서
아들의 편지
엄마,
거실 창가에 놓인 벤자민이 바람에 잎사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잎들이 커튼처럼 겹겹이 드리워져 창을 가리다가도, 창밖에서 스며든 바람에 살짝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를 모시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올 때 우리가 함께 양재 꽃시장에서 데려온 그 벤자민 말이에요.
매일같이 물을 주다 보니 십년의 세월이 그 물의 족적이 되어 어느 날 문득 화분 한쪽에 하트 무늬가 선명히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이 엄마의 얼굴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나무는 이제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 쉬는 또 다른 가족, 반려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잎사귀 끝이 흔들릴 때, 나는 엄마의 기억도 저 바람결을 닮았음을 보았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기억은 흩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이미 사라진 듯 흔적을 감춥니다. 하지만 바람이 스치고 난 뒤 남는 선명한 청량함처럼, 기억이 흩어지는 그 빈틈에도 여전히 자취는 남아 있습니다. 마치 엄마와 나 사이의 연결끈이 기억을 넘어선 깊은 시공에 뿌리내려 있다는 듯이요.
어느날 아침이었던가요. 엄마가 늘 그랬듯이 일찍 일어나 내가 일어나기 전 대변을 가득 품은 기저귀를 벗어 집 안 어딘가에 숨겨 놓으셨지요. 바지를 벗은 채 기저귀가 없어진 모습으로 거실을 서성이다 부시시 일어난 나를 마주하자 난처해 하면서도 불안해 하는 엄마를 보는 순간 난 무언가를 직감하고 잠이 덜 깬 상태로 정신이 반이 나가 집안을 이리저리 샅샅이 뒤졌었죠. 결국 엄마의 허리춤 아래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기저귀는 30분 후 옷장의 옷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지요. 유래카! 딱 그 심정이었습니다.
그 순간 내 안에 뒤섞여 밀려온 감정들은 참 복잡했습니다. 낭패감과 슬픔, 그리고 안도감이 한꺼번에 올라왔고, 기저귀를 꺼내 드는 내 곁에서 어색하게 미소 짓던 엄마의 표정을 보자 알 수 없는 웃음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이런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늘 긴장하며 엄마를 살펴야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존엄을 잃어버린 모습'이라 생각한 엄마의 모습 속에서도, 여전히 장난스럽고, 여전히 엄마다운 자취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엄마가 앓고 있는 치매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병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여전히 '엄마다운 흔적'이 숨어 있음도 또한 나는 보았습니다.
뇌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엄마의 기억 회로는 점점 끊어지고 있습니다. 시냅스 사이의 연결은 약해지고, 정보의 흐름은 파편처럼 흩어집니다. 단어 하나, 사건 하나, 얼굴 하나가 차례차례 사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감춰졌던 옷장 속의 기저귀에서, 오히려 존재의 새로운 얼굴을 보았습니다. 기억을 숨기려는 엄마의 몸짓, 그것이 바로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라는 엄마의 신호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돌봄은 마치 감정의 진자 운동 같습니다. 한쪽 끝에는 깊은 슬픔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불현듯 피어나는 웃음이 있습니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특히 기저귀를 찾으며 나는 그 두 끝을 분주히 오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이, 흔들림의 중심에는 잊을 수 없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와 나 사이에서만 흐르는 비밀스러운 신호, 기억이 흩어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온기였습니다.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존재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 속에 뿌리내린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확신합니다. 비록 내 이름이 엄마의 입술에서 지워져도, 우리는 서로의 눈빛과 손길 속에서 다시 늘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창밖을 보니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빛은 잠시 후 사라지겠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흐른 것일 뿐입니다.
엄마의 기억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 다른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엄마, 나는 이제 그 흐름을 붙잡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신의 온기를 더 깊이 느끼고자 합니다.
엄마의 답장
아들아
네 편지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가 기저귀를 어디 숨겨놨다고? 아이고, 내가 언제 그랬을까. 그런데 너는 결국 찾아냈구나. 어린 시절 네가 집안 물건을 이리저리 숨겨놓고 나 몰래 장난치던 게 떠오른다. 그때마다 내가 못 찾게 하려고 물건들을 여기저기 감춰두곤 했지. 네가 울상 지으며 찾지 못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숨기고, 네가 찾는구나. 세상은 참 묘하게도 돌고 도는 법이지.
요즘 나는 내 기억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단다. 어떤 날은 네 이름이 혀끝에 맴돌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어떤 날은 네 얼굴마저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신기한 건, 네 손을 잡으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분명해진다는 거다.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이 따스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 머리는 몰라도 내 심장은 기억해 주는 모양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두렵기도 하단다. 조금씩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하지. 하지만 네가 말했듯, 존재는 기억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나도 조금씩 알겠다. 눈앞에 햇살이 흘러드는 순간, 네 웃음소리가 부엌에 퍼지는 순간, 생선구이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 나는 비록 과거를 잊어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아들아, 네 말이 맞다. 사라진다는 건 지워지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 거다. 기억도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물소리와 바람은 여전히 남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과거를 붙잡으려 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이 순간, 네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네가 나를 부르며 웃어줄 때, 나는 그 웃음만으로 세상이 가득 찬다. 내가 모든 걸 잊어도, 너는 내게 언제나 아들이고, 나는 언제나 네 엄마다. 이 사실은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오늘 아침, 바람이 커튼을 흔드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일렁이며 흘러가는 중이다.”
그리고 곁에서 네가 웃고 있었으니, 그 흐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겠다.
늘 네 곁에서,
엄마가
아들의 메모
벤자민 잎사귀 사이로 흘러든 빛이 작은 물결처럼 거실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거실 의자에 앉은 나에게도 햇살이 스칠 때 나는 생각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가 내 이름을 잊는다 해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엄마를 바라보는 순간은 여전히 우리 사이의 단단한 연결이 살아 있음을.
엄마는 이제 스스로 대소변을 처리하지 못해 아기처럼 하루에도 수차례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 오늘도 나는 익숙하면서도 기계적으로 기저귀를 갈아드렸다. 그런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엄마는 옆에 두었던 기저귀를 집어 들고는 세 번 접어 식탁 위에 올려두셨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짧은 순간, 엄마가 기저귀를 들고 나름의 방식으로 '숨기려' 애쓰던 모습을 떠올리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일까. 존재란 무엇일까. 기저귀 하나를 감추려는 엄마의 몸짓 속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 있음의 본질을 보았다. 그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여전히 ‘나는 여기 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마지막 몸부림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를 떠올렸다. 그는 인간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엄마의 행동 역시 혼돈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방식일 것이다.
뇌과학은 또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치매가 전두엽과 해마를 망가뜨리면서 기억과 판단은 점점 희미해져도, 감정과 습관은 뇌의 깊은 층위에 남아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엄마는 여전히 나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있고, 손끝에서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감각의 회로는 기억보다 오래 버티는지도 모른다.
돌봄은 단순한 수발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존재를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자,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더라도, 나는 엄마를 통해 인간 존재의 진면목을 배운다.
엄마가 창가에 앉아 석양이 내려앉는 하늘을 오래 바라볼 때면, 나는 마치 엄마가 속으로 이렇게 묻고 있는 듯 느낀다. “저 구름은 왜 늘 흘러가는 걸까.” 아이처럼 단순한 물음 같지만, 사실 그것은 가장 깊은 철학적 질문이다. 존재란 왜 흘러가는가. 인간은 왜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현대 물리학까지 이어진 근원적 물음이 엄마의 눈빛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나는 엄마의 손톱을 다듬어 드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구름이 흘러가는 건, 바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늘 곁에 있지요. 엄마가 나를 잊으셔도, 내 마음은 바람처럼 곁에 있어요.”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그래,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그 짧은 대답은, 내 존재가 여전히 엄마에게 느껴지고 있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도시락 속에 담겨 있던 계란말이 냄새, 운동회 날 나를 향해 끝까지 흔들어주던 손, 감기 걸린 밤마다 이마 위에 얹어주던 손길, 피부병 때문에 자주 병원에 가야 했을 때도 걱정할까 봐 태연하게 웃어주던 눈매. 엄마는 지금 그것을 잊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간의 증인으로 존재한다.
뇌과학자들은 기억을 ‘신경망의 흔적’이자 반복된 전기 신호의 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흔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기억이 아니라 감각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의 따뜻함, 그건 이름도, 사건도, 단어도 필요 없는 진실이었다.
가끔은 돌봄 속에서 웃음이 피어난다. 내가 엄마에게 “아버지 어디 가셨어요?”라고 물어보면, 엄마는 “일하러 안나갔나? 오늘 늦게 들어올건가 보네”라며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여전히 기다리는 듯한 대답을 하셨다. 이어 내가 “그럼 아들은 어디 갔어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나를 똑바로 보며 진지하게 대답하신다. “가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엽고 서글퍼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밀려왔다.
인간은 단순히 기억의 총합이 아니라, 순간마다 빛나는 감각과 관계의 존재라는 것을 이제야 분명히 체감한다. 엄마는 기억을 잃어도 여전히 지금-여기의 감각 속에서 세계와 관계 맺고 계셨다.
힘든 순간도 물론 많았다. 엄마가 내 이름을 잊고, 내가 누구인지 물을 때마다 가슴은 찢어졌다. 그러나 아주 가끔, 엄마는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참 좋다.” 그 한마디면 나는 다시 버틸 수 있다. 존재란 어쩌면 그렇게 단순한 것일지 모른다.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온기.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엄마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나는 끝까지 엄마의 존재를 지켜내겠다고. 웃음과 눈물 속에서, 철학과 과학의 질문 속에서, 그리고 돌봄의 일상 속에서. 나는 여전히 엄마와 함께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