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아버지의 여행가방>
지난 2일,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 독서 챌린지 첫날. 나는 오래전 읽었던 책 한 권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다. 새 책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손은 이미 읽은 책으로 향했다. 다시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동안 달라진 나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예전과는 다른 지점에 멈추게 되고, 다른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된다. 그 차이가 바로 시간이고, 삶이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수상 연설문을 묶은 책이다. 작품이 아니라 연설이라는 점에서 다소 낯설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연설문이야말로 작가의 문학관과 삶의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게는 몇 분, 길어도 30분 남짓의 말속에 작가들은 평생을 바쳐온 질문과 고백을 압축해 담아낸다.
이 책에 실린 작가들의 이름만 보아도 한 권의 문학사가 펼쳐진다. J. M. G. 르 클레지오, 오르한 파묵, 가오싱젠, 귄터 그라스, 주제 사라마구,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오에 겐자부로, 토니 모리슨,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보 안드리치, 알베르 카뮈 등.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시대를 살았지만 이들이 연단 위에서 꺼낸 말들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의 책임, 침묵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문학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에 대한 믿음이다. 글을 쓴다는 일이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사회와 맺는 관계라는 인식이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라는 제목은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오르한 파묵의 수상 연설문이다. 오르한 파묵에게 여행 가방은 단순한 여행 가방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과 기억, 정체성과 삶의 흔적을 담고 있는 상징이다. 연설문은 작가가 평생 써온 작품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가 어디서 출발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여주는 가방 속 물건들에 가깝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여행 가방을 열어보듯, 우리는 작가의 문학적 뿌리와 상처, 신념을 하나씩 꺼내 보게 된다. 화려한 수상 순간이 아니라, 그 자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담긴 가방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기고 간 여행 가방을 열어보듯, 독자는 작가의 기억과 신념, 침묵과 선택을 하나씩 꺼내 보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연설은 특히 인상 깊다. 그는 글쓰기를 "자기 안의 또 다른 목소리를 찾는 고독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터키라는 정치적, 문화적 긴장 속에서 글을 써온 그의 고백은 문학이 개인의 내면에서 출발해 사회적 책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 고독을 선택한 작가의 자세가 또렷하다.
토니 모리슨의 연설 역시 오래 남는다. 그는 언어가 폭력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언어는 죽은 언어"라고 단언한다. 문학이 아름다움 이전에 윤리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수상 작품집 못지않게 작가들의 연설문에 관심이 많다. 오히려 마음이 간다. 작품이 오랜 시간 다듬어진 결과라면, 연설은 작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묻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문학과 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작가들은 가장 중요한 문장만을 선택한다.
내가 연설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9년 예루살렘 상 수상 연설문, '벽과 달걀'을 읽고 난 이후다.
"높고 단단한 벽과 그 벽에 부딪혀 깨지는 달걀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이 문장은 문학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한강 작가는 문학을 "인간이 인간에게 끝까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폭력과 고통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겠다는 작가의 태도와 말은 작품 세계에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것이 문학이 지닌 힘의 근원임을 연설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아버지의 여행 가방>은 오래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질문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말이 넘쳐 나는 시대일수록, 작가들이 연단 위에서 남긴 짧은 문장들은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브런치 독서 챌린지 첫날, 내가 이 책을 다시 꺼낸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책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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