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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과 명세빈의 포옹, 남편과 내가 숨죽이고 본 이유

마지막 퇴근 장면에 2022년 12월 남편의 은퇴 날이 떠올랐다

by 김남정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아래 김 부장 이야기)를 보다가 마음이 오래 머무는 장면을 만났다. 김 부장(류승룡)이 마지막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이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밥 줘"라고 말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아내 박하진(명세빈)은 그 작은 떨림을 단번에 알아채고 조용히 다가가 남편을 꼭 안아준다.



"고생했다, 김 부장."



그 말과 함께 김 부장은 마침내 아내의 품에 기댄 채 눈물을 흘린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했다. 가족이 건네는 사랑과 온기가 가장 담백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과장되지 않은 이 장면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장면을 보던 우리 집 남편은 한참 화면만 바라만 보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드라마 속 김 부장이 느낀 마음이, 남편의 마음과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2022년 12월 남편의 은퇴 날이 떠올랐다.


IE003551020_STD.jpg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스틸컷 ⓒ JTBC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


남편의 마지막 출근은 특별한 의식 없이 평소처럼 흘렀다. 하지만 현관에 들어선 그의 표정은 익숙함과 낯섦이 섞여 있었다. 거실에 내려놓은 감사패를 한참 바라보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해 겨울, 딸들은 아빠의 33년 은퇴 기념으로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을 준비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베를린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장벽을 따라 걸으며 그는 마치 오랜 꿈을 이룬 사람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드레스덴의 고즈넉한 겨울 풍경 속에서 "은퇴가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묻어 있었다.


IE003551001_STD.jpg ▲독일 베를린브란덴부르크문, 2022년 11월 여행 사진입니다. ⓒ 김남정


은퇴 후 남편은 그동안 미뤄둔 소소한 꿈들을 하나씩 실천했다. 사계절의 산을 오르고, 중고등학교에서의 안전지킴이 봉사활동, 도서관에서 보내는 조용한 시간... 오랫동안 가장으로 살아오느라 뒤로 미뤄야 했던 시간들을 되찾는 듯했다. 나도 남편도 그런 일상이 은퇴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늘 뜻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은퇴 2년이 지나던 즈음, 남편은 아킬레스 건염 진단을 받았다. 꾸준한 스트레칭과 물리치료를 병행했음에도 통증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올해 10월, 남편은 아킬레스건 수술을 받았다.



IE003551007_STD.jpg ▲아킬레스재건 수술수술 한 달 후 통깁스를 제거하는 모습 ⓒ 김남정


그 이후 남편의 일상은 멈췄다. 봉사도, 등산도, 함께 걷던 산책길도 잠시 내려놓았다. 때때로 드라이브를 하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애써 보지만, 집안에 오래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먹먹했다. 은퇴라는 단어가 단순히 '퇴직'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다시 깨닫게 됐다. 익숙한 역할을 잃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바로 그 길 위에 우리 부부가 함께 서 있었다.



"우리 함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요"



그 무렵 드라마 '김 부장 이야기'를 보기 시작했다. 김 부장이 은퇴 통보를 받는 장면에서 남편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고, 마지막 회식 장면에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퇴근 후 아내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말없이 화면만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국 사회에서 은퇴는 단지 '일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가족을 책임져온 무게, 꾸준히 버텨야 했던 자리, 사회 속에서의 역할, 경제적 책임감... 어쩌면 잊고 지냈던 '나'라는 사람과 마주하는 시간, 남편은 지금 그 모든 감정을 지나가는 중이다.


IE003551009_STD.jpg ▲설악산 등산설악산 공룡능선을 마주한 남편 ⓒ 김남정


그러나 그 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12월이면 재활 운동에 들어간다. 나는 마음속으로 작은 소망을 품고 있다. 꾸준히 재활 운동을 해 내년 3월, 큰딸의 결혼식에서 남편이 당당히 무대를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그 순간을 함께 맞이한다면, 지난 시간의 상처와 고단함도 한 줄기 빛으로 바뀌지 않을까. "언젠가는 다시 산에 오르자"는 그의 말에 나는 미소로 답한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이제 우리, 새로운 리듬을 함께 만들어가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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