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를 읽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의 노트는, 그렇게 '알려진 도시'의 이면을 기록하며 '미지의
도시'를 그려나가는 하나의 '종이 다큐멘터리'이다." - 프롤로그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는이 문장으로 책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방송 다큐멘터리와 교양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해 온 저자는 오래된 골목과 일상의 풍경 속에서 시간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글을 써왔다. 책은 단순한 도시 안내서가 아니라, 도시와 거장들의 문장을 교차하며 독자에게 문장 사이를 거닐어보라 권하는 기록이다.
작은딸이 건넨 선물이라 더욱 반가웠다. 밤늦도록 밑줄을 긋고, 여행했던 도시가 등장하면 그 도시를 다시 걷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단순히 도시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삶과 취향, 기억을 함께 불러내는 '종이 다큐멘터리'였다. 책은 'Part 1~Part 4'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와 삶을 걷는 기록
'Part 1'의 '도시가 불안을 간직하는 방법'에서 작가는 말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감정을 일으키죠." 휘청거리는 날이면 빔 벤더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그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속 베를린은 불안 그 자체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장벽이 무너지기 2년 전, 이념으로 갈라진 도시의 공기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베를린 국립도서관, 포츠담 광장,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인근 거리를 걸으며 그 불안을 현재의 감각으로 소환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2022년 겨울, 오후 4시의 깜깜한 베를린 하늘을 떠올렸다. 별처럼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마켓의 불빛,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걸을 때의 먹먹함. 베를린은 여전히 상처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상처를 드러낸 채 자신의 색을 지켜내는 도시다.
작가는 도시의 불안을 '결핍'이 아니라 '감정의 근원'으로 읽어낸다. 완벽하지 않기에 흔들리고, 흔들리기에 살아 있는 도시. 이 시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겹친다. 불안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태도. 이 책은 도시를 통해 존재의 태도를 묻는다.
'Part 2'는 서울의 이면을 천천히 안내한다. 그중에서도 종묘를 다룬 대목은 유난히 깊이 남았다. 내가 30년 넘게 살아온 서울을 다시 보여준다.
"이런 곳이 세상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공간감을 주는 건물은 처음 본다. 이것은 건축이 아니라 정신이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에서 비움과 절제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고 한다.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걸었던 그 공간은, 화려함 대신 비움으로 존재하는 장소였다는 걸 이 부분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길게 뻗은 월대와 정전의 단정한 기둥들, 반복되는 선과 여백. 그곳에는 과시가 없다. 대신 절제가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이 남긴 문장을 떠올렸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종묘는 그 문장을 가장 잘 증명하는 공간이다. 처음 찾았을 때는 넓고 비어 있는 마당이 다소 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이야말로 종묘의 본질이다. 우리는 얼마나 비워내며 살고 있는가. 속도와 성취를 쌓아 올리는 대신, 덜어내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작가는 종묘를 통해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빌딩 숲과 네온사인 너머, 절제와 균형의 미학이 살아 있는 도시, 종묘를 통해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본다. 화려함 너머 절제와 균형의 미학이 남아 있다. 현대 사회의 과잉 속에서, 종묘의 침묵과 비움은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Part 3'의 '길을 잃어도 괜찮아'에서 작가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빌린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또 리베카 솔닛의 문장을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길을 잃은 상태를 편하게 느끼는 기술'
이 대목은 여행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여행은 특정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 먼 도시로 떠나지 않아도, 새로운 눈을 갖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여행자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방향 감각의 상실이 아니라, 통제에서 벗어나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이 논의는 단순한 산책론을 넘어선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정해진 서사를 벗어나는 일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과 목적을 잠시 유보하는 일이다. 작가는 도시를 거닐며 삶의 속도를 늦추고, 우연에 자신을 맡긴다. 그 태도는 곧 글쓰기의 방식이기도 하다. 계획된 결론이 아니라, 걷다 만난 문장들로 사유를 확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Part 4'인 '바쁘지만 우아하고 싶어'에서는 삶의 리듬을 묻는다. 오노레 드 발자크처럼 치열하게 몰입하는 삶도 있고, 에드거 앨런 포처럼 자신만의 공간과 리듬을 지키는 삶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바쁨의 양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기질에 맞는가 하는 질문이다.
"어떤 위대한 작품은 작가가 평생을 발로 다져 온 길에서만 피어난다."(179쪽)
이 문장은 책을 덮고 나서 오래 남았다. 도시의 시간과 삶을 밟아온 작가가 옛 작가들을 현재로 불러내고, 그들의 철학을 독자와 연결하는 방식. 그의 삶과 문장이 결국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 책은 하나의 증언이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1920년대 파리로, 런던과 뉴욕의 골목으로, 서울의 카페와 서점으로. 찰스 디킨스, 폴 오스터, 조지 오웰을 만나며 문장 속을 걸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세 가지
첫째, 도시를 다루는 방식이 독창적이다. 공간을 소개하는 대신, 그 공간에 스민 시간과 문장을 엮는다. 둘째, 여행을 재정의한다. 떠남이 아니라 바라봄의 문제로 정의한다. 셋째, 삶의 속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쁘게 사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기질을 아는 것이 성숙임을 말한다.
이 책은 일상에서 쉼이 필요할 때, 여행을 준비할 때, 혹은 아무 데도 떠날 수 없을 때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도시를 걷는 동안, 혹은 카페 한편에서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저마다의 '종이 다큐멘터리'를 써 내려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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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11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