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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수 Mar 30. 2023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2)

상처 투성이의 영광

학부모 총회날

“학부모 임원하실 분, 지원하시거나 추천해 주세요.”  교무주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나를 쳐다보았지만 손을 들 수 없었다. 

강당으로 가기 전 교무주임 선생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께서 '지원이 어머니는 하실 분 안 나오면 그때 하라'고 하셨어요.  

회장 엄마가 지원하면 부회장 엄마들도 눈치 보며 손 들 거라네요." 


그 말씀을 공개적으로 했었다면 어땠을까?


잠시 웅성거리더니 어디선가 “저는 5학년 A어머니를 추천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지목받은 어머니가 “저는 B어머니를 추천합니다.” 그러자 “저도 C어머니를 추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리허설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더 황당한 건 교무주임 선생님의 대응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A어머니, B어머니, C어머니께서 회장 부회장으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엥? 이게 뭐야.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고, 다른 지원자가 없는지? 호명된 임원들을 찬성하는지?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임원을 선착순으로 뽑다니 말이 돼?'

 6학년 학부모들 쪽에선 “아니, 학부모회에 6학년이 한 명도 없이 이렇게 후루룩 결정하는 게 말이 됩니까? 이건 아니죠!” 


“6학년이 지원을 안 했잖아요”


“5학년도 본인이 지원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도 추천하려고 했어요”

"당연히 회장엄마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정통신문 안 보셨어요? 별개로 한다고 했잖아요"    


“이럴 거면 나도 우리 애 회장 내보낼걸 그랬다”

“나간다고 다 회장 되나?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다. 시장통 같았다.

교장선생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며 강당을 나가셨다. 일부 학부모님들도 나가셨다. 


 긴 얘기 끝에 결국 학생 회장, 부회장 엄마들이 학부모회를 맡게 되었다.

‘내가 이걸 해야 하나? 아, 정말 하기 싫은데...’ 마음이 심란했다.

                        



 같은 교육청소속 학교 학부모회장은 수시로 만난다. 

교육청, 경찰청, 녹색어머니회의 월례회의. 교육. 캠페인등 모여야 할 일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들이 ‘엄마들 할 일 없어요 ‘는 거짓말이다. 선생님께서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선생님들이 모르시는 것이다.) 

1년이 지나도록 나의 이야기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붙어서 남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세상에 학부모회 회장을 서로 하겠다고 엄마들이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런 학교가 있었다네요”

“결정 난 회장을 다시 하자고 우겨서 새로 뽑았데”  

"그건, 아니지. 얼마나 뻔뻔하면 그라노?"

"아이고, 감투를 엄청 쓰고 싶었나 보네"


“아. 네~ 그 학교가 우리 학교고요. 그 회장이 접니다. 소리는 컸지만 쌍욕을 하진 않았어요.”   

  

'저, 감투욕심 1도 없어요. 저도 피해자입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말하고 싶었다.  정말 억울했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줄 테다' 오기도 생겼다. 


부산시의회 참관, 길거리 교통 캠페인. 경찰청 학부모 담당자 퇴직기념식등 부수적인 대외 행사도 열심히 다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의원. 교육청에 건의했다. 덕분에 낙후된 방송실 장비를 바꿨고, 일반 전등을 led로 교체했다. 다음 해 에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천정 공사도 그해 겨울 방학에 같이 했다. 


 6월에는 국제 안전학교 재인증을 받기 위해 3일 동안 인근 유치원 아이들을 불러서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부회장에게 맡겨놓고 교육청 회의에 다녀왔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교육에 참여한 학부모 한분이 "이렇게 더운데 시원한 거 없나? 학교에서는 일 시키고 물도 한잔 안 주나?" 다른 학부모와 이야기하는 것을 교감 선생님이 들으셨다. 회장을 찾았지만 학교에 없었다. 교감선생님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시다 가셨다고 한다.

 학교에 돌아와 교장. 교감 선생님을 찾아갔다.

 “시원한 음료와 물을 주문했는데 교육 중에 먹는 건 아닌 것 같아 마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배달 요청했습니다. 저는 교육청 교육이 있어서 다녀온 것이고요."

 “그랬습니까? 학교에 말씀하셨으면 당연히 준비해 드렸을 텐데요”

 다음날 학교에서 얼음물을 주셨다. 

“학교에서 음료 드렸습니다. 나중에 다른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1년의 임기가 끝났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학부모 총회 때, 작년 회장에게 감사패를 주는 건 관례 같은 거다. 

학교에서는 의례 ‘총회 참석 해 주세요’라고 전화를 한다. 그런데 나는 받지 못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분이 전화를 하셨다. “왜 학교에 안 왔어요? 교장선생님께서 '지원이 엄마가 바빠서 못 간다' 했다던데. 감사패도 안 받겠다 극구 사양했다면서요. 작년 진짜 고생했는데 감사패라도 받지.” 기분이 씁쓸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신 교장 선생님은 나를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구나' 오히려 미련 없이 관계를 끊을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작은 딸도 나도 '회장'이라는 너무나 무거운 왕관을 썼다. 상처 투성이의 영광이었다.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피할 수 도 없었다. 그냥 그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우리는 1년 동안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났다. 각양각색의 상황을 접하면서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지나고 보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모든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진다. 

다만 너무 깊은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딸과 나에게 남은 상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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