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더러울 수 있음 주의.
7 월 10~12(토,일,월)
-다소 더러울 수 있음. 주의 요망 -
지난 한 주, 정신 없이 업무가 쏟아졌다. 푹쉬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눈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더 늘어지고 싶었지만, 주말만큼은 내 삶을 살으리라 생각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구부정하게 앉고 침대 밑에 던져 놓은 옷을 입었다. 잘 때 옷을 벗고 자는 것이 남성의 정력에 좋다고 들었고, 영화 속 섹시한 남자 주인공들은 목 늘어난 티셔츠가 아니라 탄탄한 몸을 보이며 벗고 자기에 그걸 보고 따라서 옷을 벗고 잔 지는 꽤 됐다. 밤새 틀어 놓았던 에어컨도 껐다.
가까스로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힘이 너무 없었다. 작은 것부터 해결하여 성취해서 기분을 좋게 한 다음 계획한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가는 나의 루틴에 입각하여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방을 닦았다. 이상했다. 방을 닦으려고 걸레질을 몇번 하자 힘에 부쳤다.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지난 한 주 피곤하긴 했나보다. 몸을 좀 더 쉬게 해주어야겠다 라는 생각에 걸레질을 멈추고 알람을 다시 한시간 반 맞추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어느 순간 두통으로 나도 모르게 깼다.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관자놀이의 핏대가 웅웅 거렸다. 피가 잔뜩 몰렸다가 다시 빠져나가고 다시 몰리는, 이 과정이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손을 이마에 올려보니 열이 느껴졌다. 갑자기 배도 너무 아파 화장실을 급하게 다녀왔다. 설사였다.
한바탕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오니 아팠다. 누우면 눕는대로 머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어 의자에 몸을 걸쳐놓고 나름의 원인을 진단했다.
일단 어제 회의를 마치고 복귀할 때부터 컨디션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이탈리아군의 야외 연합 훈련 교육을 참관할 때 너무 뜨거웠다. 강한 직사광선을 오랜 시간 쬐어서 일사병에 걸릴 것을 걱정할 수준이었으니까. 어지러울 정도로 더웠던 훈련 참관 이후에는 바로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동을 위해 탑승한 차량은 또 굉장히 추웠다. 무더운 야외에서 오랜 시간 괴로워했을것을 생각한 운전자의 배려는 감사했지만, 탑승 3분이 지나자 춥다는 생각과 차 안 가죽냄새가 거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령부 회의장도 마찬가지로 에어컨을 강하게 틀고 참석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번째로 통역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서 연합훈련의 차후 발전 방향과 레바논 군의 앞날을 고민하며 통역하는 것도 분명 몸에 무리를 줬다.
복귀하는 길에 썼던 손 세정제는 고속도로 화장실에 비취된 탈취제보다 향이 두 배는 되었다. 냄새를 맡는 순간 어지러웠고,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정적으로는 간밤에 벗고 에어컨을 켜고 잤다. 남자는 좀 차게 하쟈 정력에 좋다고 하여 시도해 보았는데 복통과 두통 무기력함, 근육통이 동반되어 왔다.
짧은 반성과 뉘우침 후에 시간을 확인해보려 휴대폰을 켜보니 부대에 설사 및 발열환자가 증가했다는 메세지가 올라왔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부대의 상당수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관련하여 의무대는 발생환자의 취식한 메뉴, 임무 및 환경 등을 고려하여 분석하였고, "냉방병"을 유력한 원인으로 판단했다.
'주기적인 에어컨 필터 청소. 실내/외 온도차 5~6도로 유지. 에어컨 바람 직접 쐬기 지양. 실내 환기 하루 3번 30분씩 하기. 아프면 쉬기.. 잠잘 때 배 부위는 따뜻하게 덮기.'
하나씩 체크했다. 시험 문제 답 맞히듯이 하나씩 맞아떨어져 갔다. 내친 김에 에어컨도 열어보았다.
정말이지 충격과 공포를 넘어선 경이가 느껴졌다. 동굴에 탐방가면 있는 종유석과 같이 먼지는 냉방 바람이 나오지 않는 부분만 쌓여 있었다. 에어컨 필터에 먼지가 고드름처럼 달려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산 나도 참 대단하고 어지간하다. 왜 단 한번도 열어보지도 않았을까. 엄마가 있었으면 등짝이 남아나지 않게 맞았으리라. 방안에 먼지가 떨어질까 에어컨 필터를 살살 빼서 샤워장으로 갔다. 남이 볼까 부끄러워 빠르게 샤워장으로 가서 샤워기 고압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이로써 의무대에서 냉방병의 원인으로 알려준 항목들에 모두 해당 되었다. 웃음만 나왔다.
공지들을 다시 한번 읽었다. 맨 밑줄이 강조되어 있었다.
'자가인내하면 면역력이 저하되어 고열, 장염으로 증상 악화.'
휴일이라 죄송했지만, 이미 고열, 장염, 근육통이 견디기 힘들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바로 의무대장님께 연락드렸다.
"충성! 대장님 휴일이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방금 공지하신 글을 읽어봤는데 하지말라는 거 제가 다 하고 있어서 지금 냉방병이 걸린 것 같습니다."
"지금 의무대로 와 약 줄게."
의무대장님과 군의관님께 증상을 하나씩 설명했고, 공지하신 냉방병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체온을 측정하자 38.5도가 나왔다. 해열제와 장염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액상 약을 처방 받았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또 다시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깼다. 시트는 다 젖었고, 온몸은 열이 나서 땀에 절여졌다. 쥐어짠다면 땀이 뚝뚝 떨어질 듯 했다. 자칫하면 참지 못하고 실수하겠다는 생각에 일단 급하게 화장실로 뛰었다. 막상 화장실에 가도 별 것 없었다. 이후로도 물만 마셔도 촌각을 다투며 화장실로 뛰어갔고, 그냥 돌아왔다. 옷은 계속해서 땀으로 젖어있고, 화장실을 나와서 방으로 걸어갈 때만 잠깐씩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렸을 적 열이 나면 아빠가 산수유를 따준 기억은 없지만, 엄마가 물수건으로 머리와 온몸을 닦아줬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행기로 21시간 떨어진 이곳에 26살짜리 성인 남성 군인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줄 사람을 찾는 것은 순탄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던데, 자취도 아니고 파병지이니 말이다. 혼자서 신음소리를 내며 샤워장으로 갔다. 찬물로 계속해서 몸에 물을 뿌려대자 정신이 좀 들었다. 벽을 두 손으로 잡고 서있어서 냉수를 강하게 틀어놓고 목 뒷덜미와 머리에 두었다.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여전히 손과 다리에 힘은 들어가지 않지만 눈에는 힘이 돌았다.
방으로 돌아와서 처방받은 약을 또 복용하였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약과 함께 물 조금 먹었다고 또 설사를 했다. 이즈음 되자 설사를 해도 뭐 나오는 것도 없었다. 밥도 하루종일 굶었고, 설사를 멈추는 약을 물, 그것도 조절해서 조금만 마신건데 그걸 빌어먹을 오줌으로도 못싸고 설사를 통해 보낸다니 화가 솟구쳤다. 분노로 내 몸을 학대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박완서의 유실을 보면 당뇨의 환자가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면서 거기에서 묘한 희열을 느끼는 부분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자신의 몸뚱이를 파악하고, 투명한 시험관 들여다보듯이 투시하고 마침내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있다는 쾌감은 당뇨병이란 희한한 병을 앓아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몸뚱이는 이제 완전히 객관적인 대상일뿐더러..'
육신의 객관화를 시도했다. 그래 차라리 한번 끝을 보자. 물이고 뭐고 다 먹고 누가 이기나 해볼자. 다 비우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물을 원하는 만큼 들이켜 마셨다.
정확히 7분 12초가 지나자 물을 원하는 만큼 들이키고는 단 한 방울의 오줌을 지리지도 못할만큼 설사만 했다. 땀과 설사로 탈수가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내 몸을 시험해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더더욱 악화되어가는 증상에 다시 의무대로 갔다. 오전의 약이 효과가 없음을 말씀드리고 주사를 맞고 강한 약에 취해 잠을 잤다. 방안은 밤이 되어도 덥고 또 습했다. 냉방병이라는 병명으로 차마 에어컨을 켜지도 못했다. 방문을 열고 모기장을 쳐 놓으면 바람이 안통하는 듯 하였고, 모기장을 열어놓으면 모기와 엄지 손톱만한 파리들이 계속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밤새 두통으로 인하여 깊이 잠들진 못했다. 기상 방송에 눈뜨니 아침, 냉방병 이틀 차였다. 새벽에도 화장실은 계속해서 다녀왔다.
'한번 횟수를 세어볼까? 하나의 영웅담으로 만들 수도 있겠는데?'
방문에 바를 정자를 포스트 잇에 써서 붙였다. 이윽고 두 번 더 다녀온 후에는 그냥 포기했다. 대낮에도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 그냥 뒤척거리기를 하루종일 반복하며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가까스로 저녁이 되자 어제와 오늘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도 오줌을 짜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는 습하고 더웠지만 해가 지자 젖은 담요와 시트로 춥고 열이 났다. 해열제를 먹고 어제 주사를 맞았는데도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링거를 맞았다. 의무대의 파란색 모포를 머리 끝까지 덮었다.
다시 날이 밝았다. 냉방병 3일차 월요일 아침이었다. 링거를 맞고 푹 자고 일어나자 두통은 좀 가셨다.
일단 다시 화장실에 갔다. 여전히 설사지만느낌은 지난 이틀과 사뭇 달랐다. 대장에서 수분 흡수라는 본연의 임무를 드디어 좀 한 모양이었다. 좀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기다리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좀 주기로 했다. 화장실을 둘러보며 고찰을 시작했다.
일단 좁았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 대개는 핸드폰, 신문, 책, 하다못해 화장실에 붙어있는 글귀라도 읽는다. 혹자는 치질의 주요 원인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모면하게 해주는 귀중한 세상들이다. 눕지도 못할 이 좁디 좁은 공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맞대며 배설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현혹될 무엇인가가 필요한게지.
비참한 기분이 들어 내가 경험 했던 좋은 화장실들을 떠올렸다. 어디가 있을까. 공중화장실이지만, 많은 인원들과 공유하지 않는 배타성을 가진 곳.
인천공항 화장실이 생각났다. 인천공항에서 통역장교로 근무할 때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상대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입국장 쪽에서 근무하였고, 자연스레 가까이 위치한 입국장 화장실을 사용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입국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공항은 텅텅 비었고, 당연히 화장실을 사용하는 인원들도 거의 없었다.
전염병의 위험과 자가격리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해외에서 입국한 극소수의 인원들만 사용하는 배타적인 화장실을, 세계 최대 규모의 면세점에서 나는 고급 화장품과 향수의 냄새를 맡으며 한달 가까이 매일 아침 사용한 것은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였다.
아니면 송파 롯데 콘서트 홀의 소변기도 괜찮았다. 여름날 밤 기회가 있어서 롯데 콘서트 홀에서 오케스트라를 감상하고 공연 마지막에 Nessun Dorma 를 들었다. 그 큰 콘서트 홀에 비해 조그만 체구에서 나오는 테너의 목소리는 홀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특히 클라이막스에서 승리에 겨운 마지막 가사 Vincero!(이기리라!)는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연주를 순간 멈춰 테너의 목소리만 가득하게 했는데 찰나에 전율이 온 몸을 감쌌다. 2부로 나누어진 긴 공연이 모두 끝나고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았을 때 화장실에 갔는데 마침 소변기에 얼음이 가득했다. 얼음을 맞추며 오줌을 쌀 때 Vincero를 되뇌였다.
인천공항과 롯데 콘서트 홀을 갔다가 다시 레바논 참모부 숙소 뒤 컨테이너 화장실로 돌아왔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 내가 사용하는 화장실의 수준이 지금의 나의 상황을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난 이 화장실도 사용할 수 있고, 저 화장실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나는 레바논에 와서 오줌이 안나올때까지 영역표시를 해봤고, 이 또한 언젠가 술자리에서 좋은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취했으니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웃기겠다는 생각이 들겠지.
'조르륵'
간질간질 하더니 물소리가 들렸다. 3일만에 드디어 나의 소중한 오줌이 나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Vincero! Vincero!