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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Mar 20. 2021

# 1. 폭력과 신화

폭력에 대한 신화적 사유의 가능성을 열면서

"신화만큼 폭력으로 가득 찬 서사 양식도 없다."
"no other narrative form is so replete with violence as myth."

- James Jakób Liszka, “Mythic violence: Hierarchy and transvaluation”(1985)



폭력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이라고 하면 즉각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죠. 일상에서도 폭력은 지양해야 할 것 또는 회피해야 할 것으로 치부되며, 폭력을 막지 못하면 타인에게도 전염되어 더 큰 폭력으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폭력이 가지고 있는 전염성은 개인의 삶과 세계의 체제에 위협을 가하기 때문에 이를 제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들이 고안되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법(法)입니다.


그런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언급했듯이, 폭력 중에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도 존재합니다.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된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 요청된다는 역설을 확인할 수 있죠. 이런 역설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폭력 외에도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 폭력’, 지젝(Slavoj Žižek)의 ‘구조적 폭력’, 한병철의 ‘시스템적 폭력’ 등은 그 의미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비가시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가시적인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형태든 간에 폭력을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알려줍니다. 맞습니다. 애석하게도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 폭력을 피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은폐되고 사라진 것 같은 폭력의 정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간다면 폭력이 주는 두려움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 그 자체를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직면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신화’라는 매개를 통해 폭력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신화'라고 하니깐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을 신화라고 지칭하느냐는 국가나 민족, 지역 그리고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역사에 의해 선택받은, 과도한 정당성을 부여받은 빠롤(parole)'을 신화라고 불렀고, 링컨(Bruce Lincoln)은 '이데올로기가 서사화 된 것'을 모두 신화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에 대한 이야기, 기원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이야기를 보통 신화라고 정의합니다. 신화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신화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화의 어원을 따져보면 이것이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화(myth)의 어원은 뮈토스(mythos)에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 형태를 거칠게 이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뮈토스와 로고스(logos)로 대변됩니다. 이야기(서사)는 뮈토스로서, 논변을 뜻하는 로고스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뮈토스는 그 자체로 믿어지거나 믿어지지 않을 뿐, 그것에 대한 토론이나 논박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학문적 인식이나 사고에서 구현되는 비판적 지식은 로고스로 나타나며, 이런 로고스적 지식은 새로운 증거나 논리가 나오는 순간 바로 해체됩니다. 이에 반해 서사로 풀어내는 뮈토스적 지식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뮈토스는 논박이 가능한 로고스와는 달리 강한 담론을 가지는 지식 형태인 셈입니다.


신화는 서사 양식 중에서도 가장 강한 담론(discourse)으로서 기능해왔습니다. 고대부터 국가가 세워질 때마다 건국주를 찬양하고 나라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건국신화를 만들어서 전승시킨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화는 단순히 서사의 한 양태로만 머물지 않고, 신화를 향유하고 전승시킨 집단이 특정 지식 또는 지식체계를 적극적으로 담아낸 서사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폭력에 접근함에 있어 신화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안에 지금까지 적층 된 폭력에 대한 지식을 재확인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더욱이, 리츠카(James Jakób Liszka)의 말처럼 신화만큼 폭력으로 가득 찬 서사 양식도 없습니다. 신화에서 폭력은 가시적으로도 비가시적으로도 존재하며 폭력 없이는 서사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물론, 신화 안에서 폭력의 기능은 어느 하나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폭력의 양태가 다양한만큼 신화도 여러 가지 시각에서 폭력을 다룹니다. 신화를 살펴보면, 폭력은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며 상호 충돌하면서 세계의 질서를 재정립하기도 합니다.


결국,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폭력의 다양태에 주목하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은 폭력에 대한 또 다른 성찰로 나아가는 이정표를 세우고 그 너머를 사유하고자 하는 일종의 '실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가 단순히 유희적 산물이나 과거의 잔재가 아닌 하나의 지식체계임을 인정하고 다가간다면, 폭력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으로,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직면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개정판)』, 민음사, 2000.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2011.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폭력의 위상학』, 김영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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