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아이들... 출가는 이별이 아니라 연결
봄이라 그런지 주변에서 결혼 소식이 부쩍 많다. 청첩장이 하나둘 도착하고, 꽃이 피듯 새로운 출발 이야기가 들린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두 주 후면 큰딸 결혼식이다.
본식 드레스를 입어보던 날이었다. 커튼이 열리자 흰 드레스를 입은 딸이 웃고 있었다. 조명이 비치자 드레스 자락이 바닥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어때요?"
딸이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딸의 얼굴인데, 그날따라 낯설었다. 운동화 끈을 묶어주던 아이가 이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 났기 때문이다.
"예쁘다."
그 한 마디 뒤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기쁨과 허전함,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흔들림이 동시에 밀려왔다. 부모라는 자리는 이런 순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그날 예복점(드레스숍)에는 딸과 예비신랑 그리고 우리 부부와 작은딸이 함께 있었다. 누가 주도하지도, 누가 끌고 가지도 않았다. 모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보탰다.
"이건 네가 불편해 보여."
"이게 너답다."
"웃는 얼굴이 제일 살아."
네 벌을 입어 본 끝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 드레스가 하나 남았다. 만장일치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결혼은 우리가 치르는 행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선택이라는 것을.
내가 결혼하던 해는 1991년이었다. 그때 결혼은 집안의 큰 행사였다. 신혼집도 부모님과 함께 보러 다녔고, 혼수도 엄마가 발품을 팔아가며 정했고, 하객 명단 역시 부모 몫이었다. 신랑 신부는 준비 과정의 중심이 아니라 결과의 주인공에 가까웠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큰딸의 결혼 준비는 철저히 당사자 중심이다. 예식장 계약, 드레스 투어, 스튜디오 촬영, 하객 관리, 예산 조율까지 모든 과정을 딸과 예비 사위가 직접 한다. 우리는 보고를 받는다.
"이렇게 하려고 해요."
"이건 괜찮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답한다.
"그래, 너희가 좋다면 그렇게 해."
큰딸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은 주변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즘 많이 바쁘시겠어요."
"딸 결혼 시키느라 정신없으시겠네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다. 작년 봄 작은딸 결혼 때도 그랬다. 당사자들이 기획자였고, 진행자였고, 총괄 책임자였다. 자녀의 결혼을 처음 치르던 터라 낯설고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스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부모의 역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녀의 책임이 커진 것이었다. 요즘 결혼 문화는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다. 형식보다 의미를 따지고, 체면보다 합의를 우선한다. 예식 규모는 줄어들고, 부모의 체면보다 두 사람이 살아갈 방식이 중심이 된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낯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할 일이 없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본식 드레스를 고르던 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바뀌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섭섭함은 존중으로 바뀌었다.
'이 아이는 이제 정말 자기 인생을 준비하고 있구나.'
결혼식 축사를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고쳐 썼다. 처음에는 훈계가 섞였고, 다음에는 걱정이 많았고, 그다음에는 내 이야기만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시가 있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결혼은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을 맞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담아, 길지 않지만 부모의 진심을 담은 축사를 완성했다.
"네가 선택한 삶을 믿는다."
"이제는 부모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으로 존중한다."
그 축사를 딸에게 먼저 보내며 수정할 부분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
축사는 딸을 보내는 말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결혼이 떠남처럼 느껴졌다. 딸을 보내는 일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결혼은 한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더 가족으로 맞는 일이다. 딸은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확장을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달라졌지만 마음은 같다.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드레스를 입은 딸을 보던 그날, 나는 잠시 흔들렸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흔들림 끝에는 이상하게도 평온함이 남았다.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이별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누군가 "많이 바쁘시겠어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바쁘진 않아요. 대신 많이 배우고 있어요."
아이들의 결혼을 통해 부모로서의 자리도 다시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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