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그 큰 방향성.
5월 13일 (목)
이틀 전 화요일 아침 출근하여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UNIFIL 본부 훈련담당부서의 중국군 중령으로부터 장황한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이번주 금요일 아침 아홉시부터 열한시까지, 약 두 시간동안 UNIFIL과 적십자사, 유니세프 이 세 조직이 시민보호와 관련된 사항들을 두고 협조 회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POC(Protection of Civilian) 이라고 불리는 이 회의는 비록 화상으로 실시하기는 하지만, 국제적인 기구가 셋이나 참여하는, 제법 규모가 큰 회의였다.
장황한 편지의 내용에는 회의의 진행 순서와 회의 전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 적혀있었다. 요지는 UNIFIL 본부가 예하 대대들에게 레바논에서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면, 각국 대대들은 시나리오 속 각 상황별로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일종의 답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각 대대의 답을 UNIFIL 본부가 다시 모아서 종합본을 적십자사와 유니세프가 함께 검토하여 실제 상황 발생 시 어떻게 조치할지, 어떤 부분을 지원할지 고민하며 토의하는 것이 회의의 순서였다.
단순히 시나리오만 주고 정답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답을 찾는 과정을 거쳐야만 제한 사항을 찾아내고 상급부대로 건의하여 해결할 수 있다.
확실히 서양의 업무 분위기여서 실학적인가. 아니면 실전이 많은 파병지에서 발생한 실전적 태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뭐 별 것 있겠나. 한 번 첨부파일이나 보자."
첨부파일은 워드 파일 1개와 PDF 파일 2개였다. 첫번쨰 워드 파일을 누르자 시나리오와 질문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번 시나리오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간의 갈등이 악화되어 전면전 발발 직전의 상황이고, 이에 두려움을 느끼는 지역 주민들이 우리 한국군 대대 주둔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뒤따르는 질문들은 이 혼란의 상황에서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와 이때 발생할 수 있는 제한사항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를 묻고 있었다.
-시민들을 보호하는 책임은 현지 정부에 우선적으로 있다. 현지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할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 유엔이 판단할 수 있나? 누가 판단하고 어떻게 판단하나? 각국 대대의 주둔지 게이트를 열라는 지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권한에게는 누구에게 있나?
-유엔 시설에서 쉼터를 찾고 있는 시민들과, 전투원들을 구분할 수 있나? 유엔이 무정부 전투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나?
-시민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무기와 탄약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해당국의 관련 부처로 인계하여야 한다. 만일 해당국의 부처가 없거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시민들은 UN시설에서 최소한의 기간만 머물러야 하며, 통상 위협이 가해지는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 누가 더 이상 당면한 위협이 없다고 판단하며 어떻게 판단하는지? 만일 시민들이 UN 시설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면 취해야할 조치는?
-각 대대에서 수용 가능한 민간인의 수와 식량의 분량은? 현지에서 소나 염소 등은 주민들의 귀중한 자산이다. 이를 가지고 주둔지에 들어오려 할때의 제한사항은?
이런, 생각보다 많고도 대답하기 다소 어려운 51가지의 질문이 있었다.
일단 접어두고 이어서 PDF 첨부 파일들을 확인했다.
유엔 평화작전부 (UN Department of Peace Operation)의 핸드북과 표준 작전 절차 지침서(Standard Operation Procedure) 였다. 각각 영문 PDF로 A4용지 300 여 쪽과 100 여 쪽 분량이었다.
오호 통재라. 한국군의 입장을 대표해서, 답하기 어려운 51가지의 질문을, 영문 400쪽, 300쪽의 관련 근거를 참고하여, 2일안에 답변을 작성 후 본부로 보내고 3일차에 국제 기구 협의 회의를 하자는 것인가.
이어서 첨부파일들도 고이 접어두고 맥심 모카 골드를 종이컵에 진하게 타서 밖으로 나왔다. 연병장을 바라 보고 계단에 걸터 앉아 마시면서 레바논에서 임무수행 5일차의 중위에게 떨어진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고민했다.
진행되어야 할 일의 순서를 그렸다. 우선 나 혼자 할 수 있는 분량과, 내용들이 아니다. 한국군을 대표하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고, 제시된 상황과 질문에 답하려면 전문성 있는 각 부서의 협조가 필요했다.
먼저, 상황의 심각성과 위급함을 작전과장님께 보고하여 다른 업무에서는 배제되었다. 이번주에는 이 프로젝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은 다른 부서의 협조를 구하는 일이었다. 협조를 구하려면 공통된 문제 공유가 필요하다. 시나리오와 제시된 상황, 질문 51가지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400여쪽의 유엔 핸드북과 100여쪽의 작전 지침서는 목차만 먼저 읽고 연관된 부분만 빠르게 읽었다. 이렇게 화요일이 훌쩍 지났다.
수요일에는 화요일에 번역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 부서를 돌아다니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수용가능한 난민의 수와 주둔지 방호계획과 관련해서는 작전장교가 계획. 수용가능한 일자는 보급품과 관련이 있기에 보급장교와 협조하였다.
문제는 내가 담당한 권한이나 법적인 부분에서 검토해야 할 것들이었다. 첨부자료에서 찾아도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때 육사 4학년 들었던 법학 강의가 기억났다. 법의 해석에 관한 두 가지 대표적 견해를 배웠다. 세상만사가 법에서 규정한 범위 안에 꼭 맞아 들어갈 수는 없으니 법을 제정한 목적을 고려하여 법을 대입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하나 있고, 입법의 목적은 어찌되었던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무조건 원문 단어의 뜻에 철저히 입각하여 해석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제와서 단어 뜻 하나하나 검토하며 문제에 접근하기엔 시간과 능력이(원문이 영어라면 더더욱) 안되었다. 입법 목적이 어떠했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유엔군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 위험한 분쟁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것.'
큰 목적을 생각하고 대원칙을 세우며 우선순위에 맞추어 답변하자 막연했던 질문들에 답을 달기 수월해졌다.
또 다른 것은 목적과 목표에 대한 견해였다. 우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표를 설정한다. 이를 헷갈려서는 안된다.
수요일 오후부터 목요일 오전에는 다시 답변들을 한국어에서 다시 영어로 번역하여 종합하였다.
목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종합본을 작전과장님께 검토 받고 다시 영어로 번역하여 UNIFIL 본부 교육 훈련처의 중국군 중령에게 보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했던가. 모르겠으나 일단 보냈다.
한국군을 대표한다는 부담이 컸다. 내일 회의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메일을 보내자 오랜만에 편두통이 왔다. 정리도 안된 딤이 쌓여 있는 방으로 가서 그냥 몸을 누였다. 얼룩져 있는 매트리스가 찝찝 했지만, 그냥 별 수 없이 옷을 입고, 배게는 수건으로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